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들어서 더 살기 좋아지지 않았나요?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한지 4주년을 맞은 25일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 50~70대 장년층을 중심이 된 ‘제 14차 탄핵기각 총궐기 국민대회’가 열렸다. ‘태극기 집회’라는 별칭답게 참가자들의 손에는 미니 태극기가 들려있었고, 태극기를 망토 삼아 몸에 두른 이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충남 천안에서 올라왔다는 이모(57)씨에게 박근혜 정부의 국정수행, 특히 경제 정책에 대해 묻자 “언론에서는 박근혜 정부가 일을 잘 못해서 경제 지표들이 떨어졌다고 하는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살림살이가 나아졌으면 나아졌지, 못해진 것은 없다”면서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가 살기 힘들었지 않느냐. 지금은 그때보다 낫다”라고 주장했다.
이모씨와 같은 주장은 다른 이들에게서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경기 안양에서 온 장모(62)씨는 “경제 지표는 역대 정권 중 최악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여론 조작을 위한 것”이라면서 “오히려 대한민국 경제는 더욱 번창하고 있다. 언론은 박근혜 정부에게 불리한 지표들만 들이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인천에서 온 고모(47)씨도 “박근혜 정권에 대한 비판이 많은데, 서민들은 만족해하며 살고 있다. 여러 언론에서 하도 비판해대기에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왔다”면서 “번창이란 표현은 쓰기 그럴지 몰라도 무역은 흑자를 기록하고 있고, 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태극기 집회 참여자들의 말대로 박근혜 정권 들어 경제는 성장한 걸까. 지난해 12월 통계청과 한국은행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하며 외친 ‘4·7·4(4% 성장·70% 고용률·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 공약은 그야말로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박근혜 정부가 본격 출범한 2013년 이후 3년간 경제성장률 4%를 기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3%대 성장도 2014년(3.3%) 단 한 번뿐이었다. 2013년엔 2.9%, 2015년은 2.6%였다. 지난해도 2.7%에 그쳤다. 한국은행은 올해 경제성장률도 2.5%로 전망하고 있다. 대한민국 역사상 1961년 이후 경제 성장률이 3년 연속 3%를 밑돈 적은 없었다.
고용률 70%도 사실상 무산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경제협력개발기구 기준 고용률은 2012년 64.2%에서 올 3분기 66.5%로 2.3%포인트 상승하는 데 그쳤다. 실업자는 더 늘었다. 2012년 82만명이던 실업자는 지난해에는 98만5000명으로 100만명에 육박했다. 실업률도 3.2%에서 3.6%로 뛰었다.
갈수록 경제지표는 떨어지는 데도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은 왜 “경제는 성장하고 있다”고 말하는 걸까. 심리학 용어 중 ‘선택적 노출’로 설명이 가능하다. 이는 사람들이 마음에 드는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선택하거나 고통을 주거나 위협적인 메시지는 회피하고자 하는 태도를 말한다.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은 “촛불집회 참가자는 공산주의자” 등의 가짜 뉴스를 연일 찍어내는 극우 성향의 매체를 신뢰한다. 보고 싶은, 마음에 드는 뉴스만 보고자 하는 집단적 방어기제가 작용한 결과다.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에게서는 ‘박정희 향수’도 찾아볼 수 있었다. 경기 안성에서 온 조모(68)씨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대한민국 경제성장은 눈부셨다. 그가 있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잘 살게 된 것이다”라면서 “그런 박정희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을 끌어내리려는 탄핵 심판 과정을 보면서 ‘이건 아니다’ 싶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주장하는 이들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려는 자들이다”라고 말했다. 서울 구로구에선 온 박모(65)씨도 “촛불집회에 참가하는 젊은이들이 힘들게 살던 과거를 어찌 아나.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전 국민이 단결해 일군 게 대한민국이다. 박정희 대통령 덕분에 이 정도로 먹고 살게 된 것도 모르고 설치는 젊은이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어 집회에 나왔다”고 말했다.
남정훈 기자 [email protected]
그래....한번 니들 말대로 알아보았음
';참여정부 경제실패'; 뭇매, 공정한 평가 아니다
급변한 경제환경 속 새로운 패러다임 모색..저성장?양극화와 싸우며 개혁 향해 도전
참여정부가 지향했던 한국경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방향을 우리는 경제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참여정부의 경제철학은 그 이전이나 이후의 정부와 크게 달랐다. 참여정부의 경제철학은 워낙 복잡다기해서 한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큰 줄기만 파악할 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종래의 성장지상주의를 지양하고 그 대신 성장과 분배의 조화를 꾀한 점, 둘째, 개혁과 개방을 동시에 추구한 점, 셋째, 공간적 차원에서 보자면 종래의 서울 일극주의(一極主義)를 지양하고 지방과 수도권의 균형발전을 추구한 점, 넷째, 시간적 차원에서 보자면 종래 눈앞의 성과에 집착하던 단기주의를 과감히 버리고 장기주의를 지향한 점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를 하나씩 설명해 보자.
참여정부 경제철학(1): 성장-분배의 조화를 꾀하다
첫째, 노무현 대통령은 성장 일변도에 빠지지 않고, 분배?복지를 성장과 함께 생각한 최초의 대통령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참여정부는 기본적으로 개혁과 개방, 성장을 지향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약자, 패배자들이 사회적으로 도태되는 것을 방치하지 않고,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경제적 성과에 상관없이 더불어 잘 사는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역대 정권들이 오직 경제성장만을 중시하여 오랫동안 사회통합을 도외시하였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참여정부가 사회통합을 중요한 정책 목표로 내건 것은 큰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또한 역대 정권은 사회통합을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종의 군더더기 혹은 사치품’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던 데 반해 참여정부는 사회통합 그 자체를 중요하게 보았을 뿐 아니라 개혁?개방?성장을 촉진하는 상보적 관계로 파악했다. 이런 점에서 참여정부는 역대 정권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경제철학을 갖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광범위한 사회보험 사각지대를 메우려 노력한 점, ‘희망사회 투자계획’이란 이름의 빈곤아동?청소년 종합대책, 그리고 참여정부가 도입한 근로장려세제(EITC) 등은 새로운 발상이었다. 부동산대책이나 사교육비 축소 정책도 성장과 분배, 효율과 공평을 동시에 도모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과잉복지로 인해 복지병이 발생하는 일부 선진 복지국가와는 달리 한국과 같이 낮은 복지 수준에서는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충족할 수 있는 영역이 얼마든지 있으며 이를 통해 한국경제를 한 단계 도약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 참여정부의 관점이었다.
참여정부 경제철학(2): 개혁과 개방을 동시에 추진한 첫 정부
둘째, 참여정부는 개혁과 개방을 동시에 추구했다. 19세기 후반 대원군 시대 이후 한국의 근현대사를 본다면 개혁 혹은 개방을 추구했던 정권은 더러 있었으나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한 정권은 찾기 힘들다. 개혁과 개방을 동시에 추구한 점이 참여정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원군은 서원 철폐, 기득권 타파 등 과감한 개혁을 추진한 공적이 있으나, 개방을 거부하고 쇄국정책을 고집한 결정적 오류를 범했다. 그리하여 동북아를 둘러싼 열강의 침탈 경쟁이 벌어진 19세기 후반 우리로서는 발전하느냐 식민지가 되느냐 하는 결정적 국면에서 대원군이 개방을 거부한 대가는 컸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와 거의 발전 수준이 비슷했던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문명개화’ 정책을 취함으로써 서양문명을 적극 수용했고, 그 결과 불과 몇 십 년 만에 근대화를 달성했다.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세력의 마지막 회원으로서 이웃 나라인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중국을 반식민지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 점에서 대원군의 정책은 개혁이란 면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것이 있으나 개방을 거부한 실책은 엄중한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반대로 개방에는 적극적이었으나 개혁을 거부한 정권도 있다. 예를 들어 박정희, 전두환 정권은 수출주도형 개발전략을 채택한다든가, 자본시장을 개방한다든가 하는 개방전략을 적극적으로 채택했으나 개혁을 거부한 독재정권이었다. 개혁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민주화를 철저히 거부하고 극단적으로 탄압함으로써 박정희?전두환 정권은 역사적으로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저질렀다. 이렇게 볼 때 개혁과 개방,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추진했던 정권은 우리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데, 참여정부는 이 둘을 동시에 추구했던 최초의 정권이었다고 특징지을 수 있다.
참여정부 경제철학(3): 서울과 지방의 균형있는 발전을 꿈꾸다
셋째, 참여정부의 정책을 공간적으로 특징짓는 ‘수도권과 지방의 균형발전’ 정책은 우리나라의 고질병인 수도권 과밀 현상을 타개하면서 각 지역의 특성과 장점을 극대화하여 국가경쟁력을 극대화하자는 전략이었다.
지방분권특별법(2003), 균형발전특별법(2003), 행정중심복합도시특별법(2005)이라는 균형발전 3대 입법이 그 근간이었다. ‘행복도시’(행정중심복합도시), 혁신도시, 기업도시, 금융?물류허브는 국가균형발전 정책의 구체적 모습들이었다. 지방과 서울이 서로 발목을 잡는 형국을 타파하고 상생?발전으로 나아가려는 거대한 지방화 역사(役事)를 시작한 것이 참여정부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참여정부 경제철학(4): 인기 는 단기부양책 버리고 장기적 체질강화
넷째로 장기주의는 참여정부 경제정책의 시간적 차원의 특징이다. 과거 역대 정권의 단골 메뉴였던 단기주의 정책은 반짝 경기는 호전시켰지만 부작용이 컸다. 경제체질 강화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가까운 예를 찾자면 2000년 이후 카드 및 부동산 대란이 대표적 사례가 될 것이다. 눈앞의 성과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경제정책을 운용해야 한다는 것은, 말하기는 쉬워도 실행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 국민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의 고도성장 과정에 너무나 익숙해 있어서 일종의 ‘빨리빨리병’에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런 국민들에게 참고 기다려달라고 요구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참여정부는 당시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손쉬운 경기부양책을 동원하는 것을 지양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구조개혁 및 경제의 체질 개선에 주력했다. 예를 들면 10.29, 8.31 등 부동산 대책은 그 대표적 사례다. 이들 대책은 보유세 강화, 3주택 이상 보유자에 대한 양도세 인상, 서민들을 위한 임대주택 확대를 기조로 하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부동산 문제를 최초로 옳은 방향으로 접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거품이 꺼지는 과정의 고통을 덜고자 당장 약발이 듣는 건설경기라도 부양하자는 달콤한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부동산투기라는 망국병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장기적 시야를 가진 정책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성장잠재력 뿌리째 훼손한 박정희, 경제대통령 순위 맨 뒤에 서야
결국 참여정부는 이상 네 개의 큰 원칙을 통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를 짓누르고 있는 저성장과 양극화라는 양대 문제에 대처하면서 동시에 우리 경제, 사회 곳곳에 장기적으로 누적된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불투명과 불공정, 불로소득, 부정부패를 걷어내고 만인이 공정하게 경쟁하는 혁신주도형 경제를 건설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수십 년 내려오던 경제운용 패러다임의 근본적 변화라 할 수 있다. 해방 후 한국에서 이런 철학을 가진 정권은 일찍이 없었으므로 그런 점에서 참여정부의 의의가 발견된다.
흔히 박정희를 가리켜 정치적으로 독재는 했지만 경제성장을 잘 했다고 평가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한발 더 나아가 박정희를 경제대통령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겉만 보고 속을 못 본 데서 오는 소치다. 박정희는 눈앞의 경제실적 올리기에만 급급해서 수많은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방치했고, 그런 부작용이 장기적으로 누적되어 한국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렸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돈을 마구잡이로 찍어내서 물가를 폭등시켰고, 전국을 난개발의 아수라장으로 몰아감으로써 땅값을 천정부지로 올려 현재 한국의 땅값을 세계 최고로 만든 장본인이 박정희다. 한국경제가 지금도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인 높은 물가와 높은 지가는 한국경제의 성장잠재력을 뿌리째 훼손하는 경제의 주범이므로 그 기초공사를 한 박정희에 대해서는 준엄하게 책임을 묻지 않으면 안된다.
요컨대 박정희는 당장 국민들 인기 얻을 만한 단기적 성과에만 집착해서 우선 눈앞의 성장률은 높이긴 했으나, 그런 인기영합주의가 가져온 폐해는 컸고 오래갔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는가. 결국 그런 무리한 경제운용이 물가와 지가의 폭등을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우리 경제의 장기적 성장잠재력을 근본적으로 훼손하였고 앞으로도 오래 동안 훼손할 것이므로 그 해악은 참으로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만일 역대 대통령 중에서 경제대통령을 뽑는다면 박정희는 맨 끝에 가서 서야 할 것이다.
참여정부 경기 나빴던 것은 벤처?카드?부동산 거품 무너졌기 때문
참여정부 시절 경기가 나빴기 때문에 대통령이나 참여정부가 별로 인기가 없었고 지금도 그런 평가가 상당이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일부 보수언론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을 가리켜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란 별명을 붙이기도 했지만 이는 참으로 악의적이고 진실과 거리가 먼 평가다.
여기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당시 경기가 나빴던 것은 사실이나 그 이유는 참여정부가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고, 참여정부가 등장하기 전에 경제관료들이 일으켰던 3대 거품(벤처 거품, 카드 거품, 부동산 거품)이 붕괴한 시기가 바로 참여정부 시기였기 때문이다. 3개의 거대한 거품이 동시에 꺼진 시기가 바로 참여정부 5년이었다.
그래도 불경기에 대한 모든 비난을 한 몸에 받으면서 변명 한 마디 없이 장기적 경제잠재력 제고에 노력했던 것이 참여정부였다. 참여정부를 평가할 때 이 점을 생각하지 않고는 정확한 평가가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평가는 이 점을 도외시하고 단지 나타난 결과만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공정한 평가라고 볼 수 없다. (계속)
[이정우 칼럼: 참여정부 경제를 말한다①]
참고로 이정우 교수는 참여정부 당시 청와대 청책기획위원장을 맡았으며 한미 FTA 추진 당시 前 기획위원장으로서 이에 극렬하게 반대하며 참여정부를 매우 심하게 비판했던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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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대통령 선거일이 꼭 1년 남았다. 몇몇 대선 주자들은 일찍부터 1년후의 승리를 위해 달려 나가고 있다. 지지율의 변동에도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런데, 대선을 1년 앞둔 지금 이상한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저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본받겠다고 이야기하고 나서는 것이다.
박정희 리더십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물론이고 그의 생가를 방문하거나 묘소를 참배하는가 하면 외형까지 흉내내고 있다. 딸인 박근혜 의원은 물론이고 이명박, 손학규, 고건 씨까지 가세한 형국이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박정희와 같은 ‘경제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인데...
과연 박정희 끌어안기의 모습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박정희는 과연 성공한 경제대통령이었는지 세븐데이즈에서 짚어본다.
1969년 외환위기가 왔다. (국내 상장기업 45%가 부실기업)
1974년 국가부도를 맞았다.
1979년 외환위기가 왔다.
1980년 외환위기는 계속됬다.
전두환이 일본에게 60억 달러 구걸해와 빚으로 빚의 이자나마 간신히 갚는 상황이었지만
언론은 진실을 보도하지 않고 박정희·전두환를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 구국의 영웅>이라 신격화만 했다.
1979년 박정희는 180억 달러, 세계4위 채무국, GDP 대비 55%가 넘는 빚에 시달리게 했고,
1985년 전두환은 550억 달러, 세계1위 채무국, GDP 대비 250%가 넘는 빚에 시달리게 했다.
언론은 이때 역시 국가부도 위기를 보도하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1997년에 1974년 이후 두번째 국가부도를 맞았다.
민주화 시대에도 언론은
외환 보유고가 38억 달러로 고갈되었지만
국가부도 하루 전날에도 국민들에게 한국경제는 문제 없다고 장담 했다.
이랬던 언론이..
2000년 2/4분기 건국이후 최초로 순채권국에 입성하자 경제위기라고 보도하고,
2002년말 1200억 달러로 세계 4위 외환보유국에 입성하자 나라가 망한다고 보도하고,
2006년 대외 국가채무가 GDP 대비 30%로 건실하자, 경제위기라고 보도하고,
2006년말 대외 순채권이 900억 달러를 돌파하자, 나라가 망한다고 보도했다.
오늘도 언론과 국민은 박정희·전두환 시절이 좋았단다.
이들 때문에 우리가 먹고 산단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만들어 놓은 빚더미 부도열차에 마지막에 탑승해
역시 무능과 부패 속에 국가부도 시킨 김영삼.
저들에게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착취 당하고 세뇌 당한 50년 세월이 원통하고 안쓰러울 따름이다.
역사의 진실 앞에 입다물고, 지역주의와 부패의 늪에 빠져있는 한국경제학자들은 반드시 단죄 받아야 한다.
◈ 숫자로 본 박정희시절의 경제 (랭킹 4위)
**성적을 조작하여 학급에서 1등이라고 하면 말이 되는가?
언론이 만든 허구에 근거하여 박정희 경제가 1등이라고 하면 말이 되는가?
『5명이 주장하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 낸다』고 한다
박정희경제신화는 수구보수세력들이 조작해 낸 허구일 뿐이다
-다음의 글은 강준만의《현대사 산책》, 경상대 장상환교수, 제주대 강기춘교수, 최용식 21세기 경제연구소 소장, 박세길의
《다시쓰는 한국현대사》등의 글을 참고 했습니다
***숫자로 본 박정희시절의 경제***
박정희시절(1961-80)에 년 평균 8.5%의 경제성장을 기록, 국민총생산은 약 4배로 커졌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1962년 87달러에서 1981년 791달러로 거의 열 배가 늘었다
수출은 4천만 달러에서 약 210억 달러로 늘었다
(경상대 장상환교수의 글에서);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시대의 소비자물가 상승률(cpi)]
박정희시절의 소비자 물가는 평균 년 16.5%의 상승률을 보였고
1974년 24.3%, 1975년 25.7%, 마지막해인 1979년에는 18.3%였다
살인적인 물가상승이었다
-노무현김대중 같으면 살아 남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시대의 은행대출금리]
-60년대 은행대출 금리가 년17.5%-26%였다 70년대는 15.5%-24%였다
1965년도에는 금리가 년 30%까지 치솟았다 이 역시 살인적인 수치이다
-노무현김대중 같으면 살아 남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시대의 수출현황]
박정희는 날이면 날마다 수출의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결과는 박정희 18년간 수출 638억불에, 수입 871억불, 무역적자 233억불
-박정희시절; 233억불의 무역적자
-전두환시절; 8억불 무역흑자 (전두환은 8억 흑자를 자랑으로 여긴다)
-노태우시절; 132억불의 무역적자,
-김영삼시절; 366억불의 무역적자,
-김대중시절; 846억불의 무역흑자,
**이게 바로 박정희가 자랑하는 수출의 모습이다
박정희가 노무현김대중의 수출실적과 수출흑자를 보면 깜짝 깜짝 놀라야 한다
(박정희정권은 언론과 합작으로 수출성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했으나
엄청난 적자의 이야기는 속 빠진 체였다)
[박정권시절, 농민들 약 50%가 농촌을 떠나다]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 농촌이 잘사는 나라운운해도 사실은 그 반대다
박정희시절은 년간 약 50만 명씩 이농을 했다
박정희정권 전기간에 걸쳐 농촌인구의 거의 절반이 도시로 떠났다
농촌이 잘 사면 왜 이농을 하는가?
-1960년 농업인구가 58.3%였는데 박정희의 저곡가공업화정책과
미국에서 들여온 엄청난 잉여농산물로 살기가 어려워 그리고 농촌부채로
이농을 함으로 1975년에는 37.5%까지 줄었다 1967-1976 년 사이에
670만명의 농촌인구가 도시를 떠났는데, 이는 한국전쟁동안의 인구이동보다 더 심대한 것이었다
박정희시절은 수출을 위해선 저임금이 필요했고,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서 저곡가 정책이 강행했다
저곡가정책으로 농촌은 몰락해갔다
-충남대 박진도교수의 말
(박정희시절은) 저임금으로 수출을 했다 저임금으로 수출을 하자면 농촌에서 사람을 뽑아 내야 합니다
그렇게 노동력을 충당했다 그런 면에서 농촌을 잘 살게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박정희시절의 부동산]
63년 기준으로 하여 7년 후 강남의 부동산은 학동이 20배,
압구정동이 25배, 신사동이 50배로 올랐다 충격적이지 않는가?
같은 기간 서울의 중구 신당동은 10배, 용산구 후암동은 7.5배 상승했고,
전체적으로 서울의 땅값은 이기간 동안 14배나 폭등하는 혁명적 상황이었다
-이래도 박정희가 위대하다고 하면 도대체가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김대중노무현 같으면 몇 번이나 쫓겨났을 것이다!
[도시빈민 판자촌 광주폭동]
-박정희시절에 살기 어려워 농촌을 떠난 사람들이 도시빈민층을 형성했다
그들은 산동네에 판자촌을 이루어 살았는데 서울의 경우 박정희 정권은 그들을 강제로 철거, 광주(성남)으로 이주를 시켰다
도로도 없고, 물도 없고, 전기도 없는 지역에 사람만 추방을 했다
그들은 천막을 치고 살았는데 무엇보다 일자리가 없어 굶주리다 못해 대대적으로 저항에 나선 거였다
20만 명의 철거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그게 소위 광주폭동이라는 거다
(민노당 김혜경대표의 증언에 의하면 한 여자가 해산을 했으나
너무나 배가 고파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자신의 아기를 삶았다고 한다)
[서민들이 삶]
1. 박정희시절은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세계에서 가장 길었다
1. 임금은 미국노동자의 1/12 정도에 불과했고, 산업재해는 세계 최고였다
1. 피고용인 가운데 1976년 74.9%, 1978년 76.7%가 근로소득 면세점 이하였다
(태반의 근로자가 최저생계비조차 못 버는 상황이었다)
1. 60년대 초반 학교에서 점심을 굶은 아동수는 50%를 넘었다
1. 1970년대 중반 서울인구의 1/3-1/5에 해당하는 100만-300만 명이 판자 촌에서 비참한 생활을 했다
1. 근로자들은 노조를 결성하거나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쫒겨 나든가 빨갱이로 몰리기도 했다
1. 서울 평화시장의 경우 17세 이하의 여성노동자 1만여 명이 하루 16시간 이상
1인당 1평도 안 되는 면적에서 최저임금의 1/5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며 혹사당했다
[박정희시대의 경제성장률]
⊙ 단순 숫치상으로 전두환이 1위, 박정희 2위, 노태우 3위, 김대중 4위
역대 집권자들의 연평균실질성장률(이하 연평균성장률)은 전두환 9.3%,
박정희 8.5%, 노태우 7.0%, 김대중 6.8% 순으로 단순 수치상으로는 박정희가 2위이다
⊙ 상대평가에서는 김대중 1위, 전두환 2위, 노태우 3위, 박정희 4위
박정희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3.3% 더 높았으나 대만보다 1.5% 낮았고,
전두환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5.7% 더 높았고 대만보다 0.8% 더 높고,
김대중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4.8% 더 높았고 대만보다 3.7% 더 높았다
*대만을 포함한 주요국(8국:미,카,영,독,프,이,일,대)의 연평균성장률을 비교하면
김대중 1위, 전두환 2위, 노태우 3위, 박정희 4위다 그리고 성장율은 대체로
선진국에 갈수록 작아진다는 것을 참조하면 김대중과 전두환의 경제는 박정희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김대중의 경우 한국전쟁이후 가장 큰 국란이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도 세계 최고수준의 성장을 이루었다
*김대중은 또한 경제성장에서 세계 최고수준이었을 뿐만 아니라,
단 5년만에 대한민국을 IT강국, 전자제품강국, 생명공학의 강국으로 올려 놓았고,
수출 최대 그리고 흑자, 경상수지 흑자, 외환보유고 세계 4위로 올렸고,
한국의 영화산업을 세계 2위 수준으로 끌어 올렸고, 한류의 꽃을 피웠다
*제주대 강기춘교수의 정권별 경제성적표 (김영삼정권 2년까지)
1위: 전두환노태우정권 각각 12점, 김영삼정권:10점, 박정희: 6점의 점수를 주었다
[박정희가 한국경제의 기반을 닦았다??]
이 말은 박정희란 슈퍼스타가 나와 하루아침에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말이고 (박정희숭배자들 이런 말을 많이 쓴다), 또 박정희 이후 대한민국의
경제가 승승장구하여 드디어 세계 약 300개국 중에서 11위에 등극 한 것도
다 박정희가 한국경제를 탄탄하게 다진 덕분이라는 말이다
이런 주장의 80%는 거짓이다
(다음의 경제학자 최용식의 글이다)
경제성장은 이미 1950년대(이승만시절) 후반부터 시동을 걸었다
성장률이 57년에 7.6%, 58년 5.5%, 59년 3.9% 등을 기록하여 본격적인 성장가도에 들어섰던 것이다
매년 50% 안팎으로 오르던 물가도 57년부터는 한 자리수로 안정되었다
이승만정권이 붕괴되던 60년에는 성장률이 1.2%에 그쳤지만, 4ㆍ19혁명으로
사회혼란이 극에 달했다고 군사정권이 선전했던 61년에는 다시 5.9%로 뛰어올랐다
또한 물가 역시 안정세를 유지했다
**박정희가 등장하여 하루아침에 세상이 하루아침에 달라진 것이 아니다
(60년대 초반 학교에서 점심을 굶은 아동수가 50%를 넘었다)
처음 5년간은 부정부패이외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고,
한국경제가 좋아진 것은 60년대 후반부터 일본과 베트남으로부터 돈이 들어오면서 좋아졌다
말기에는 또 완전히 망할 정도로 몰락해 가고 있었다**
초기 박정희 정권 5년간은 4대의혹사건 등 부정부패를 제외하고는 경제가 특별히 달라진 없었다
1960년~1964(?)년의 연평균 GNP성장률은 5.5%로 박정희초기에는 별로 달라 진 것이 없었다
이승만 시절인 50년대 후반보다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현재, 중국은 7.5-10%, 베트남도 7% 이상의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의 경제가 좋아진 것은 60년대 후반기에 한일협정으로 돈(무상 3억 달라, 차관 2억 달라)이 들어오고 베트남전쟁에 따른 특수로 10억 달라 이상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다른 대통령들은 외국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도 없어도, 그리고 월남특수가 없어도 박정희이상의 경제발전을 이루어 냈다 그래서 지금의 한국의 경제력이 세계 11위이다)
*베트남 전에서 한국군 5만 명이 이 5년간 받은 수당은 1억3,000만 달라였다
당시(60년대) 외화보유고는 3억 달라에도 미달 했으므로 한국외환 보유고의
거의 반에 해당하는 숫자였고, 또한 한국 총수출액의 40%에 해당하는 거였다
둘째, 박정희정권의 말기에는 경제는 거의 몰락상태에 있었다
그 이후의 정권들이 잘했기 때문에 박정희 경제의 후유증이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도 지금까지 승승장구를 했다고 해야 말이 맞다
(다음은 강준만의 <현대사 산책>에서)
박정희의 마지막 해인 1979년 GNP는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경상수지는 사상최악인 41억5천만 달러의 적자를 냈고,
기름재고는 7일분 밖에 남지 않았고,
소비자 물가상승도 18.3%나 뛰었고,
외환보유고도 바닥을 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전두환이 등장하고 일본에서 40억 달러를 빌려 수습을 합니다
MBC의 <5공화국>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박정희 때문에 한국경제가 발전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가 발전한 것이다" >
-경제학자 최용식, 《경제역적들아 들어라》의 저자
“가시적인 실적 위주의 박정희 개발독재야말로 시장 경제를 병들게 한 암세포였다
나아가 그것은 IMF 금융위기의 뿌리였다”
-고려대교수 이필상
**박정희시대는 물가상승, 집값 상승 등 정권에 불리한 내용은 언론에 내 보낼 수가 없었다
물가상승도 물가조정이라는 말로 표현해야 했다
박정희시절처럼 물가가 오르고 은행대출이자가 높으면 김대중 노무현은 몇 번이나 쫓겨났을 것이다
만주의 친왜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