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비우는 일처럼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그리움 깊어갈수록
당신 괴롭혔던 날들의 추억
사금파리로 가슴 긁어댑니다
온전히, 사랑의 샘물
길어오지 못해온 내가
이웃의 눈물
함부로 닦아준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요
가슴 무덤에 생뗏장 입히시고
가신 당신은
어느 곳에 환한 꽃으로 피어
누구의 눈길 묶어두시나요
마음 비우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당신은 내 곁에 없었습니다
아픈 교훈만
내 가슴 무덤풀로 자랐습니다
- 이별 / 이재무
하루에도 몇 번씩
눈감는 소리
그 깊은 속눈썹의 떨림을
그대는 들으소서
어둠 속에 눈물 한 방울
툭, 떨어지는 소리
그대 들으소서
그대를 생각할 때면
혼자 흔들리던 그네처럼
내 마음, 허공 속에
흔들립니다
나의 태양, 나의 태양이여
이제는 돌아서야만 할 시간
미처 전하지 못한 마음은
그대 잠시 돌아보던
노을 속에 적었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점점 밝아지던 눈빛
그대만의 별을 찾아 헤매던
내 눈빛의 서러움
그대는 들으소서
이 세상 어느 곳에 있든지
그대는 들으소서 들으소서
- 그대는 들으소서 / 최옥
나는 그냥 외로운 거였어. 그냥 누가 옆에 있었으면 하는 거였고.
너는 믿어지니? 네가 더 이상 그립지 않다는 사실이.
아무 일도 없었던 날 점점 어둑해지는 공기 속에서 나는 그렇게 말하며 조금 슬펐습니다.
이렇게 잊는 거구나. 잊히는 것만 슬픈 것은 아니었구나. 잊는 것도 슬픈 것이구나.
- 사랑, 고마워요 고마워요 中 / 이미나
머지 않아 그 날이 오려니
먼저 한마디 하는 말이
세상만사 그저 가는 바람이려니
그렇게 생각해 다오
내가 그랬듯이
실로 머지 않아 너와 내가 그렇게
작별을 할 것이려니
너도 나도 그저 한세상 바람에 불려가는
뜬구름이려니, 그렇게 생각을 해다오
내가 그랬듯이
순간만이라도 얼마나 고마웠던가
그 많은 아름답고 슬펐던 말들을 어찌 잊으리
그 많은 뜨겁고도 쓸쓸하던 가슴들을 어찌 잊으리
아, 그 많은 행복하면서도 외로웠던 날들을 어찌 잊으리
허나, 머지 않아 이별을 할 그날이 오려니
그저 세상만사 들꽃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라고, 생각을 해 다오
행복하고도 쓸쓸하던 이 세상을
내가 그렇게 했듯이
- 나도 그랬듯이 / 조병화
사랑이 뭘까. 마음은 왜 변할까.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도 그 애를 생각하면 문정동 어느 작은 공원 문 앞에 걸터앉은 채
책을 읽으며 나를 기다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사랑한 그녀의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연민이건 뭐건 상관없다.
설사 그게 사랑이 아니라 해도
사랑보다 중요하지 않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 보통의 존재 中 / 이석원
세상엔, 가도 된다고 하면, 정말 가 버리는 못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괜찮다고 하면, 정말 괜찮을 거라 믿어 버리는 못된 사람들도 있죠.
그리고 여기, 그런 사람들 때문에 마음 아픈 그대가 있습니다.
내가 친구인 척하니 정말 친구라고 믿어 버리는 못된 그대가.
- 사랑, 고마워요 고마워요 中 / 이미나
몸속에 맹장을 지니고 다니듯
잘 보이지 않는 눈 위로 안경을 걸치고 다니듯
내 마음은 항상 당신을 데리고 다닙니다.
당신을 피해 멀리멀리 도망간 곳에서 온통 당신과 마주쳤던 날,
그 질긴 그리움 앞에서.
- 사랑, 고마워요 고마워요 中 / 이미나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우리들 사랑도 속절없이 저물어
가을날 빈 들녘 환청같이
나지막히 그대 이름 부르면서
스러지는 하늘이여
버리고 싶은 노래들은 저문강에
쓸쓸히 물비늘로 떠돌게 하고
독약 같은 그리움에 늑골을 적시면서
실어증을 앓고 있는 실삼나무
작별 끝에 당도하는 낯선 마을
어느새 인적은 끊어지고
못다한 말들이 한 음절씩
저 멀리 불빛으로 흔들릴 때
발목에 쐐기풀로 감기는 바람
바람만 자학처럼 데리고 가자
이제는 지는 꽃이 아름답구나
언제나 너는 오지 않고 가고
눈물도 없는 강가에 서면
이제는 지는 꽃도 눈부시구나
진리에 굶주린 사내 하나
빈 소주병을 들고 서 있던 거리에도
종소리처럼 낙엽은 떨어지고
황국도 꽃을 떨고 뿌리를 내리나니
그동안 나를 이긴 것은 사랑이었다고
눈물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물 깊은 밤 차가운 땅에서
다시는 헤어지지 말 꽃이여
- 가을 꽃 / 정호승
저는 사랑과 생명에 끝이 있다는 것에 찬성하는 편입니다.
그 필요성에 대해서도 공감하구요. 적어도 이성적으로는.
나의 삶은 38년간 무기력함에 시달리다가 마흔을 앞두었다는
시기적 절박감과 마침 무너졌던 건강 덕분에 생의 유한함을 절실히 목도한 후
비로소 삶에 생명력과 애착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일생토록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다가 그제서야 하고 싶은 게 생겨나더군요.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에 끝이 없다면 과연 지금 이 사람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을까.
이런 간절함이 생겨날 수 있을까. 아니겠지요. 아닐 겁니다.
나의 이 간절함의 힘이 끝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 슬프긴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동력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 보통의 존재 中 / 이석원
이별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 것
겨울 끝자락의
꽃샘추위를 보라
봄기운에 떠밀려
총총히 떠나가면서도
겨울은 아련히
여운을 남긴다
어디 겨울뿐이랴
지금 너의 마음을
고요히 들여다 보라
바람 같은 세월에
수많은 계절이 흘렀어도
언젠가
네 곁을 떠난
옛 사랑의 추억이
숨결처럼 맴돌고 있으리
- 꽃샘추위 / 정연복
이대로 떨어져 죽어도 좋다
떨어져 산산이 흩어져도 좋다
흩어져서 다시 만나 울어도 좋다
울다가 끝내 흘러 사라져도 좋다
끝끝내 흐르지 않는 폭포 앞에서
내가 사랑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내가 포기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나는 이제 증오마저 사랑스럽다
소리없이 사라지는 폭포가 되어
눈물없이 떨어지는 폭포가 되어
머무를 때는 언제나 떠나도 좋고
떠날 때는 언제나 머물러도 좋다
- 폭포 앞에서 / 정호승
시동을 걸고 내 손을 잡을 때
“이 음악 어때요?” 하면서 볼륨을 높일 때
나를 향해 사진기의 셔터를 누를 때
내가 만들어 간 샌드위치를 먹을 때
그의 목소리로 “잘 자요”라고 말할 때
- 연인 中 / 임에스더
누가 그런다. 내가 마음을 열면 상대는 항상 달아나더라고.
난 그런 이들에게 묻고 싶다. 그렇다면 세상이 문제일까 당신이 문제일까.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여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한다.
그렇다. 내가 늘 비슷한 사람을 만나는 것도,
그 사람들이 늘 내게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모두 내 탓이다.
내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들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연애는 패턴이다. 그리고 그 패턴은 다 내가 만드는 것이다.
내가 바뀌면 패턴도 바꿀 수 있다. 쉽진 않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 보통의 존재 中 / 이석원
미안하다, 데라지마. 난 늘 이래. 친구인 척하면서 사실은 친구가 아니야.
네 행복을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어. 언젠가 네가 결혼을 한다면 난 태연한 얼굴로 너희 집에 가겠지.
입으로는 축하한다고 말하고, 축하선물로 시계 따위를 건네고, 네 아내와도 즐겁게 이야기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너의 신혼생활에 저주의 못을 박을 거야. 헤어져라, 헤어져라, 헤어져라.
- 그대는 폴라리스 中 / 미우라 시온
우리는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오래 빛날 수 있다
저 높은 곳의 별처럼
멀리 떨어져 있음으로써
더욱 확실할 수 있다
누가 이별을 눈물이라 했는가
아픔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빛날 수도 없다
아픔이 크면 클수록 더욱 빛나는
이별은 인생의 보석이다
헤어짐을 서러워하지 말라
이별은 초라하고 가난한 인생에
소중하고 눈부신 보석을 붙이는 일
두고두고 빛날 수 있는
사랑의 명패를 다는 일
- 아름다운 이별 / 윤수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