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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봐, 최가.”


 어깨를 가볍게 건드리니 밤바람에 살랑이던 머리카락이 잠깐 멈칫한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얼굴은 여자의 것과 전혀 닮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아름다워, 잠깐이나마 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이면 무(武)는 언제나 넋을 잃고 그것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몇번이나 말했지만, 무. 고운 미간이 찌푸려지고 흉터많은 손가락이 어깨 위에 얹은 자신의 손을 걷어내는 동안에도 무는 그것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식으로 나를 부르지 말게. 나는 누군가가 나를 나의 가문만으로 바라보고 함부로 평가하는것을 원하지 않아.…내가 서 있는 곳도, 내가 존재하는 순간도 모두 나 자신의 것이고 나 자신에 의한 결과물이지, 결코 내 가문의 것도, 내 가문에 의한 결과물도 아니야.”
 “설마 내가 그걸 모를까봐. 가문의 힘을 빌리는 것이 싫다고 신분패까지 조작해 무관시험을 봤을 정도로 권력에 진저리치는 자네를 옆에서 계속 지켜보았는데 말이지.”
 “…그런데 왜 계속해서 가문으로 나의 이름을 대신하는 것이야. 자꾸 그런다면 나도 이제 자네를 권가라 부를것이네.”


 뭇 궁녀들의 마음을 꽤나 설레이게 만든다는 그 얼굴로 제법 기분나쁜 표정을 지으며 쏘아붙이니 그것마저 썩 귀엽게 느껴져 무는 정말 자신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싶었다. 황궁 비밀부대의 수장을 맡을만큼 대단한 실력자에, 모르긴 몰라도 자신과 제대로 붙는다면 누구 하나 죽기 직전까지는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워야 할 멀대가 뭐 그리 좋다고 이리 방정인지…허탈하게 웃으며 최를 바라보자 여전히 머리카락 한 올 까지 안예쁜 구석이 없다. 아주 반푼이가 다 되었구나, 생각하면서도 멋대로 지껄이기 시작하는 입을 다물게 할 방도역시 찾을 수 없었다.


 “자네가 나를 불러주기만 한다면, 그 호칭이 얼간이라 하더라도 기쁘게 대답해줄 수 있으리라 확신하네만.”
 “…….”


 대답하지 않고 괜히 시선을 돌리며 그나저나 자네는 왜 나와있는겐가, 폐하의 곁을 지키고 있는것이 아니었나. 덧붙인다. 이렇게 넌지시 말을 붙이면 언제나 동공을 내리깔며 말을 돌려버리곤 하는 최의 행동을 모르는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묘하게 쓸쓸해보이는 뒷모습에 입안이 쓰고 주로 언급되는 왕의 이야기에 열이 치민다. 남색가라 멀리하지 않고, 기분나쁘니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라며 버럭 소리라도 지르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하지만……이봐, 최가. 알고있나. 나는 그리 시선을 피하면서도 영락없이 달아오르는 자네의 귓볼을 바라보고 있을때면, 참을 수 없이 자네에게 입을 맞추고 싶어져.


 “…휘두에게 맡겨두고 나왔다네. 뭐 그리 한가한 몸이라고 왕의 난잡스러운 정사장면까지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이봐, 무(武)…”
 “그러고보면 왕은 참 겁이 많은 인물이지 않은가. 수십 수백만의 군대를 거느리고도 뭐가 그리 두려운지 조선 제일가는 밀정부대를 둘씩이나 끼고사니 말이야.…그렇게 죽음의 위협이 두려우면 얌전히 궁안에 틀어박혀 시조나 읊고계시면 될것을,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하루가 멀다하고 밤놀이질이니…”
 “그만, 무. 아무리 듣는 귀가 없더라도 그리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아니되는 법이라고, 내 누누히 말하지 않았었나.”


 그래, 말했었지. 내가 왕의 듣기싫은소리를 늘어놓을 적마다, 자네는 그리 눈썹을 모으고 어린아이를 혼내는 부모의 것 같은 표정으로 늘, 나에게 진심을 다해 화를 내고는 했지.…자네의 그런 모습이 보기싫으면서도 다른 사내의 험담에 미간을 찌푸리는 자네의 행동에 심통이 나, 일부러 자네의 앞에서만 왕의 듣기싫은 소리를 늘어놓고있는 나를, 아마 자네는 영영 눈치채지 못할테지. 미묘하게, 아주 미묘하게 공기의 흐름이 뒤바뀌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어두운 침묵속에, 그 고요함을 먼저 흩트려놓은것은 변명하듯 입을 연 최의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폐하께서는 고충이 많으실것이야. 저 자리는 아무리 장성한 성인이라도 견디기 힘든 무게를 가진 곳이네.…폐하는 이제 겨우 열 여덟이지 않으신가.”
 “…….”
 “왕은 곧 나라이며, 왕은 그런 나라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존재야.…어떤 왕이라도, 그 무엇보다 자신의 옥체를 소중히 하는것은 결코 그릇된 일이 아닌 것이지. 무, 이정도의 호위는 그닥 유난스러운 일도 아니라는것을, 자네도 잘 알고있지 않은가.”


 암, 알고있지. 알고있고말고. 허나 알고있음에도 울화통이 치미는것을 어쩌겠는가. 온갖 유곽들을 돌아다니며 밤나들이를 일삼는 왕의 뒤를 비밀스레 쫓는 자네가 왕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몇번이나 위험 앞에 다가서고, 몇번이나 그 길다란 손가락에 생채기를 남겼는지 알고있는데. 어찌 내가 분노하지 않고 견딜 수 있겠는가. 한동안 또 말이 없는 최의 옆에 주저앉아, 무(武)는 그저 하늘만 바라보았다. 저 깨끗한 별하늘에 취해 여기저기를 떠도는 음유시인들처럼,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차라리 그렇게 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나는, 그리고 또 자네는.


 “최가.”
 “…….”
 “…이봐, 후연(逅緣).”


 최, 하고 부르니 들은척도 않다가 못이기는 척 이름으로 불러주자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무(武)를 바라본다. 새카만 눈동자가 고요히 일렁이는것이, 연 또한 무의 목소리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네는 왕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네의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 말했었지만,”
 “…….”
 “나는 자네가 왕을 지키다 목숨을 잃는다면……주저없이 왕의 목을 베어버릴 수 있을것이네.”


 상상하기조차 끔찍스러운 듯 설핏 미간을 찌푸리는 무의 목소리에 연(緣)은 말이 없었다. 연, 연,…후연, 왜 아무말도 하지 않는겐가. 평소처럼 눈가에 잔뜩 힘을주며, 듣는 귀가 없다고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라 그리 이르지 않았나, 꾸중을 주어야지. 속으로 끊임없이 중얼거렸지만 답해주는 소리는 없었다. 평소에는 제 멋대로 나불거리던 주둥이도 합죽이가 되었는지 닫힌 채 열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끊길듯 끊길듯 끊어짐없이 이어오는 침묵속에 무(武)의 고개가 힘없이 떨구어졌다. 그러니, 부디 자네의 옥체또한 강녕하시길 바란다네. 농담처럼 웃으며 중얼거린 읊조림에, 연은 끝까지 대꾸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왕은 언제나처럼 한심한 밤나들이질에 무와 연을 대동했고, 이것저것 따라붙으면 거추장스럽다는 왕의 호기로운 발언에 하릴없이 단 둘이서만 왕을 호위하며 따라온 두 사람은 이번에는 왕이 난교를 벌이고 있는 방 바로 윗 지붕에 앉아 여느때만큼 까맣고 여느때만큼 아름다운 별하늘을 바라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네 궁녀들에게 괜한 수작질좀 그만 붙이시게, 그러다 폐하의 눈에 들어오기라도 하면 무슨 불벼락을 맞으려고 그러나. 뭐 어떤가. 내가 진정 왕의 여자를 탐하려 하는것도 아니고, 어차피 나이든 여자는 여자로 보지도 않는 건방진 애송이일 뿐인데. 궁녀들도 저런 애송이에게 마음이 설레이지는 않는다네. …자네는 정말……, 쿵. 위엄을 보여야 할 부하들이 없자 긴장이 사라졌던 탓인지, 아니면 평소보다 느른하게 풀어져있던 그 묘한 분위기 탓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깨달았을즈음엔 이미 너무 늦어있었다. 유곽의 기생들이 난도질을 당하고, 그것들과 헤프게 정을 통하던 왕이 비명을 지르고.


 “폐하!”
 “……! 연!”


 말릴 틈도 없이 지붕에서 뛰어내려 왕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려나가버린 연(緣)을 따라 무(武)도 함께 움직였다. 지붕에서 뛰어내린 후 망가진 창문을 부수고, 여기저기 널린 기생들의 시체와 살아남아 도망치는 기생들을 지나쳐 왕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연, 어서, 막아라, 연! 소름이 돋았다. 왕이 소리치고, 연이 막아서고, 요란하게 등장한만큼 많은 숫자로 밀려든 자객들이 하나 둘 씩 쓰러져가는 장면을 보며, 심장이 뛰고 잔소름이 돋아났다. 어서 움직여 연과 함께 저들을 막아서야 하는데, 다급한 마음과 달리 몸은 야속할정도로 느리게만 움직여줄 뿐이었다. 네 명째의 자객이 쓰러지고, 뒷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연이 주춤하는 사이, 다섯번째의 칼이 연의 가슴을 꿰뚫었다. 쿵, 털썩. 연의 무릎이 바닥에 짓이겨지는 순간, 아주 괴상스러울정도로 느긋하게 흘러가던 움직임이 원래의 흐름을 되찾았다. …연……연, 후연, 최후연!! 떨리는 목소리를 부여잡아 벼락처럼 커다란 소리를 뱉어낸 무가 연을 향해 달려나갔다. 왕을 죽이기 위해 자신에게 달려드는 자객들을 정신없이 베어내고 이제 거슬리는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을때, 무는 피투성이로 쓰러진 연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연의 머리를 쓸어내리고 있었다.


 “연, 연…후연, 연…….”


 꿀럭꿀럭 세차게 피를 뱉어내는 가슴을 막아보고자 손을 올렸지만, 혹여 연이 아파하기라도 할까봐 힘을 주어 눌러줄 수 조차 없었다.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제어되지 않는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연, 연…안쓰러울정도로 떨리는 목소리를 하고, 피투성이의 손을 피투성이의 몸에 올린 채 어찌할 바 모르는 무의 손을, 연은 가만히 쥐어주었다. 투둑, 툭, 떨어지는 눈물이라도 한 번 다정스레 훔쳐주고 싶은데, 손이 차마 닿아주질 않았다. 아, 죽는구나. 계속해서 피를 토해내는 가슴위에 얹어진 무의 투박한 손바닥을 느끼며, 연은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아마, 소리없이 눈물을 쏟아내고있는 무(武)또한 자신의 삶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있으리라, 그리 서글프게 짐작할 뿐이었다.


 “…무……”


 끔찍한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입을 한번 열어 숨을 한번 토해내는 것 조차 힘에 부쳤다. 애써 힘을 쥐어짜내, 여즉 떨림을 멈추지 못한 무의 손가락을 감아 꾹 쥐었다. 움칠 떨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무의 눈동자가, 연은 언제나 두려웠다. 저가 어딘가에서 왕을 지키다 상처를 얻어올 때 마다 귀신같이 알아채고 분노를 품던 그 눈동자가, 가라앉아 온갖 꾸중들을 뱉어내던 목소리가, 심지어는 지금 볼품없이 떨리며 저의 꺼져가는 생명을 붙잡고 있는 이 손가락 하나하나까지……연은 언제나, 무(武)의 모든것들이 두려워 견딜수가 없었다. 이것이 언제 돌변해 칼을 겨누게 될까. 손바닥에 새로 새겨진 깊은 흉터를 바라보며 말없이 끓어오르는 살심(殺心)을 잠재우던 그 얄팍한 인내심이 언제쯤이면 바닥이나서, 시덥잖은 농담인양 말로 뱉어내는 것처럼 가볍게 칼을 꺼내 왕의 목을 가르게 될까.…그렇다면, 그 후 무(武)는 과연 어떤 삶을 살게될까. 왕을 죽인, 왕을 해한, 하늘도 돌보지 않을 천하의 몹쓸놈이라는 꼬리표를 매달고, 무는, 무(武)는 과연……. 연(緣)의 눈꼬리가 촉촉하게 젖어들어갔다. 연은 그렇게, 언제나 그렇게 사소하다면 사소할 것들이 끊임없게 걱정되어, 차마 무를 밀쳐낼수도, 끌어안을수도 없이 너무나 달콤해 그 자신의 속부터 썩어들어가게하는 무의 마음을 받아먹으며 그것을 모르는 채 하고 있었다.


 “왕을…무, 폐하를……”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아니, 멎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바라보니 오히려 평소보다 세차게 뛰어대며 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급기야는 너무 강하게 뛰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파올 지경이었다. 눈물이 흐른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쉬이 눈물을 보여서는 안되는 것이라 어릴때부터 받아온 교육따위는 이런 상황에서 전혀 도움이 되어주질 않았다. 아파, 연, 연, 칼에 찔린것은 자네이고, 울컥울컥 피를 토해내는 가슴을 가진것도 자네인데, 왜 내가 이리 아픈겐가. 왜 내가 이리 아파야 하는것인가. 아픈건지 슬픈건지 모르겠다. 그저 가슴이 아파서, 속절없이 떨려오는 손가락을 애써 말아쥐는 흉터많은 손조차도 안쓰러워서, 마냥 울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갓 태어난 아이처럼, 소리 한번 내지 못한 채 그저 울기만했다. 영원같기도 하고, 어쩌면 일각도 채 못넘긴 것 같은 그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간신히 꺼내놓은 목소리에, 무(武)는 이제 울 수 조차 없게되었다.

 연, 연, 후연, 최후연(厚緣).
 ……자네는, 어찌 그리도 잔인한가. 사람으로 태어나 어찌 그리 잔인할 수 있는겐가. 그래, 그 순간 평소처럼 꾸중을 놓지 않았던것은 어쩌면, 흘러가는 농담처럼 중얼거린 나의 말을 진심이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그래서, 내가 진정 그대의 왕을 해할까 싶어.
혹시나 그 소중한 옥체에 작은 생채기라도 남기게 될까 싶어, 그대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리 나에게 잔인하게 구는겐가. 피가 철철 쏟아지는 가슴을 차마 틀어막지도 못하고, 이리 죽어가는 자네를 두고 제 몸 하나 살겠다고 도망가버린 왕을 대신해서. 그리 고통받으면서도 끝끝내 내 손은 놓아주질 않고, 끝까지 목소리를 죽이지도 못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편히 마음조차 놓지 못한 채……그래도 자네는, 왕은 곧 나라이니, 무엇보다 왕 그 자신의 육체를 중히 여겨야 하는 것이라 말할 생각인가. 끝까지, 끝까지 자네는…….


 “폐하에게 칼을 겨누어서는 안돼네, 무, 무…부디…부디, 왕을 끝까지 지켜……”
 “…자네는, 자네가 이 지경이 되어서도 왕의 안위부터 걱정할 생각인가! 걱정말게. 내가 지키지 않아도, 웬만한 일로는 꺼지지 않을 끈질긴 명인 듯 싶으니!”
 “……무, 아무리 듣는 귀가 없다지만…”
 “그만, 그만, 연…후연…제발 말을 아끼어. 자네의 꾸중대로 듣는 귀가 없다고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겠네…자네가 그리 귀애하는 왕의 듣기싫은 소리를 늘어놓지 않을것이야. 지나가는 궁녀에게 괜히 수작질을 부리지도 않고, 모르는 척 자네의 옷자락을 밟아 자네를 곤란케 하는 일도 없을 것이네.…연, 연……자네가 하는 꾸중을 모두 들어주겠어. 자네의 충고를 모두 지켜줄것이네.…그러니 제발…제발, 제발 이렇게 나를…….”


 무, 자네를, 참 많이 사랑했어.
 움직임이 멎었다. 숨 또한 끊어졌다. 그러나 무(武)는 확신할 수 있었다. 마지막 순간 연(緣)이 내뱉은 말이, 자신의 멍청한 머리가 만들어 낸 비현실이 아니었음을. 연, 연, 후연, 연……. 피투성이 시신들이 널부러진 곳에서, 아직까지도 울컥울컥 피를 토해내는 시신을 끌어안고 무(武)는 울부짓었다. 더이상 눈물은 흐르지 않을것이라 생각한 게 바로 방금전인데, 연, 자네는 어찌 나를 이렇게 뒤흔드는가. 자네는, 자네는 왜 마지막까지 나를……. 하고싶은 말이 남은것도 같고, 이제 더는 할 말 조차도 사라져버린 듯 싶기도 했다. 상황이 이리 변하자 남는것은 후회뿐이었다. 연, 후연, 나는 왜 그대에게 말하지 못했을까. 멍청하게 곁을 멤돌며 모르는 척 넌지시 말을 건네 볼 시간에, 차라리 좀 더 빨리 속삭여줄것을 그랬어. 내가 더 많이 표현하고, 내가 더 많이 사랑한다 생각했는데…바보같이, 결국 먼저 말하고 떠난것은 그대였어. 왜 이리 잔인한가. 왜 이리도 얄궃은가. 이렇게 떠날거면 차라리 말이나 꺼내놓지를 말지. 그냥 내가 평생 자네를 원망스러워하며 살아갈 수 있게…자네가 당부한 말들 따위, 지키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도록…….
 무(武)는 계속해서 눈물흘렸다. 이미 죽은 몸에 생채기라도 하나 더해질까 싶어 꽉 끌어안고있던 연(緣)의 몸이 싸늘하게 식어가고, 왕이 대동한 밀정부대원들이 나타난 뒤에도 부하들 앞에서 체면이 상하는 것 조차 신경쓰지않고 계속해서 울부짓었다. 모든게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직까지도 믿을 수 없는 것들이 수두룩한데, 연의 시신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있고, 마지막 순간에 연은 자신에게 사랑한다 말해주었다. 모르겠다. 그저 눈물이 멈추어주질 않았다. 아픈가, 슬픈가. 그대가 없는 세상을, 나는 이제 어이하여 살아가야 하는가. 꼴도 보기 싫은 왕의 한심스러운 작태를, 나는 이제 무엇으로 견뎌주어야 하는가. 답을 낼 수 있는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모르겠다. 모르겠어. 나는, 전부 모르겠다.

 고개를 들어올렸다. 여전히 눈물은 멈추지 않았지만, 희번득이 빛을 내는 눈동자가 저를 향하자 왕은 체면도 잊고 저도모르게 움칠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런것을 보아하니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기는 한 모양이구나. 그것이 우스워 무는 웃음지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왕을 보며 웃고있는 무(武)의 모양새는 기괴하다못해 차라리 괴상할 정도였지만, 그를 보고 마주 웃어줄 수 있는 이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연, 후연(厚緣).…남겨진 나도 이렇게 아픈데, 이런 나를 남겨두고 떠나가는 자네는 다치지 않겠는가. 돌부리에 걸려 한번 넘어지지도 않고, 나처럼 심술궃은 놈의 발에 옷자락이 짓이겨져 한 번 당황하지도 않고, 어여쁘게 떠나갈 수 있겠는가, 그대는. 무(武)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중히 품에 안고있던 연의 시신을 바닥에 내려놓고, 걸치고있던 도포자락을 풀어 그 위에 덮어주었다. 그리고 왕을 향해 걸었다. 원망의 빛이 가득한 눈동자를 치켜뜨고 걸어오는 무의 모양새에, 왕은 물론이거니와 주변에 포진해있던 밀정부대원들까지 짐짓 긴장한 기색을 띄우고 무의 몸짓을 찬찬히 살피었다. 그 허리춤에 걸려있는 기다란 도 한자루가, 오늘따라 유난히 위험스레 느껴지는 듯 싶었다.


 “……!”


 무(武)는 무릎꿇었다. 살의가 가득 담긴 눈동자를 소중히 품고, 그러나 한치의 거짓됨도 없는 몸짓으로, 무는 왕의 앞에 무릎꿇었다. 왕이시여, 끔찍할정도로 갈라져 마치 역귀의 그것처럼 느껴지는 목소리가 조용히 속삭였다. …연, 그대는 떠나가시게. 뒤 한번 돌아보지 말고, 얼굴 한번 찌푸리지 말고, 그저 환히 웃으며 떠나가시게. 춥지도 말고, 덥지도 말고, 참 많이 사랑한다던 나를 남겨둔 일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저 그리 편하게 떠나가시게.


 “부디, 그 어떤 것보다도, 그 자신의 옥체를 최우선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
 “당신은, 왕입니다.…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분이십니다.”


 제가 목숨을 다하는 순간까지, 저는 폐하의 곁을 지키며, 폐하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할것입니다. 여전히 끓어오르는 살심을 그 얄팍한 인내심으로 몇번을 눌러담고, 무(武)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왕이시여, 왕이시여. 부디 기원합니다. 당신이 적어도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현명한 왕이 될 수 있기를. 내가 기어코 내 손으로 당신을 베어버리는 날이 오지 않을 수 있도록, 나는, 끝까지 기원하겠습니다.
 말아쥔 주먹탓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연한 살에 생채기가 생겨났지만, 무(武)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생각했다. 연, 후연, 최후연. 자신의 오랜 친우이자, 마지막이 될 연정을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대가 걱정스러울 일이 없도록, 내 그대 가는 길을 편안히 닦아 놓을 것이야.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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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허루ㅠㅠㅠㅠㅠㅠ 진짜 잘쓰세요ㅠㅠㅠㅜㅜㅜ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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