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름, 이동혁에게
1. 그 아이를 처음 만난 건 지금 이 시점보다는 덜 했던, 하지만 어느 무더운 여름 날이었다.
2. 그 순간부터 내 여름은 이동혁, 이동혁은 여름으로 정의내려졌다. 그리고, 내 시선의 끝에는 언제나 이동혁이 있었다.
3. 걔는 이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도 점심 시간이면 항상 나와서 공을 차고 있었다. 또래보다 작은 체구에도 그 존재감은 상당했다. 그러니까 내가 알지. 이동혁은 그 피부색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는데, 오히려 난 그게 더 좋았다. 나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라.
4. 나는 남들과 같은 시간에 하교한 날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조퇴는 기본이며, 학교에 안 간 날도 수두룩했다.
5.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푹푹 찌는 듯한 더위에 이기지 못한 이 약해빠진 몸뚱아리를 이끌고 건물을 빠져나오다 난 쓰러지고 말았다. 의도한 바는 죽어도 아니었고. 실내에서 걷는 것도 힘들었다, 그날은.
6. 이동혁의 친구 놈인 나재민의 입을 빌리자면,
그 미친 새끼가 골 잡고 있다가 패스도 안 하고 뛰어갔다니까? 그렇게 얼빠진 일 한두 번 있는 게 아니지만 그날은 쎄해서 따라가니까 너 쓰러져 있었잖아. 지가 업지도 못할 거면서 혼자 가긴 왜 가. 내가 업고 건물 안으로 나르는데 구급차 부르던데. 여튼, 씨팔 새끼. 너 가고 아는 애냐고 하니까, 몰라 이 한마디 하고 다시 가더라. 여튼 알다가도 모를 놈.
7. 그렇게 일주일 입원을 했고 학교 가려고 보니까 방학식을 이미 했더라. 난 그것도 모르고 통신문 몇 개 가져다 주던 이동혁을 이상하게 봤지. 아이스크림 빨면서 자기 축구복 입고 오던 걔를.
8. 내 여름은 이동혁이다. 이동혁의 겨울은 나다.
9. 겨울도 마찬가지다. 생활복을 입는 학교라 다행히 뭘 껴입어도 편하게 지낼 수 있었고, 살이 찢어질 듯한 추위에 운동장에는 정적이 가득했지만, 그 덕에 체육관에 북적거렸다. 예상했겠지만, 거기서도 그 아이들은 축구를 했다.
10. 수능을 보지 못했고 나는 취업을 했다. 넷 중 하나는 유학을, 둘은 군대를, 이동혁은 대학을 갔다.
11. 이동혁 덕에 더 넓은 세상을 봤다. 이동혁 덕에 설렘을 느꼈다. 이동혁 덕에 여름과 겨울을 알았고, 그렇기에 내 여름은 이동혁이다.
12. 이동혁은 내 덕에 그 좁은 세상의 답답함을 알았다고 했다. 이동혁은 내 덕에 소름 돋지만 나쁘지 않은 설렘을 알게 됐다고 했다. 이동혁은 내 덕에 겨울을 알았다고 했고, 이동혁의 겨울은 나다.
13. 친구인지 썸인지 연애인지 섣불리 정의 내리지 못할 관계는 지속됐고, 나는... 나는 그냥, 나는, 이동혁을 겨울에 가둬 버렸다.
14. 이동혁은, 나는, 우리는, 그 겨울에, 겨울을, 겨울만을, 서로에게 남기고 말았다.
15. 분명 같은 공간에 머무는 우리지만, 우리는, 우리는 다른 시간 속에서, 다른 기억을 공유하며, 서로를 가둬둔 채, 죽을 만큼 아프고 죽지 못해 아픈 그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 나는 그 아이에게 겨울 그 이상의 어떤 존재였을까. 그리고 나는 그 아이를 왜, 날 고통 속에 빠뜨린 여름으로 정의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