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벚꽃이 피었다.
짐작하지 못한 순간, 조금 이르게.
해서, 옅은 바람에도 이맘 흩날릴까
볕이 진 어둠속 가로등 아래에 서 보았다.
눈부신 너를 오롯이 보고 싶어.
있잖아 그런데
참 이상하지.
밤을 등지고 희게 번진 것이
더 크게 보인다.
깊이 들이쉬며 도로 뱉는 숨, 서서히 나를 짓누르는 시선이
밤의 빛 한줄기만큼 내게 닿던 찰나, 잠결에 묻어둔 의식이 실눈을 떠내었다.
"너는 나고,"
"..."
"나는 너야."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가 있다.
아무리 퉁명스럽고 모질게 굴어도, 이렇게나 따뜻한 등을 내어주는 너처럼.
우리가 함께 지내온 십삼 년의 날들이, 드러내지 않아도 소중한 것처럼.
"그러니까, 나한테서 떨어지지 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나처럼.
이 까마득한 길 위에서 너는, 불안하던 내 마음에 보이지 않는 등을 비추었다.

"…밤이 왜 어두운 줄 알아?"
"아무리 좁은 곳도, 빛 한 점 없이 까만 어둠으로 가득 차면 끝없이 넓어져."
"아주 작고, 낡고, 볼품없는 것도-
어둠만 있다면 우주 한 가운데서 팔다리를 휘젓는 것처럼 자유로워지는 거야. …그래서,"
"그래서 난 밤이 좋아. 이렇게 더럽고 추한 내 마음도 보이지 않잖아. 근데 혜야…."
"이제 더 이상 숨기지 않을 거야."

"…내가 고스란히 너에게 갈게."

네가 두고 간 말들이 내 숨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왠지 너의 감정이 느껴질 것만 같아서-
더 모질게 굴지 못하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이런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너의 외로움을 방관하는 것뿐이었다.

이 공간보다 아득한 어둠이 우리의 사이에 박혀버려서,
영원히 빛이 보이지 않을까 두려웠다.

날씨가 너무 맑았으니까.
뜨거운 볕처럼 눈부신 초록이 거리를 채우고 내가 그 아래를 걷고 있으니까.
이 온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마냥 좋은 거잖아.
눈을 감는다고 해서 내리쬐는 햇살을 막을 순 없는 거야.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진회색의 구름이 서로 앞 다투어 천공을 물들였기 때문에 이제는 작은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저 닫힌 하늘처럼 너도 그랬으면 좋으련만,

나무가 줄을 지어 숲을 이루고, 공기가 모여 바람이 되듯 너의 모든 것이 나를 만들었어.

시간이 흘러도 너에게 빼앗긴 내 숨은 돌아오지 않았어.
그 덕에 난 너의 곁이 아니면 몹시 불안했고 호흡이 막힐 듯 버티기 힘들었어.
너는 마치 공기처럼 내 숨통을 쥐어 한 시도 떨어질 수 없게 했으니
결국 이것은 무언의 질서가 되어버린 거야.

네가 곁에 있어도 늘 그리워. 오늘은 더욱 그래.
온종일 네 눈을 맞추고 양 손을 꼭 쥐어 내 품에 안고 싶은데
나란히 학교를 오가고 같은 방을 쓰면서도 그러질 못하는 게 싫어.
이 세상을 통틀어 내 마음보다 하찮은 건 없을 거야.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너도 나를 원한다면...
수천, 수만 번을 상상하다가도
그게 아닐 상황 한 번에 모든 게 무너지곤 해.

혜야, 혜야. 나를 봐줘.
너만 향한 내 눈동자를 봐줘.
이 동공에 가득찬 너를 알아봐줘.
부디 나를 사랑해줘…….

"너는 독이 아니야."
"만약, …네가 독이래도."
"난 마실 거야. 그래야 살아."
"그래야… 죽어도 사는 거야. 알겠지?"

종아리쯤 오는 얕은 못인 줄 알고 들어서니
제 속을 모두 채우고도 남을 깊은 수심이었을 때,
어리석은 자는 곧 깨닫는다. 너무 맑아 깊이를 헤아릴 수 없던 것을.
이미 늦어버려 결코 헤어 나올 수 없음을.
그리고 곧 물살에 녹아내려 한줌 물방울이 될 것을.
시선의 끈 _ 깨미
http://new.toto-romance.com/ebooks/e_view.asp?page=1&idx=62880

인스티즈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