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이에게 노래 하세요.
후회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좋아한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까지는 꼬박 3년이 걸렸다.
“첫 눈 오는 날, 고백해. 알겠지? 꼭 고백 해.”
성보라. 그 이름 석자가 마음을 짓누른다. 1988년 11월 겨울은 그 어느 때 보다 더 추웠다.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이 하얗게 얼어 갈 즈음 너의 종종 걸음이 나를 녹였다. 멀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온기는 무척이나 뜨거웠고 강렬했다. 딱딱해진 내 손가락이 부드럽게 풀리며 네 머리칼을 만지려 했으니. 제법 쌓인 눈을 밟는 소리가 좋다. 내 마음에 그렇게 다가온 것 같다.
"누나!"
"어, 선우. 여기서 뭐 해? 얼어 죽겠다."
"그냥… 누나 기다렸어요."
"나? 왜. 무슨 할 말 있어?"
“첫 눈 오는 날, 고백해.”
"좋아해요. 누나."
"……."
"누나 좋아한다구요."
1988년의 겨울이 저물어 간다.
「첫 눈 오는 날. 15년 전, 그 골목에서 기다릴게요. 선우」
화려한 결혼식이 끝나고 오랜만에 모인 다섯 명의 아이들은 변함이 없었다. 정환과 결혼을 한 덕선은 여전히 왈가닥이었고, 그런 덕선을 타이르면서도 챙기는 건 정환이었다. 둘은 예쁜 딸과 잘생긴 아들을 낳았다. 딸은 정환을 닮아 무심하지만 정이 많다. 아들은 덕선을 닮아 따뜻하고 장난기가 넘친다. 정환과 덕선이 아이들 손을 쥐고 걸어오는 모습을 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느낄 수 있었다. 동룡도 대학 동창과 결혼을 해서 쌍둥이 아들을 키운다. 둘 다 동룡을 닮았다. 정환의 아이들과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게 제법 옛날의 동룡 같다. 택은…
"와줘서 고마워. 오랜만이다."
늦게 결혼을 했다.
"야, 택아! 진짜 이게 얼마만에 보는 거야? 요즘 네 제자 티비에 자주 나오더라."
"저 자식 많이 컸지. 옛날 생각 하면, 어후. 그냥 등신이었는데."
잔이 채워질 수록 우리는 점점 세월을 거슬러 간다. 저 자식 대학생때 얼마나 웃겼는데. 야. 성덕선 고딩때 피켓걸 한 건 기억 안 나냐. 새벽에 한복 입고. 맞다. 야! 그때 나 솔직히 예뻤지? 어? 정환아. 예뻤냐? 몰라. 나 지금 술 취해서 기억이 안 나는 거 같은데. 씨이. 김정팔, 너!
"선우야. 너는 결혼 안 해? 평생 혼자 살 거야?"
"나? 나야 뭐…."
"아빠, 아빠. 눈 내려. 첫 눈이야. 첫 눈."
정환의 무릎 위로 기어 올라온 덕선의 딸이 창문을 가리키며 종알거린다. 정환은 그런 딸을 귀여워하며 그렇네, 하고는 커튼을 걷었다. 정말 눈이다. 하얀 눈.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술을 들이켰다. 한 잔, 두 잔, 점점 늘어 혼자 두어 병을 마셨다. 그때 문득 무언가 생각이 스쳤다. 나는 그대로 겉옷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얘들아. 나 일이 생긴 거 같으니까 나중에 연락할게. 택아, 결혼 축하하고. 진주야. 오빠가 전화할게."
어디가! 야! 서른 세 살의 아이들과 열여덟 살의 아이들 목소리가 섞여 들린다. 그리고 그 사이로
"선우."
보라의 목소리가 들린다.
쌍문동. 그 좁다란 골목 끝에는 15년 전의 내가 눈을 맞으며 서있다. 그 앞에는 너무도 작은 보라가 있다. 땅은 금방 눈을 머금었다. 축축해진 머리칼을 털고 택시에서 내렸다. 무겁고 질긴 발걸음을 끌고 열여덟의 선우에게로 걸어 간다.
"……."
"만나자고 한 사람이 누군데…."
누군가의 혼잣말이 들린다. 속삭임같이 조용하지만 날카롭다. 내 손 끝이 저리고 온 몸이 떨린다.
"성보라. 보라 누나."
보라의 끔뻑거리는 눈망울이 천천히 나를 향한다. 그 맑음은 붉게 변해 눈물을 터뜨린다. 울지 마. 울지 마요.
"너나 울지 마."
"저 안 울어요, 누나."
"아…. 15년, 참 길고도 짧다."
너에겐 긴 시간이 나에겐 너무나도 긴 시간이었다.
"누나."
보라야.
"결혼, 축하해요."
나는 너를
"늦었지만 축하해요."
여전히, 아직도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이제서야 누나를 볼 수 있어요."
좋아해.
"좋은 사람 만나서 다행이에요. 정말로…."
사랑해.
"앞으로도 늘 사랑 받으면서 사세요."
보라야.
"전 늘 여기 있을게요."
나는 이제서야 너를 보내줄 수 있다.
이루어 질 수 없다고 시작 조차 할 수 없으랴.
내 첫사랑은 비록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지만 그 온기는 남아 있다.
영원히 그 온기에 기대어 그리워하는 것이 전부겠지만,
그것 마저도 나에겐 행운이고 행복이다.
내 모든 걸 바쳐 사랑을 할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맙다.
너를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맙다.
내가 너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맙다.
같은 햇빛을 받고, 같은 달빛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어서 고맙다.
안녕, 첫사랑.
1988년으로 부터 15년 후니까 2003년 정도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