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보세요? 전쟁기념관 유물기증 받는 곳 맞나요?
- 네, 맞게 거셨습니다.
- 제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됬던 무기 유물을 하나 기증하려 하는데요.
- 무슨 종류의 무기인가요?
여기까지는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 수류탄이요.
제가 이 말을 꺼내자 전화기 저 편에서 잠시 침묵이 이어졌습니다.
....하긴 그럴 만 합니다. 뜬금없이 웬 폭탄을 얘기했으니 당황했겠지요.
전화 저편에서 잠깐 이어진 침묵이 끝나고, 담당자 분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습니다.
- 저 선생님....수류탄 같은 무기류는 일단 경찰서에 연락하셔서 불법무기 신고를 하시고 신고를 하실 때 전쟁기념관 측에 맡기겠다는 각서를 쓰셔야 합니다. 그래야 저희 측에서 인수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뭐,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보면 불법적인 무기인 이 물건을 함부로 가지고 있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사실 이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가지고 있는 물건은 기폭장치(뇌관) 밎 폭약이 없고 외피만 있었기에 폭발의 우려가 없었고....
......무엇보다 외피가 도자기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물건의 정확한 명칭은 4식 도제 수류탄이라고 하는 구 일본군이 사용하던 물건입니다.
http://ja.wikipedia.org/wiki/四式陶製手榴弾
(일본어 위키피디아 해당 항목 링크)
http://rigvedawiki.net/r1/wiki.php/수류탄/일본군#s-2.6
엔하위키(라그베다 위키) 해당 항목 링크
뭐 링크를 타고 가 보시면 설명이 나와있지만 그래도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자면 2차대전 말기에 물자가 모자라게 된 일본은 수류탄 외피를 금속 대신에 도자기를 구워서 만들자는 막나가는[...] 발상을 하게 되었고, 실제로 잘못 넘어지기라도 하면 자폭 + 대규모 팀킬이 벌어지기 쉬운 이 물건을 양산합니다.
위력도 외피는 도자기, 화약은 저급 화약을 사용하다 보니 당연히 신통지 않았고, 그러면서 흙덩이라 쓸데없이 무게는 많이 나가고 깨지기 참 쉽기까지 한 물건이라 당연히 미군 상대로 사용되었기는 하지만 큰 전과를 올리기에는 부족한 물건이였지요.
그런데, 이 물건이 전후에 대규모로 폐기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는 정보를 제가 다니는 대학의 서클(동아리)에서 어느 날 입수하게 됩니다.
국제정세, 안보, 군사 관련 연구를 하는 서클이다 보니 서클 회원들은 밀덕은 기본, 군장수집 밎 리인엑트는 기본교양, 건덕후는 준필수(...?), 오덕은 고확률(...???)에 예비역 육상자위관, 퇴역 해상자위관, 현역 육상자위관 등의 이쪽 계열에 관심이 많거나 아예 직업으로 삼은 인원이 많았기에 저희 서클에서는 이번에 우리가 직접 가서 이 물건을 한번 땅 속에서 파내보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1월, 저희는 도쿄 인근에 있는 해당지점으로 5명의 인원으로 출발을 하였습니다.
직접 가서 보니까 파편 등의 부서진 조각은 말 그대로 지천으로 널려 있었는데, 대부분 진흙이 잔뜩 묻어서 지저분한 상태였고, 대부분 어디 한 군데씩 깨지거나 망가진 조각들이던 터라 파손이 없는 온전한 물건을 찾아 여기저기에서 구멍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같이 간 제 일본인 지인들의 신변노출을 막기 위해 얼굴을 가렸습니다)
땅 속을 파내도 파내도 조각들이 쌓여 있을 뿐이라 찾느라 좀 애를 먹었지요.
주변에는 하천이 흐르고 있어서 파낸 물건을 한 번 간단하게 씻어내는데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상태가 멀쩡하다 싶은 물건을 좀 모아봤습니다.
처음 찾을때는 안 나와서 고생을 했는데, 한 번 나오기 시작하니까 말 그대로 쏟아져나오기 시작하더군요.
이건 수류탄에 찍힌 관인이 남아있는 파편입니다.
이 관인을 통해 제조된 공장과 시기 등을 알 수 있다고 하더군요.
일련번호 내지는 총번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번호입니다.
아무튼, 발굴(?)현장 얘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1월달에 땅 속에서 파낸 저 물건들은 저희가 파낼 당시에 자기가 파낸만큼 가져가기로 정한 터라 저는 멀쩡한 도자기 외형이 남아있는 물건을 조금 챙긴 다음에 단면도를 보기 위해 깨끗하게 반으로 갈라진 물건을 좀 구하고 난 뒤에 파내기를 중단했지요.
그런데 이 와중에 같이 간 일본인 지인 한 명은 파다가 신들렸는지 파손이 없는 물건 수십개를 혼자서 파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이 물건을 파내고 난 뒤에 2월달이 되어서 저는 일시 귀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귀국 당시, 저 물건을 일본에서 스티로폼으로 포장을 하고 가방에 넣어 공항에 직접 휴대하고 들어갔는데, 모든 사람들이 이걸 도자기로 생각한[...] 덕분에 국제선 비행기를 탈 때에도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비행기에 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걸 한국에 와서 부모님께 보여드렸는데, 처음에 일본에서 70년 전에 만들어진 도자기라고 했을 때에는 놀라시면서 이거 귀한거 아니냐[...]고 하시던 어머니께서 사실 이건 수류탄이라고 설명을 하니까 바로 쓰레기 취급을 하시는 바람에[...] 좀 웃음이 나기도 했습니다.
이야기를 다시 원점으로 돌려서, 저는 전쟁박물관 측에 조금 더 설명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 그래요? 그런데 이게 사실 기폭장치나 폭약 같은 건 없고 외피만 있어요. 그런데다가 이거 외피 재질이 도자기라서 경찰에서 안 받아줄 것 같은데요[...]
- 그래요?.....어......
다시금 잠시동안 전화통 너머의 전쟁기념관 측의 침묵이 이어졌습니다.
- 선생님, 그러면 저희가 한 번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경찰청에 한 번 문의를 해 보겠습니다,
- 예 알겠습니다. 결과가 나오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그날 오후가 되자, 경찰청에서 전쟁기념관 측이 바로 인수하는데 문제가 없다는 법규해석이 나왔다는 연락이 오더군요.
전화를 통해 그 다음날 전쟁기념관 측 과장님 한 분이 직접 나오셔서 물건을 인수하러 오시기로 약속을 잡았지요.
전쟁기념관에서 직접 제 집으로 찾아와서 물품을 인수해 가셨는데, 생각지도 않던 소정의 기념품을 명함과 함께 다 주시더군요.
(명함에 적힌 내용은 일단 가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런 기념품을 받았다는 것을 안 제 가족들은 그딴 쓸데없는 수류탄보다 나진칠기쪽이 더 가치가 있다고 저를 디스(?)했습니....
그리고 며칠 전, 전쟁기념관 측에서 제 한국 주소로 우편이 하나 왔다고 얘기를 들어서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부탁을 해서 물건을 받았습니다.
열어보니 안의 내용은 전쟁기념사업회 측에서 보내온 물건이더군요.
일단 이름은 숨겼습니다.
2014년도에 기증받은 물건은 2015년도부터 전쟁기념관 물품기증실에 전시된다고 하니 내년에는 제가 기증한 물건을 전쟁기념관에서 볼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해당 물품 전시시 기증자의 실명 병기 표기, 전쟁기념관에 있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역대 유물 기증자 명판에 제 이름이 새겨지고, 전쟁기념관 사보 등에 제 본명과 기증물품 항목이 실린다고 하네요.
이로서 저는 대한민국 전 국민, 기념관을 찾은 전 세계인을 상대로 제 본명이라는 개인정보를 영원토록 노출하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지금 본명을 숨겨도 내년부터 제 이름은 영원히 공개되니 저 증서의 본명을 지금 숨기나마나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