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 빙의글]안다미로 00
하필 이런 날 가져온 우산이 칙칙하기 짝이 없는 우산이었고, 또 하필 그 우산이 반쯤 고장나 너덜너덜한 우산이었고, 또, 하필 나는 그 사실을 몰라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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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의 시작. 싱그러운 나뭇잎들이 저마다 자라나 나무들이 풋풋한 초록빛을 뽐내기도 잠시였다. 매년 오는 장마는 언제나 징글징글했다. 그나저나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장마는 해가 쨍하게 뜨고 에어컨 없으면 못 사는 날씨 정도는 되야 시작된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이르다는 생각을 했다. 전날 밤 뉴스를 보며 엄마한테 엄마, 원래 장마가 이렇게 이른가? 했더니 엄마는 심드렁하게 그렇지, 뭐, 하며 티비를 껐다. 그나저나 내일 쓸 우산 꺼내놔야겠네, 너도 얼른자, 엄마는 베란다에서 우산을 몇 개 꺼내와 현관에 놔두고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얼른 자라던 엄마의 말은 가볍게 모르는 척하고 새벽 네시까지 우로빠들의 덕질을 했다. 아니, 우로빠들은 뭘 먹고 이렇게 잘 생겼대! 네 시에 잤으니 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당연히 고역이었다. 겨우 일어나 비몽사몽한 상태로 대문을 나서다 오늘부터 장마야, 우산챙겨! 하는 엄마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대충 우산을 꺼내들었다.
"노란 우산은 들고 가지마, 고장나서 버려야 돼!"
문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엄마의 말은 듣지도 못하고 나는 학교로 향했다. 잠이 웬수지.
그렇게 나는 수업을 마쳤고, 우산을 펴자마자 무언가 잘못된 것을 느꼈다. 분명 겉보기에는 멀쩡했던 우산이 펼치자마자 여기저기 삐죽삐죽 솟았다. 아, 시망. 망했다. 결국 현관에서 발만 동동 굴리며, 학원 간다며 뛰어간 친구, 미리 말해주지 않은 엄마, 그리고 바보같은 내 손을 원망하다 결국 가방을 벗어 머리 위로 올렸다. 그냥 뛰어가야지.
그리고 나는 내가 치명적인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적어도 우리집은 걸어서 20분 거리라는 사실을, 뛰어가도 10분은 족히 걸린다는 사실을 빗 속에 발을 디딘 후 깨달았다. 어쩌겠는가,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나는 속옷까지 홀딱 젖은 상태였다. 결국 나는 집까지 뛰었다.
"으, 다녀왔습니다.."
축축히 젖은 교복을 대충 집어던진 후 침대로 몸을 던졌다. 아.. 추워. 으슬으슬한게 딱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보일러 좀 올려야지, 스몰스몰 기어나가 대충 보일러를 켜고 다시 누웠다. 아.. 머리 아프다. 자야지. 씻어야한다는 생각도 저 멀리 던지고 나는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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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어디야.."
눈을 뜨니 익숙한 천장이 보이지 않았다. 굉장히 알록달록하고.... 그래, 민속촌에서나 볼 것 같은 느낌의 천장이 보였다.
"아씨! 아씨가 눈을 떴어요! 아이고, 마님!"
수건을 대야에 담아오던 한 아이가 나를 보며 기겁하고 놀라달아난 것을 본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문 밖을 나섰다. 놀라 버선발로 뛰어나온 우리 엄마와 아빠가 보였다. 그리고 그 분들은 얼굴만 같을 뿐, '나'의 엄마, 아빠가 아니었다.
"몇 달 동안 깨어나지 못하던 아씨가 눈을 떴당께요!"
날 놀라서 지켜보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주위를 둘러본 후 내 옷차림을 보았다. 한복과 비슷하게 생긴 옷이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우산을 잘못들고 온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일이 생겼다고. 일이 잘 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몰래 허벅지를 세게 꼬집고 중얼거렸다. 망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