오리엔트는 거대했다. 자신이 나고 자란 제국은 그 어떤 곳과도 견주지 못할 만큼의 기술과 체계적인 국가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 제국을 쥔 민석의 아비는 무능했지만 운이 좋게도 유능한 관리들을 두었다. 그들은 거진 천년을 이어져온 나라를 무능한 왕의 집권 한 번에 모래성처럼 무너지지 않게 하고자 부던 애를 썼다. 맞다. 민석은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제국은 틀림없이 살기 좋은 곳이다. 더더욱이 이름값 뿐이지만 황자라는 꼬리표를 단 자신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환상이나 꿈 속의 모습은 추호도 없는 곳에서 민석은 미래를 꿈꾸길 거부했다. 그렇기에 제국의 남쪽, 작은 배를 타고 두시간을 달려 오게 되는 이름도 없는 섬에 민석은 다섯해 째 살아오고 있었다. 열여덟, 명목상의 성인식 이후로 스스로 아비라는 사람에게 이 곳으로 오길 요청했었다. 제 형들은 이 선택이 멍청하다 비웃고 손가락질 했지만 민석은 분명히 원하는 바가 있었다. 빛나는 제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과 신분 계급의 가장 밑에서 굴려지는 백성들. 그리고 전염병이 끊이질 않는 지옥에 갓 성인이 된 황자는 제 발을 들이밀었다. 어느 누구도 원치않는 곳이지만 민석은 차라리 이 곳이 제국의 황실 중심부보다 더 희망적일 거라 생각했다. 누군가 그것이 어리석은 것이라 비난할지언정 제 인생의 선장은 자신이었다. 명석한 두뇌는 황자라 하나 그 출신에 가려 빛을 발하지 못했고, 이러한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자신이었기에 어쩌면 더더욱이 이렇게 되길 원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민석은 오늘 아침 음식의 탈을 쓴 것들을 구하러 누더기를 걸친 사람들이 모인 장터를 헤집었을 때, 제국에서 부터 배를 타고 떠밀려온 쓰레기 더미에서 낡은 책을 하나 찾았었다. 낡디 낡은 책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오리엔트의 일곱번째 첩에게서 나온 황자는 교육을 받았다. 그 속에서 그는 사슴이란 이름을 들어보았다. 제국력으로 1014년, 민석이 태어나기 삼십년 전에 쓰여진 책은 불현듯 민석을 자극했다. 책의 첫장을 읽으면서 꼬박 오십년을 숨은 사슴이 민석은 문득 궁금해졌다. '그' 가 실제로 존재하긴 하는 것인지 때아닌 의문이 들었다.
“사슴. 사슴...”
민석은 중얼거렸다. 입에 붙는 그 이름은 이상하게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너무나도 갑자기, 태어나 아무 기준 없이 살아온 자신에게 절대적인 삶을 부여해준다는 느낌을 받길 희망했다. 가슴에 누군가가 불을 지피는듯 했다. 배운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슴이 땅을 밟은 대륙으로 가는 길이 험하더라도 자신은 모험을 해 볼 필요가 있다는 터무니 없는 용기가, 너무나도 갑자기 머릿 속을 비집고 튀어 나왔다. 샘에서 물이 치솟듯이 강렬하게 이끌리는 느낌은 민석을 이끌었다.
“이봐, 민석.”
“...으응?”
“오후 배가 왔어. 아침 것보다 싣고 있는게 더 많아. 안 나갈 거야?”
“가, 가야지. 지금 나가려던 참이야.”
까만 머리에 초록색 눈. 투스는 민석이 섬에 발을 들인 오년전부터 많은 도움을 주었던 소중한 이웃이었다. 같은 나이의 그는 이곳에서 나고 자랐지만 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선 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나름의 확고한 신념으로 독립을 한지 몇년이 되어도 여전히 서툰 민석에게 투스는 많은 도움을 주었다. 황궁에서만 자라온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하는 문화와 야사를 주제 삼아 이야기를 나누는 밤이면 날을 새는건 금방이었다. 민석은 그만큼 투스가 즐거웠다.
“투스.”
“응.”
“사슴을 알아?”
“사슴?”
'그' 를 말하는 거야? 투스가 동그란 눈을 한채로 민석에게 되물어왔다. 응. 용을 말하는 거야.
“모르는 사람을 찾는게 빠를걸.”
“역시 그런가.”
“사슴은 갑자기 왜?”
“...아침 배에서 책을 하나 찾았어. 사슴을 이야기하고 있었어.”
그래서, 이번엔 그게 네 관심을 끈거야? 투스가 짐짓 높아진 목소리로 흥미있다는 태도를 보였다. 민석은 나름 진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그런듯해.
“뭐... 사슴을 찾아 나서기라도 할 거야? 사슴에 관심 가져봤자 돌아올것 하나 없어.”
“터무니 없는 이야기인거 알지만...”
“...진심이야?”
“떠나려고 해.”
“미친거야?”
어디로? 여길 떠서 사슴을 찾으러 대륙으로 가겠다고? 민석은 몰아붙이는 투스의 목소리에 움찔했다. 고작 아침에 본 책 한 권으로 대륙으로 가겠다고? 멍청아, 제정신이야? 투스는 멈추지 않고 민석을 쪼았다. 가던 걸음도 멈추고 삿대질을 하며 민석을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다그쳤다.
“있는지도 의문인 사슴을 찾으러 아우스로 가겠다고? 너 정말 정신이 어떻게 된 거야?”
“마냥 이상한 이야기도 아니잖아. 사슴은 전설이야. 욕심이 나는건 당연해.”
“바보같은 자식아, 아우스는 산 사람이 갈 곳이 못 돼. 제정신이 붙은 사람이 갈 곳이 아니라고.”
민석은 투스를 이해했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건 아니었다. 대륙 분명 위험한 곳이었다. 세상 모든 권력이 모인 비옥한 땅에는 마법이 살아 있었다. 그곳은 온전히 다른 세상이며, 온갖 향락과 유혹으로 뭉친 곳이 바로 대륙이었다. 한눈을 팔면 영혼을 빼앗기고 걸음 하나를 잘못 내딛으면 자신이 누구였는지 잃어버리는 곳이 사슴의 땅이었다. 투스가 지금 저를 욕하며 말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저의 어머니가 살아있었다면 그녀도 무조건 자신을 말렸으리라. 무엇보다도, 대륙으로 가는 길은 매우 험난했다. 제일 먼저 오리엔트의 가장 북쪽에 있는 항구에서 배를 타 가장 넓은 땅 칸으로 가야했는데,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곳을 건너기란 불가능했다. 칸은 죽음의 땅이라 불렸다. 아우스와 오리엔트를 합한 것의 두배가 넘는 광활한 땅은 물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으며 갈라진 흙 위에 서서 작렬하는 태양을 몸으로 받으며 싸워가야했다. 동물을 부릴 수 없음은 물론이고 제국에서 만들어진 차를 타고 한달을 꼬박 달려야했다. 그러나 그것마저 민석에겐 버거운 일이었다. 민석에겐 경제적 능력이 없었으니, 결국 칸을 맨 몸으로 밟아 넘는 것은 제 몫이었다.
대륙을 밟기도 전에 칸에서 말라죽는 것이 가장 예상 가능한 이야기였다. 민석은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오리엔트의 일곱번째 첩에게서 나온 황자에게는 인생의 의미가 필요했다.
그래서 지금, 민석은 사슴을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다.
***마법이 손을 뻗고도덕은 무너지는 곳법으로 규정할 수 없고노을빛이 파랗게 스며드는 곳용이 살아 숨 쉬는 대륙신의 땅, 아우스로 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