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방은 안양, 본가는 수원. 대중교통 1시간 10분, 차로는 40분. 거리로든 실제 가는 길이든 먼 편은 아니다. 사람들 만날 때 가는 약속 장소보다 가깝고 가려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곳이였다. 매일 새벽마다 악몽을 꾸고 땀을 흘리며 숨에 차서 잠을 깨던 버릴 수 없지만 보고 싶지 않은 물건이라 내 손으로 정리하기도 아픈 물건들로만 어질러진 내 방을 정말 오랜만에 왔다. 아빠가 데리러 온 차를 타고 집에 와서 내 방을 거치지 않고 모든 짐을 거실에 둔 후 그 이후로도 거실이 아니면 있을 곳이 없었다. 가족들은 사실 잘 모른다. 그저 내가 게을러서 방을 어지럽혔다고 생각 할 것이다. 나는 방을 치울 수 없다. 아니, 쳐다도 볼 수 없다. 불을 끈 채로 앞으로도 계속 방 문을 열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다 괜찮아졌을 줄 알았다. 아무렇지 않게 그 좁은 동네를 걸어서 현관까지 올 수 있을 줄 알았고 어질러진 물건을 박스에 통째로 넣으며 애착이 깊던 예전 모습의 방으로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다. 내 방은 그대로 방치해 둔 채 나에게 내어 준 아빠 방을 이제 돌려드릴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 방에 들어가서 전화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예전과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고 아무 생각 없이 티비를 보며 쉴새 없이 엄마에게 내가 요즘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 하다가 다들 잘 시간이 되어 티비를 끄고 내 방으로 들어왔을 땐 1년 8개월 전부터의 기억들이 나를 괴롭혔다. 의자에서 침대로, 침대에서 의자로 번갈아 앉으며 나흘간 쉬지 않고 울던 기억, 엄마에게 털어놓지도 못 할거면서 옆에 있어달라고 했던 기억, 정말 많이 울면서 아물지도 않은 상처를 또 다시 판 기억, 그리고 엄마가 울면서 뜯어 말리던 기억, 불을 다 끄고 스탠드 불 하나만 킨 채로 자는 척 하며 밤 새 울었던 한달 간 반복 되던 날들의 기억이 내 방 안에서 겹쳐 보였다. 그 후엔 뜯지 않은 과자 박스들, 말려놓은 꽃들, 물을 주지 않아 시든 꽃, 녹슨 기타줄, 여기저기 던져놓은 인형들, 모아놓은 라무네 구슬들, 포장박스들이 한꺼번에 날 울렸다. 그렇게 방 문을 닫고 혼자 계속 울었다. 왜인지 모르게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다 놓고 내가 나를 괴롭히기만 하며 살고 싶어졌다. 그리고 무슨 일이냐고 묻는 말에 대답해주기가 귀찮아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내가 뭘 하는지 모르게 혼자 좁은 곳에 갇혀 아무와도 닿지 않으며 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날 기억하고 난 그들을 걱정시키며 오랫동안 편히 쉬고 싶었다. 내 방이였지만 여긴 다시는 열리지 않는 방에 갇힌 것 같았다. 숨이 차서 과호흡이 올 만큼 괴로웠고, 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는데 아무것도 잡을 수 없었다. 손이 닿는 곳이 없었고 나 혼자였다. 소리도 지를 수 없었다. 무릎을 세워 앉아서 일그러진 젖은 얼굴을 무릎에 박은 채로 입고 있던 후드집업의 소매를 꽉 물었다. 나는 다 버릴 수 있을 줄 알았다.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준 물건이였다. 누가 줬든, 어떤 물건이든 추억들과 상관없이 방 안에 있던 모든 물건들이 버려야 하는 물건들이었고 나는 그것들을 쳐다볼 수 조차 없다. 개인적인 정신질환 때문에 아무것도 버릴 수 없다. 본가에 오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였다. 답답한 마음에 어제도 오늘도 새벽에 산책을 나갔고 아파트 단지 안을 반복해서 돌았다. 오늘따라 전화할 사람도 없었다. 내가 좋아하던 아파트 옆 조그마한 예쁜 길을 결국 오늘은 눈을 감고 걸었다. 15단지 쪽으로 내려가는 산책로를 통과해서 가는 길은 다시는 혼자 올 수 없다. 편의점에 들르려고 보니 세 군데 중 두 곳이 닫았고 나머지 한 곳을 가기 위해 또 다른 슬픈길로 갔다. 그 때 때마침 문자 한 통이 다시 날 죽였다. 결국 집에 가는 그 예쁘고 좁은 길은 또 다시 눈을 감고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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