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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다시 눈을 뜬 곳은 어두운 박스 안이었어. 혼자는 아니었지. 내 양 옆에는 나와 똑같은 모습의 친구들이 있었어. 어둡고 갑갑한 공간이었지만 우리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지. 우리가 이루어내야 할 사명으로 오히려 두근거렸거든. 기록을 남기는 것, 표현을 돕는 것이 우리가 태어난 목적이었고 곧 우리의 사명이었지. 다만 기분이 좋지 않았던 건 내 밑에 지우개란 놈이 달려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야.

   

  사람들은 우리와 지우개들을 종종, 아니 거의 매번, 짝이라고 생각하곤 했지. 하지만 그건 우리에겐 엄청난 모욕이었어. 지우개란 놈들은 항상 우리의 존재를 부정해왔기 때문이야. 우리들은 스스로를 희생하며 기록이란 것을 가능하게 했지. 나의 일부를 어딘가에 남겨놓음으로써 인간이 가진 기억력의 한계를 보완해왔어. 우리는 점 하나를 찍더라도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지. 그렇게 공들여 써놓은 우리의 흔적을, 지우개들은 실수라며 순식간에 지워버리곤 했어. 정말 우리가 실수를 했다고? 실수는 인간이 했겠지. 그런데도 인간들은 지우개란 것들을 이용해 우리의 흔적을 부정했어.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런 지우개가 바로 내 발밑에 달려있다니 정말 끔찍했지.

   

  우리는 곧 박스에서 나오게 되었어. 그리고 다시 작은 녹색 유리병 안에 담겼지. 곧 쓰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인간은 그러지 않았어. 사실 그 안에 네 달이나 있었지. 인간은 우리 대신 샤프나 볼펜을 쓰더군. 그들보다 역사적으로 훨씬 앞선 우리는 유리병에 넣어놓고 말이야. 샤프와 볼펜은 우리보다 희생정신이 부족해, 그들의 몸을 채우는 것은 언제든 가능하거든. 또 큰 고장이 아니고서야 기록을 남기는 기능에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아. 하지만 우리를 봐. 우리는 그렇지 않아. 우리는 흑연의 일부를 잃는 장애가 곧 기록을 남기는 방법이라고! 우리의 희생이 없었다면 인간은 이렇게 편하게 기록을 할 수 없었을 거야.

   

  우리는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인간을 도왔는데, 인간은 쓰다가 작아진 우리를 몽당연필이라며 비웃고, 쓰기 불편하다고 버리기 일쑤였지. 사실 우리라고 이런 삶이 좋았을까? 인간 너희를 위해 끔찍이도 싫어하는 지우개를 한 몸으로 달고, 연필깎이에 머리를 들이밀어 머리가 깎여나가는 고통을 참아냈어. 적어도 내가 태어난 이유를 위해서 말이야. 아 사실 지금은 좀 헷갈려. 내 삶의 이유는 곧 너희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야. 왜냐하면 난 지금 허리가 부러져 이 집 싱크대 아래에 굴러떨어져 있거든.

   

  네 달이나 갇혀있는 동안 난 조금의 기록도 남기지 못했어. 인간이 날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러던 어느 날 인간은 초록색 병에서 나를 뽑더군. 나는 몹시 기뻤었어.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어. 인간은 나를 굴려보고, 세워보고, 맛을 보더니 이빨로 무참히 씹어보기도 하고, 물에 넣어버리질 않나. 그래도 성에 차지 않는지 바닥에 놓고 밟더니 결국 날 반으로 쪼개 버리더군. 다시 붙여보려는 건지 나의 갈라진 몸을 두어 번 대어보더니 포기하더라. 그게 다야. 인간은 나를 기록하는 용도로 쓰지 않았어.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를 괴롭히기만 하고 나에겐 기회조차 주지 않았지. 그 후 나는 우연히 싱크대 밑으로 굴러들어갔고 거기서 나의 남은 반쪽의 몸이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것 까지 보고 말았어.

   

  내 삶의 이유는 너희 인간의 필요일 뿐이었어. 우리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해. 모든 것은 너희 입맛대로. 이제 나는 인간 너에게 필요 없어졌으니 여기 있을 필요도 없겠지. 다시 눈 뜰 때까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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