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출 예약
호출 내역
추천 내역
신고
1주일 보지 않기
카카오톡 공유
주소 복사
공지가 닫혀있습니다 l 열기
방탄 진에 대한 내용 검색 결과
혀기혀기얌ll조회 4240l 8
이 글은 12년 전 (2012/1/14) 게시물이에요
일본군

Contents
1 이상과 현실1.1 일본이 꿈꾼 일본군1.2 현실의 일본군1.2.1 자위대2 역사2.1 화려한 시작2.2 막장의 시작2.3 군부의 폭주3 실상3.1 일본의 전투교리와 훈련3.2 적이 바보라는 전제하에 세워 작전계획만 화려하다3.3 적이 지는 걸 전제로 하는 훈련3.4 정신승리의 말로3.5 대체 왜?4 구타5 번외편: 보급5.1 멀쩡해보이는 외양5.2 처참한 실상6 번외편: 본토 결전용 병기7 그밖에 가지가지7.1 항복하는 자가 없다?7.2 물주와의 대결7.3 불탄 자리에서 못줍기7.4 시끄러운 기습(?)인 반자이 어택7.5 무기체제의 막장7.5.1 허약한 자, 제로센7.5.2 구멍이 숭숭 뚫리는 전차7.5.3 손대면 폭발하는 권총7.5.4 대전차? 그게 뭐지?7.6 알고보면 해군도 덤 앤 더머7.7 일본 내부의 국가인 육군과 해군7.8 우가키 군축의 허상7.9 일본군 잔당들7.10 기타8 관련항목8.1 일본군 주요 인물들8.1.1 '정치에는 상관없는' 순수한 군인타입8.1.2 애매모호한 타입8.1.3 군국주의자 타입8.1.4 인간 쓰레기8.1.5 대한민국 건국 유공자 수준8.1.6 기타8.2 일본군 관련 각종 학설9 일본군의 무기체계9.1 육군9.1.1 보병9.1.2 기갑, 차량9.2 해군9.2.1 함선9.3 항공병기9.4 일본군 관련 링크
1 이상과 현실 
1.1 일본이 꿈꾼 일본군 
엔하위키에서 일본군을 키워드로 검색해 봤더니... | 인스티즈

大日本帝国の 無敵 皇軍の 威厳!(笑)
대일본제국의 무적 황군의 위엄! 이란 소린데... 아꿈 포스터 속에서도 루저인 일본군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왠지 거슬리는 위 그림은 육군성의 의뢰를 받아 미야모토 산로가 만든 포스터. 근데 표정이 해맑으니 귀엽긴 하다. 구호인 때려부수자는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국민적 구호로 사용되었다.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 2번째 미션에서 일본군 기지를 잘 뒤지다 보면 벽에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해당 미션에서는 화염 방사기가 나오므로 소각해주는 센스를 발휘하자(시원치는 않지만 탄다).

그러나 현실은...
1.2 현실의 일본군 
엔하위키에서 일본군을 키워드로 검색해 봤더니... | 인스티즈

모두 도망쳐! 강력한 中전차가 온다!!

이게 현실이었다. 참고로 유럽에서 스튜어트 전차의 별명은 Door Knocker. 그런데 당시 일본군 대전차포는 경전차도 잡기 버거웠다.

"장군님. 저는 이러한 전투 방식은 일찍이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일본군은 포로가 되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수류탄으로 자폭하거나, 스스로 자결을 기도합니다. 
- 미국 해병대 제1사단, 밴더크리프트 소장


"일본군한테 중화기란 단지 장식품일 뿐이다. 그들은 정신력의 일본 문명이 서구 문명보다 우월하다고 믿는다. 이것이 소위 '야마토 정신'의 정체이며, 우리 나라에 대한 경멸감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번 전쟁으로 그들도 무엇인가를 깨닫겠지만, 그러기까지 치러야할 댓가가 너무나 클 것이 두렵다. 
- 미 해군, 과달카날 전투보고서.


근대 일본의 잘못된 메이지 유신 정책의 결과물

중일전쟁태평양 전쟁, 독립군과의 전쟁 등등 전쟁중 한 짓거리들을 보자면, 그야말로 만악의 근원천하의 개쌍놈들.
1.2.1 자위대 
1945년 8월 15일 패망하여 완전히 해산되기 이전까지의 일본 제국의 군대를 흔히 (구)일본군이라고 한다. 당시의 정식 명칭은 대일본제국육군/해군이다. 현재는 군이 완전히 해산되고 대신 자위대가 일본의 방위를 담당하고 있다.

일단 일본인의 말대로만 본다면 자위대의 경우 현대 군 원칙의 기본이 되는 문민통제에 입각하여 방위대신은 철저히 문관 출신으로 선출된다. 또한 자위대로 편성된 이후에는 제국시대때의 반성과 군의 정치적 중립성에 입각하여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미시마 유키오의 궐기 요구에 조롱으로 답할 정도였다. 그리고 황군때의 고질적 악습이던 구타를 완전히 청산한 걸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자위대는 일본군의 잔재는 일본인의 기준에서만 볼 때 그럭저럭 청산을 잘 했다고 자평하지만 동아시아의 각국 입장에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했던 욱일기를 자위대 창단 초기부터 사용하고 있는 상황인데 청산 운운하는 것도 우스운 상황. 육자대는 그나마 2차 세계대전 당시와 조금은 다른걸 쓰지만 해자대는 그런거 없이 예전껄 그대로 쓰고 있다. 독일이 전후 하켄크로이츠를 법으로 금지시킨 것과 비교된다. 게다가 일본군의 최대급 병크인 삽질 실력은 그대로 유지 중. 평화헌법이 딴지를 거는 것도 한몫하긴 하지만 애초에 평화헌법이란 것이 일본군 같은 개뻘짓을 못하도록 만든 것이니 그냥 뿌리부터 잘못되었다고 보는 편이 적당하다.
2 역사 
2.1 화려한 시작 
메이지 유신으로 에도 막부가 쓰러지자 유신세력측은 서구식 국군을 창설하기 위한 준비를 개시한다. 덴노의 동경 행차를 호위하기 위해 각 번에서 차출했던 어친병(御親兵)을 상설군대화하여 덴노직속의 무력으로 편성한 후 폐번치현을 단행하여 각 번이 독자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상비군을 해체하고 무기들을 몰수한다. 뒤이어 프랑스식 사단편제를 도입한 진대병을 창설하면서 어친병을 해체, 근위사단으로 재편성한다. 이렇게 등장한 근대적 군대를 국군(國軍)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이 일본군의 시작이다. 황군 운운은 1930년대부터 파시즘이 강화되기 시작하면서 대중화된 명칭이고 원래는 국군이라고 불렀다. 지방 번들의 사병들과 대비되는 뜻으로 불렀다.

메이지 6년(1973)년에는 결국 무사들에게 주어지던 녹봉을 중지하는 질록처분을 강제로 시행하고, 병력 자원을 평민에게서 소집하겠다는 의미의 징병제를 실시한다. 이러한 조치에 구 무사층은 크게 반발하기 시작했고, 사족반란이 빈발한다. 정한론을 둘러싼 정치적 다툼에서 밀려나 사쓰마로 낙향한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사학교당(私學敎黨)은 최대 3만여명의 병력으로 서남전쟁을 일으키지만 패배한다. 이 숫자는 당시 일본군 총병력과 맞먹는 숫자였다.

초창기에는 프랑스군에서 고문단을 파견받아 프랑스식 군사 제도를 도입했으나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비롯한 독일 유학파들이 귀국하면서 프랑스식을 일신하고 독일식으로 군대를 바꾸게 된다.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위용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청일전쟁이었다. 이미 과의 일전을 대비하고 엄청난 양의 예산을 쏟아부은 일본 정부는 지지부진한 개혁과 지리멸렬한 전술로 무장한 청군에 압승을 거두고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다.

그리고 뒤이은 러일전쟁에서 세계의 예상을 깨고 압도적인 규모의 러시아군을 물리쳤고, 쓰시마 해전에서는 T자 진형을 이용한 화력집중방식,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T자의 ─선에 아군 함대를, │선에 적 함대를 위치시키는 기동. 군함의 화력이 집중되는 방향은 측면이므로 이런 식의 기동으로 아군은 적 함대 선두에 전함대 화력을 집중시킬 수 있고, 적함은 선도함 한 척의 그나마도 절반의 화력만이 유효하게 된다. 전열함시대부터 이어져 온 전통적인 필살 전술이지만, 각 함간 통신이 자유롭지 못하고 유효사거리가 짧았던 근대에는 완벽하게 성사시키기 어려운 전술을 성공시켰다. 이로 인해 해전 사상 매우 보기 드문 성공사례를 기록하면서 러시아 발트 함대를 고기밥으로 만들며 전세계의 찬사를 받았다.

이 쓰시마 해전은 사거리의 중요성이 처음으로 드러난 해전이었으며, 이때의 전훈을 받아들인 결과가 자잘한 중소구경의 무장을 생략하고 대구경 주포에 올인한 드레드노트로 대표되는 전함이다.

이러한 일본군의 상승세는 제1차 세계대전까지 지속되어 당대 일본군은 세계 그 어느 군대와 비교해도 결코 꿀리지 않는 근대적인 군대였다.

세계 각국은 일본군의 높은 사기와 신사적인 태도, 절도있는 자세를 높이 평가했고, 러일전쟁 중 조선인들은 청군, 러시아군과 달리 민간에 피해를 주지 않고 꼬박꼬박 대가를 지불하며 식량을 사고, 노역을 부리는 일본군에게 매우 협조적이었다.

하지만 승기가 굳어진 러일전쟁 말기부터 강제적인 식량 공출과 무임금 노역 강제동원 등이 대폭 증가하였다. 일본군은 신사적이었지만 점령군은 신사적이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막장의 냄새가 슬슬….
2.2 막장의 시작 
하지만 세계 각국은 정작 203고지와 같이 근성론과 경직되고 융통성 없는 사고방식에 찌든 일본군의 실상에는 주목하지 못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청일전쟁, 아니 1873년의 대만원정에서부터 나타난다. 대만원정 때는 정부의 방침을 무시하고 육군사령관이 독단으로 파병하고, 청일전쟁중 평양전투 때에는 이틀치 소총탄약만 남은 상황인데도 추가보급을 기다리지 않고 닥치고(…) 총검돌격을 해댔다. 문제는, 그렇게 멍청하고 위험한 짓을 했는데도 이겼다는 거다.

게다가 일본군은 연승에도 불구하고 청일전쟁에선 삼국간섭에 의해 요동 땅을 모조리 토해내야 했고, 러일전쟁에선 승리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전비 소모와 희생자를 내면서 경제위기를 불러왔다.

이는 총력전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전쟁한번에 국가가 휘청일 정도로 국력이 낮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러시아 견제를 위한 영국과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청은 몰라도 러시아와 싸우는건 무리였다. 적나라하게 이야기하면 러일전쟁은 영/미 양국이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서 일본을 용병으로 고용해서 싸우게 한것이다. 일본의 전시국채를 영/미 양국이 인수해주는 덕분에 1년예산을 넘어서는 엄청난 전비를 조달했고, 그외에도 온갖 종류의 경제적/외교적 지원이 있었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무작정 일본이 이겼다고 보기는 힘든데, 실제로 종전 당시 러시아는 육군이든 해군이든 추가적인 병력충원이 가능했던 반면 일본은 겉으로는 크게 이겼지만 그 동안의 피해로 전력이 극도로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종전협상 당시 러시아 측은 피의 일요일로 더이상 전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강경한 태도로 나왔으며, 일본 정부는 이겼다고 생각해서 전쟁배상금을 요구했으나 일본군의 상태를 알고는 서둘러 전쟁배상금을 포기하고 종전을 선언했다. 당시 동맹국이던 영국과 미국에서 추가적인 전시채권의 구입을 거부한 탓에 만약 2달만 더 전쟁이 유지되었으면 일본은 국가파산할 위기에 처해있었다. 한마디로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닌 꼴이었다. 이런 경제적 손해를 만회하기 위하여 유일한 전리품인 식민지 조선을 가혹하게 수탈하였다. 군인총독을 내세운 강압적 지배의 이면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당시 다른 나라들이 전쟁보상금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유럽에서는 독일의 베르사유 조약 파기선언 당시 주변국에서 과도한 전쟁배상금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반응을 할 정도로 과도한 전쟁보상금은 또 다른 전쟁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해서 국가가 망할 정도로 과도하게 하지는 않았다. 베르사유 조약 당시에도 연합국 측에서 과도한 전쟁배상금 때문에 독일이 반발할 것을 우려해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전쟁중 미국의 금융업자들에게 진 부채가 워낙 엄청난지라... 이렇듯 어쩔 수 없는 경우를 빼고는 전쟁보상금이 과하지 않았다. 이래서 오히려 '전쟁 배상금이 전쟁 목적인게 아니냐'고 비꼬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군의 전쟁목적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주창한 주권선과 이익선 개념에 따른 것이다. 주권선은 절대로 침해당해서는 안되는 주권영역, 즉 국경과 같은 개념이고, 이익선은 일본국의 이익을 위해 경제군사적 동맹 또는 우방으로써 일본의 이익을 위해 유지되어야 하는 권역이다. 청일전쟁 이전의 일본은 제2의 아시아 제국주의 국가로 발전할 여지가 큰 청나라에 대항해 주권선으로 일본 본토를, 이익선으로 한반도를 설정하였다. 이것을 위해 조선이 서구형 주권국가로 나서도록 강요했고, 청나라는 이에 대항해 구시대의 조공책봉체제 하에서 조선이 속국으로 존재하도록 일본과 암투를 벌였다. 이 대항이 청일전쟁으로 발전한 것이며, 러일전쟁 또한 이 개념의 연장선상에 있다. 따라서 전쟁 배상금을 노리고 전쟁을 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러일전쟁의 승리 이후 주권선은 한반도와 대만을 포괄하고, 이익선은 만주 및 중국으로 확장되었다. 주권선의 수호는 이익선의 유지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익선의 유지를 위해서는 주변 강국을 외교 및 전쟁으로 굴복시켜, 이익선의 침해를 막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만주에는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워 통치했고, 미국의 압력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결국 1945년까지의 일본의 지속적인 전쟁행동은 주권선과 이익선이라는 개념의 유지 및 확장에 의한 것이다.

이 점에서 일본제국주의가 유럽제국주의와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이 설명된다. 유럽제국주의는 자국방위의 이유로 식민지를 건설한 것이 아니라, 급속히 성장한 자본가들의 판매처 및 수탈처로써 식민지를 구축한 것이지만, 근대 일본국은 처음부터 유럽열강에 의한 식민지화의 공포를 안고 출발한 나라였다. 그렇기에 국가방위를 위한 세력권 확장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이 주권선과 이익선이라는 개념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의 비용만 들여 수탈하는 것이 목적이고 자국의 본토로 편입할 생각 자체가 없던 유럽 열강과는 달리 일본화 교육을 시키고 내선일체를 내세우는 등 조선을 일본으로 만들겠다는 식의 정책들이 존재했다.

다만, 이론과 현실은 다르듯, 일본이 주장하는 이론을 따른다고 해도 청국과 러시아 등의 (일본 입장에서)외세로부터 주권선과 이익선의 개념에 의거하여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군비를 증강시키는 수밖에 없었고 이로인해 군이 비대해져 군이 정부를 위협할 수준이 되고 이는 일본 군국주의의 효시가 된다. 한마디로 말해 말빨만 그럴싸한 침락이론이라는 것이다.

당장 실제 역사상에서도 이를 뒷받침할수 있는 경제력이 따라주지 않자, 결국 이익선과 주권선을 확장하기 위해서 만주국을 세우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사실 후술하겠지만 일본내의 파벌과 얽힌 일로 벌어진 측면도 있다. 그리고 군 내부에서는 소위 정신력이나, 근성론을 강조하는 등의 병크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2.3 군부의 폭주 
게다가 당시 일본은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대공황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나라중 하나였으므로 일본 정계가 민심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하자 일본 군부는 수없이 정치테러를 벌였다. 이는 정치인 뿐만 아니라 군인도 예외는 아니라서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도 테러로 인한 암살 우려 때문에 그를 아낀 상부에서 연합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바다로 피신시켰을 정도.

이것도 모자라 쿠데타를 기도하는 등 정권 장악의도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결국 2.26 사건이 발생했다. 해당 사건은 1936년 2월 26일 22명의 천황 추종자 황도파의 전 현직 청년장교들이 1,400여명의 사병을 이끌고 "국가의 전면적 개조와 군사정부 수립"를 요구하며 일으킨 쿠데타. 내각을 습격해 다카하시 대장상과 사이토 내무대신, 와타나베 교육총감 등을 살해하고 총리관저와 국회 의사당, 육군성을 포위했으나 사흘 후 진압돼 미수에 그쳤다. 결국 황도파는 박살나고, 내각 총리를 지지하는 통제파가 군부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여하튼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군은 정권장악에 성공한다. 그리고선 그 때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경제사정을 '식민지를 늘려 수탈하자!'라는 방침으로 해결하려 한다. 처음에는 중국 침공으로 해결해보려 했으나, 미국이 철, 석유 등의 금수조치를 주요 골자로 하는 제재를 가하자 당시 이들 품목 소모량의 80~90%를 미국 수입에 의존하던 일본은 궁지에 몰렸다.

이걸 타파한답시고 '미국을 공격한다'는 결정을 내리는가 하면, 필리핀과 동남아시아로 쳐들어가면서 진주만 기습 당시에는 기습 직후에 선전포고를 했다. 사실 그래도 아주 정신 나간건 아니라서 기습 전에 선전포고를 하려고 했는데, 미국 주재 일본 대사관에서 선전 포고 암호문 해독이 늦어서 이미 공격을 해 버린 뒤에나 전달해 버렸다. 이것은 이것대로 어이없다만.

당시 늦게나마 선전포고 문서를 받은 미국의 국무장관 코델 헐(Cordell Hull)은 이렇게 말했다고한다.

"나는 지난 50년간 공직에 있으면서 이토록 파렴치한, 거짓과 기만으로 점철된 문서를 본 적이 없었다. 그 정도가 너무나도 거대해서……, 오늘날까지 지구상의 어느 정부가 이렇게 날조된 문서를 작성할 수 있었는지 상상할 수 없다."

선제전쟁 =시작과 종말, 그리고 제한된 보상= Flynn, Matthew J저


라고 말했을 정도다.

하지만 영국한테는 아예 선전포고도 안했다.(…). 막 나가는 걸로 유명한 윈스턴 처칠마저 일본 대사를 불러서 "국제 관례는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 안 지키면 나중에 후회할걸."이라고 경고했을 정도다.

일본은 이를 두고서서양열강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려면 일본을 중심으로 대동아 공영권을 결성해야 한다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개소리일본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자행한 온갖 수탈과 횡포를 보면 알 수 있다. 애시당초 일본군한테 있어서 식민지는 '전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며, 자국민 이외의 모든 타국 국민들을 멸시했다. (대만을 빼면) 일본군의 만행은 이들의 점령지에서 흔하디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아시아 각국이 일본한테 괜히 이를 가는 게 아니다.

도조 히데키가 수상이 될 때 쯤에는 일본은 완벽한 군국주의 국가가 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일본이 군국주의 국가의 길을 걷게 된 원인은 주권선과 이익선을 유지하기 위해 비정상적으로 군사력을 증대하였기 때문이다. 즉, 힘들게 일해서 돈 버느니 주변에 약해보이는 놈 좀 패서 식민지로 삼으면 된다는 생각, 즉 이익선의 확장을 중시하게 되었고, 이렇게 주변국을 뜯어먹으려고 경제 규모에 걸맞지 않은 군대를 키웠고, 그렇게 군을 키워 놓으니 국민들도 " 이제 이정도로 키워 줬으니 어디가서 한 놈 족치고 식민지 만들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기대심리를 갖게 되어 버린 것이다.

덕분에 점차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마비시키며 상부의 명령에 이의를 걸지 못하도록 우민화 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일본군의 전설적인 구타가혹행위들이 이때쯤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악습들은 한국을 식민통치할 때도 적용되어 광복 뒤에도 대한민국 국군 참모총장이 특별명령으로 가혹행위 근절을 지시할 정도로 흔적이 남아있다. 대표적인 것이 다름아닌 똥군기정말로 고맙다 개들아
3 실상 
제2차 세계대전 즈음에는 그 실상을 보면 사실상 열악하기 짝이 없는 상태였으나, 상대방의 상황이 너무 안 좋은탓에 승승장구 했다. 당시 영국의 경우 나치독일과 영국 본토 항공전을 치르는 탓에 외부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으며, 미국도 본격적인 전쟁은 아직 생각도 안하고 있었다. 그외의 네덜란드의 경우 아예 본국이 나치에 점령당한 상태라는 등 주변이 매우 무력한 탓에 잠깐 무적의 군대처럼 보였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문제가 한참 많다.

중국군의 경우, 지역에 따라 군벌로 나뉘어진 막장 상태여서 자기들끼리 싸우는(!) 경우가 더 많을 지경이어서 그야말로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을만큼 막장 상황이었기 때문에 초창기에는 일본군이 대승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장제스 직속정예부대는 독일식 훈련과 장비를 보유했으므로 상하이 전투나 우쑹 등에서 중앙군은 일본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물론 이는 콘크리트 벙커 및 토치카와 참호선으로 탄탄하게 구축한 독일식 방어선의 정면(…)으로 닥돌한 일본군의 전투사상 덕이었지만. 결론은 좋았던 시절에도 상당한 피해를 보기 시작했다는 것.

게다가 광활한 중국 본토에서 민중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는 일본군은 아무리 많은 병력을 투입해봐야 연안지대의 점과 선 즉 상하이, 천진같은 대도시와 각 도시 사이를 연결하는 철로 주변만 점령할 수 있었다. 후방의 드넒은 농촌지대에선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게릴라전으로 이들을 괴롭혔고, 장제스의 국민당은 깊숙한 내륙지대에서 버티고 있었다. 국민당/공산당/군벌을 섬멸해서 전쟁을 끝내기엔 중국땅이 너무 큰 관계로 병력부족과 병참선의 압박이 심하고, 그렇다고 철수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쏟아부은 막장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

게다가 중국군에게 계속 이겨봤자 별 소용없는 것이 미군과 영국군이 점차 전투력을 회복하고 보강하여 달려들자 전사자 교환 비율은 심하면 1:10, 1:20, 후반기 맥아더의 필리핀 탈환전에서는 1:40에 육박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이 공격측의 병력이 조금이라도 우세해서 발생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무기의 질은 다르겠지만 미군 40만명 vs 일본군 40만명의 1:1 매치에서 일본군은 미군에서 전사자 1만여명을 안겨주고 39만여명이 전사하며 학살당하는 신세로 전락, 적군은 죽여보지도 못하고 그야말로 시체의 산을 쌓게 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적에 대한 자살적이고 즉흥적인 돌격이 감행되어 일방적으로 사살당하기도 했으며 이를 일명 반자이 어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본군이 '반자이!'를 외치며 총칼을 앞세워 돌진할 때의 무서움과, 몇 달을 굶고 폭격에 시달려 해골만 삐적한 상태로 비실비실 돌격하다 이쪽의 우월한 화력에 전멸하는 실상을 비꼬는 말이다.

또한 초반에 뜨거운 맛을 본 미군 사이에서는 일본군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슈퍼맨, 정글의 스페셜리스트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수기나 포로들의 고백을 통해서 이 놈들도 인간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물론 미군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는 별도로 일본군의 저항이 극심했기 때문에 가면 갈수록 미군이 엄청난 화력을 쏟아붓게 만들어 일본군의 피해를 늘리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설령 일본군이 근접전에 들어갈 수 있더라도 일본군이 총검이나 군도를 사용하는 반면 상대인 미군은 수류탄기관단총으로 응수해서 화력 자체가 현저하게 밀린데다가, 반자이 어택에 대한 우려로 더욱 확실하게 쓸어버렸다. 더 기가막힌 것은 미국, 영국 놈들은 겁쟁이. 작전 계획을 바꾸려는 놈들은 참모 감이 못 됨. 닥치고 착검돌격.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나라다. 근성으로 어떻게든 된다. ... 이것이 정식 작전교리였다. 결국, 일본군의 편제나 전투교리를 따진다면 훌륭한 1차대전 군대에 가깝다. 2차 대전을 하던 시절에 1차 대전 혹은 그 이전 제국시대 방식의 전투를 했던 것이다. 철조망과 기관총 진지에 닥돌해서 하루 3키로 전진에 몇만씩 죽어나가던 그 시절.

이렇게 계속된 전쟁과 덜 떨어진 짓에 군인의 소모가 심해지자 1940년에 징병법을 제정해서 군대가 매년 90만명의 남성을 징병할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문제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일본에 없어서 식민지에서 마구 징집하는데, 이 때 일본의 징병 가능 나이는 17세에서 40세.

일본군의 상징으로까지 여겨지는 일본도와 긴 총검은 일본군의 기관총 편제와 만정만 생산된 1차대전식 기관단총, 75mm 야포가 주력이었던 사단 포병연대의 편제를 따져보면 왜 그랬는지 추론이 가능할 지경. 참고로 미군과 독일군의 2차대전 중 포병연대 편제는 105mm 견인곡사포가 주력이고 155mm 견인곡사포나 150mm 중포를 상설편제에 넣고 있었다.

웃긴것은 일본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8살때부터 준군사훈련(교련)을 시켰다는 것. 애초에 거국적인 징병도 제대로 못하는 상태에서 애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면 대체 어디에 써먹겠다는 것인지...
3.1 일본의 전투교리와 훈련 
일본 교관들은 계속 병사들에게 총검이 필수적인 공격무기라고 가르쳤다. 총이 아니라! 또 개개인의 조준사격보다는 하사관이 분대의 사격을 지휘하는 공동 소총 사격을 강조했다. 전열보병이냐?

육군의 기본 훈련 기간은 6개월. 미군은 3.5개월. 일본 군인의 훈련기간이 더 길지만 위에서 나온 교리를 봐서 알겠지만 제대로 싸울 수 있는 군인이 아니었다.

정글에서 행군을 할 때는 무조건 분대장이 앞서고 그 뒤로 병사들이 한줄로 나란히 걸었다. 딱히 문제 되는건 없어보이지만, 이 때 적을 마주치면 당연히 맨 앞의 분대장이 죽고 분대장의 위협으로 간신히 유지되던 부대는 병사들의 도망으로 인해 해산됐다.

일본의 조종사 훈련은 아주 어려워서 훈련의 수료에는 50내지 64개월이 필요 했고 매년 졸업하는 수송기조종사는 100명에 불과했다. 이 훈련이 성적순으로 잘라서 소수정예의 초인적인 실력을 가진 조종사를 양성하는 훈련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사카이 사부로의 자서전 대공의 사무라이에는 복장 불량으로 퇴교, 심지어는 졸업 전날 몰래 술을 마셨다는 이유만으로 퇴교당한 사례가 언급된다. 그냥 똥군기 잡느라 자질이 우수하고 열심히 훈련받던 훈련생들을 무더기로 내보낸 것.

이 때문에 미드웨이 해전과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등을 거치며 숙련된 조종사를 대량으로 잃은 뒤에는 훈련 과정을 극단적으로 간소화 했다. 얼마나 시간을 줄였는지 잠깐 살펴보면 1943년 이전 : 700시간, 1943년 이후 : 500시간, 1944년 : 275시간, 1945년 : 90시간이며, 이걸 본다면 교육은 무늬만 할 정도로 엄청나게 교육시간을 줄여서 수박 겉 핥기 식의 훈련으로 급조한 조종사들로 다급하게 보충 인원을 투입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이해가 갈 지경이다.

실제로 사카이 사부로 자신도 한쪽 눈의 시력을 거의 잃어버리자 실제 출격이 금지당하고 훈련교관으로만 있을 것을 명받았으나,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조종사가 딸리자 직속상관들에게 가장 믿음직한 에이스 취급을 받으며 실전에 출격했으며, 이 때 앞서 말한 같은 책에서, 대전 후반에 보충으로 합류한 애송이 조종사들 그 누구보다도 해군 비행학교 시절 퇴교당한 자신의 동기들이 더 뛰어난 조종사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문구를 넣어서 일본군을 비판했다.
3.2 적이 바보라는 전제하에 세워 작전계획만 화려하다 
더욱 웃기는 건, 해군이고 육군이고 애초에 지나칠 정도로 초기 계획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었고, 심지어 작전 계획을 세울 때는 적이 예상대로만 움직이는 상황을 상정해 놓고 계획을 짜서 극도로 낙관적이고 안일하기 짝이 없는 작전이 바탕이 되었다.

예컨대 일본 해군의 작전계획에는 야간에 적 함대를 기습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는 적함대는 야간에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대기하며 일본 군함의 접근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는 전제 하에 작성되었다. 미군이 레이더를 운용한 것을 감안하면 말이 되지 않는 전제인 셈이다. 물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식의 경우가 있긴 하다.

과달카날 공방전 중 사보섬 해전에서 이 말도 안되는 전제가 실제로 일어났다. 놀랍게도 해협 입구를 구축함 두 척이 레이더 수색을 하고 견시까지 두면서 해역감시를 했는데도 일본함대의 진입을 눈치채지도 못했다. 다만 이 당시 레이더의 성능이 그리 좋지 않아서 함선탑재 레이더보다 사람의 견시가 더 좋은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미국의 병크가 화려하게 빛나는 사건. 덕분에 일본해군은 엄청난 대승을 거뒀지만 이러한 요행이 매번 일어나길 바라는 것이 무리이다.

더구나 일본 함정들은 적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상호간에 통신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위치와 적 함대의 위치, 그리고 다른 일본 함정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포위망을 형성한 후 정확한 타이밍으로 정확한 지점을 향해 공격을 시작하는 불가능한 묘기를 해야 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고안하는데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포위망을 더 복잡하고 정교하게 디자인하는 작업에만 골몰했다. 설정놀음

일본군의 야간 작전 계획 같은 것은 그나마 실전에서 적용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특별히 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유사한 문제가 미군과의 결전 계획을 짤 때도 터져나왔다. 일본군이 미 해군과 결전을 벌이기 위한 작전의 핵심은 점감 요격 작전이었다.

이는 미군 함대가 접근할 때 동남아시아 여기저기에 매복해 있던 항공기들이 일정한 시간차를 두고 발진해서 미 해군 함정들과 함재기들은 한 쪽에서의 공격에 대응하다가 다른 쪽에서 다시 공격을 당하는 식으로 우왕좌왕하다가 큰 피해를 입게 되고, 그렇게 만신창이가 된 미군 함대를 함대결전을 통해 결정적으로 격파한다는 것이었다. 듣기에는 그럴 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일단 준비과정부터 문제인것이 당장 비행기를 매복시키고 그걸 써먹으러면 활주로가 필요한데, 비행기야 숨긴다치고, 활주로를 어떻게 숨긴단 말인가? 과달카날 전투가 시작된 계기가 과달카날섬에 설치중인 활주로를 보고 그 기지가 완성될 경우 미국-호주간의 보급선을 위협할수 있다고 판단되어 서둘러 공격하데서 시작되었다는 걸 보면 알수 있듯이 활주로를 숨긴다는건 어려운 일이다. 물론 나름 숨겨보겠다고 활주로 한가운데 나무를 심었다가 뽑고, 이동식 위장가옥을 이동시켜서 촌락처럼 보이게 하는 등 여러가지 꽁수를 고안했지만 그래봤자 들키는 것은 그냥 시간문제일 뿐.

설상가상으로 이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미군은 일본군의 위치를 아직 모르는 상태에서 일본군이 미군 함대의 위치를 먼저 파악한 후 각지에 흩어져 있는 기지들이 유기적으로 연합해서 작전을 펼쳐야 하는 것이 기본 전제가 된다. 실제로 도상연습에서 미군을 맡은 장군(나카무라 료죠 중장, 점감 요격 격파 연구(!!)만 하는 장군으로 유명했다)이 연구한 대로 움직이자마자 연합함대가 일본 근해까지 밀려서 전멸당하는 결과가 나왔다.

이 때문에 장교들이 항의하자 구 일본군 2대 명언 중 하나인 미군이 우리 뜻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란 명언을 남겼다고 한다. 참고로 나머지 하나는 만주사변의 주역이자 전쟁 초기에 큰 전공을 세웠던 이시하라 칸지가 육군대학 시절 "기관총의 가장 현명한 운용요령은 무엇일까?"라는 문제에 "기관총을 항공기에 장비시켜 술주정꾼이 걸으면서 소변을 보듯(…) 전방위 화망을 형성해 적 행군종대에 퍼붓는다."라고 구술한 그것. 이후 나카무라 중장은 2.26 사건 이후 파벌싸움에 얽혀서 퇴역했다. 한국인들 입장에선 그나마 다행인 일.

또한 이러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정작 미군 함대를 어떻게 먼저 찾아낼 것인가에 대해서도, 기지들이 어떤 수단으로 통신을 하고 누가 어떻게 작전을 지휘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제대로 고려한 적이 없다. 단지 어떤 타이밍에 어떤 식으로 공격하는 것이 좋을 것인지에 대한 것만 예술적으로 다듬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 결과 결전을 위해 준비된 기지들은 미군에게 먼저 발견당하고 선제 공격을 받아서 변변한 저항조차 못하고 처참하게 각개격파당했다.

상식적으로 말해서 넓은 지역에 흩어진 부대들이 지휘권이나 통신 등의 문제로 유기적으로 협력할 수 없다면 부대를 산개시키지 않고 전투력을 집중해야 하겠지만, 일본군은 기묘할 정도로 "한 부대가 적의 주의를 끄는 동안 다른 부대가 작전목표를 달성한다"는 식으로 보기에는 예술적이나 매우 복잡하며 스스로의 힘을 분산시키는 작전을 좋아했다.
위의 요격 점감 작전도 그렇지만, 해전에서도 나구모 주이치가 경항모를 미끼랍시고 따로 떼놓았다가 무의미하게 격침당하는 삽질을 몇 번 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미군의 주의를 끈답시고 알류산 열도를 공격해서 귀중한 전력을 무의미한 곳에 박아놓고 나중에 구출하러 가느라 고생했다. 게다가 알류산 열도 점령은 원래 계획에는 없었으나 미드웨이의 패전을 가리기 위해 점령했으니...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그나마 미끼 작전은 성공했지만, 그것이 성공했다는 것을 다른 함대에 알리지 못해서 물거품이 되었다.
3.3 적이 지는 걸 전제로 하는 훈련 
훈련을 할 때도 처음부터 적이 지는 것을 전제로 한 훈련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일상사였다. 심지어 미드웨이 해전 직전 벌어진 워게임에서는 미 항모에 의해 4척 뿐인 일본 항모중 2척이 침몰당하고 두 척이 대파되는 결과가 나오자 그런 일이 벌어질리 없다며 도로 부활시키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는 연함함대 참모장인 우가키 마토메가 대항군 지휘관이자 판정관을 겸한 상태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가 나오자 우겨셔 결과를 뒤집은(...) 것이다.

이 때 부활시킨 이유들도 걸작인데 "천황 폐하의 정강인 항모에 기량이 엉망진창인 미군기가 감히 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을 리 없다."라고. 그렇게 수정된 결과가 한 척 중파. 이 때문인지 미드웨이 해전에서 연합함대는 항공모함 네 척 중 히류 한 척만을 (아마도 희생양으로) 돌출시키는 대형을 취했는데, 결과적으로 히류가 제일 오래 살아남았고 적 항모 한 척도 같이 끌고 갔다.

이러한 상식을 따르지 않는 지휘관들 때문에 일본군의 전사자 비율은 유독 높았던 데다가, 미드웨이 해전만 하더라도 막상 실전에 들어가고 나서는 상황 판단 실수의 연속으로 망해버렸다.

작전의 핵심이 미드웨이 점령인지 아니면 미해군의 격멸인지조차 불분명했으며, 실제로 작전이 시작되고 미 함대가 발견되자 미드웨이를 우선적으로 공격할지 아니면 미함대를 먼저 공격할지를 두고 우왕좌왕했다. 미드웨이 공략 함대도 항모부대와 그 외의 전함을 주력으로 한 부대로 나눠서 신속한 지원이 불가능하게 떨어뜨려 놓았고, 그 결과 실제로 항모가 공격 당한후 야간에 전함으로 접근전을 벌이려 했으나 거리가 멀어서 불가능했다. 당시 미해군의 지휘관이었던 스프루언스제독이 일본군의 의도를 간파하고 교전을 회피한 것도 한몫을 했으나, 미군이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것도 예측 못한 것에서 이미 싹수가 노랬다. 당시 미해군은 대다수의 전함이 진주만 공습 당시 격침되어 전함이 턱없이 적었다. 특히 미드웨이 해전에 참여한 미해군은 전함을 단 한척도 가지고 있지 않았을 정도라 접근전을 회피할 것이 충분히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일선 병사들까지 목표가 미드웨이인걸 알고 노래를 부를 정도로 엉망인 정보통제로 인해 오죽했으면 미국은 이러한 미드웨이 타령이 실제 목표를 숨기기 위한 연막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특히 이전의 진주만 당시에는 정말 질릴 정도로 정보를 통제해서 뒤통수를 때렸던 만큼 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정찰기는 정비를 제대로 안해서 제때 날리지 못했으며(아이러니하게도 미 항모를 발견한 것은 이때 발진이 지연된 정찰기) 심지어 정찰기의 무전기가 고장나 있었으며 기껏 미 항모를 발견했지만 그걸 항모인지도 몰라서 제대로 보고하지도 않는 등 각종 삽질을 저지르는 바람에 X망 테크를 타게 된다.
3.4 정신승리의 말로 
애초에 이 인간들은 전쟁에서 지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 혹은 자기들이 틀렸으면 어떤 결과가 탄생하는가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인간들이었다. 애초에 질 리가 없다고 믿은게 틀림없다. 아니, 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세뇌한 것으로 보인다.

전세가 기운 후에는 군부나 고위 관료들도 일본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패배에 대해 말이나 생각을 하는 것은 금기로 취급했기 때문에 제대로 논의가 될 수 없었다.

그나마 이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말이 일단 국지전에서 승리한 다음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종전협상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인데… 정작 이기고 있을 때는 협상에 대한 구체적 의견을 내는 작자는 하나도 없고 모두가 눈앞의 피상적 승리에 광분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상황이 나빠지자 군부나 고위 관료 모두 종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1억 총옥쇄'까지 부르짖으며 총력전을 주장했다.

그런데 정작 총력전이 뭔지를 몰라서 귀중한 인적 자원을 다 날려먹는 삽질만 저지르고 끗.

총력전에서는 무엇보다도 전쟁물자와 식량, 연료 등의 필수적인 요소들의 생산을 관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일본군에서는 오히려 숙련공들을 군인으로 징집하고 그 자리를 정신대 여학생 등으로 메웠기 때문에 생산되는 물자는 질과 양 모두 하락하기만 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남성들이 대량으로 징병된 빈 자리를 미숙련된 여성인력으로 채우는것 자체는 그리 드문일은 아니었고, 여성운동이 활발해진게 이당시의 여성의 사회진출때문이라는 설도 있을 정도로 보편적이었다. 문제는 당시 일본은 공업분야에 있어서 표준화된 품질관리가 불가능해서 숙련공의 중요성이 대단히 높았다는데 있다. 영국이나 미국은 정밀기계와 표준화된 품질관리덕에 미숙련된 여성인력을 동원해도 일정한 품질의 제품을 만들 수 있었지만, 일본은 숙련공의 세심한 마무리로 품질이 관리된 만큼 숙련공의 부재는 물자의 품질과 양에 바로 타격을 주는 요인이었다. 게다가 자체적으로 만들어내는 공작기계의 품질은 유럽기준으로는 저급품이었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오각형 너트 같은 것이 정식 출고된 장비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오죽하면 독일에서 수입한 공작기계를 적재한 공작함 아카시의 작업능률이 국산 공작기계가 주류인 본토 해군공창 수준을 훨씬 능가했을까?

사실 1차대전 초기에 유럽 각국도 비슷한 삽질을 하기는 했지만, 유럽에서는 몇 주 내에 실수를 알아채고 기술자들을 공장으로 돌려보내고 오히려 공장주들에게 군인들을 선발해서 일하게 할 권한을 주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일본에서는 몇 년이 지나도 그런 거 없다. 그 시절 유럽 각국은 정부가 민간과 군사 영역을 조율할 수 있었지만, 일본은 군부가 민간과 정부를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에도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투원만을 우대하는 문화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군인의 정신력보다 물자가 더 중요하다는 발언을 하는 것 자체가 반역으로 간주되고 기술자 등을 특별 취급하는 것은 장병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판이라...

설상가상으로 전투원만을 우대하고 비전투인원을 무시하는 성향 때문에 라바울에서 철수할 때는 전투기들만 파일럿과 함께 날아가버리고 정비 인원은 그냥 방치했다. 물론 막판에는 현실적으로 정비원들을 철수시킬 수단이 별로 없었던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하지만 전설적인 에이스 파일럿 에리히 하르트만의 일화에 따르면, 전황악화로 포위된 비행장에서 탈출할 때 전투기의 무전기 등 비행에 필요없는 장비를 버리고 생긴 공간에 정비병들을 태워 이륙하여 무사히 탈출한 일화를 생각해보면 일부러 방치한 것이 맞다. 게다가 애당초 그 지경이 될 때까지 간 것 자체가 여차하면 정비원들은 내버려두고 가도 된다는 암묵적인 인식 때문이었다. 덕분에 대량의 정비원이 적중 한가운데 고립되서 전투가 끝난 후에 고스란히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도 않아 숙련된 정비원이 부족해서 고생하는 등...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전쟁하고 전혀 상관없는 일반 일본 국민이나 당시 일본 내 식민지 출신이었던 조선인, 중국인 등을 포함한 엄청난 숫자의 민간인이 고위층들의 이러한 태도 때문에 희생되었다. 그 예로 오키나와 전투에서 오키나와 사람들이 엄청나게 희생되었고, 거기다 희생자들 중에는 조선인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당시 오키나와는 류큐라는 독자적인 왕국이 존재하였고, 일본의 정벌에 의해 편입된지 얼마 안되었기에(1879년) 일본 본토라기보다는 식민지에 가까운 취급이었다. 때문에 오키나와 전투를 일본 본토에서 일어난 전투가 아니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당시뿐만 아니라 90년대까지도 오키나와에서 일본 본토로 올 경우에는 별도의 통행증을 요구하는 등 오키나와에 대한 차별은 아직까지도 상당하다. 이런 점이 반영된 듯 일본본토와 오키나와의 한국인 희생자에 대한 태도도 확연히 다르다. 오키나와에서는 별도의 추모공간까지 마련해 놓았지만, 적지않은 한국인이 희생당한 히로시마의 원폭추모관에는 현재 위령비가 세워져 있음에도 가이드들조차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진거다. 예전에는 아예 위령비 자체가 없었다.

오키나와 전투는 민간인이 대량으로 전투에 참여할 것을 강요당한 전투였으며, 이 전투로 인해 미국은 일본본토에서도 이러한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와 올림픽 작전을 계획했다.

물론 죄다 막장은 아니라서 양심적이고 상식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전부가 미쳐돌아가는 상황에서 이들은 한직으로 쫓겨났다.

그외에도 내부의 적 수준의 병크를 터트리는 무능한 자라도 인맥이나 사상만 맞으면 사고를 쳐도 넘어가고, 오히려 멀쩡하고 유능한 자를 잡아다가 일선에서 내몰기도 했다. 그 좋은 예가 무타구치 렌야말 그대로 정신줄을 놨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 천황제의 유지와 일본에서 전범재판을 여는 데에 성공했다. 만약 연합군 측에서 했다면 엄청나게 가혹한 판결이 내려질테니. 물론 이러한 사태가 빚어진 것은 소련을 견제하려던 미국의 개입때문이지만...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 애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것만으로도 막장 이하의 존재일 뿐이다.
3.5 대체 왜? 
위에서 언급된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은 일본군이 봉건적인 문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군을 이끌던 대부분의 구성원에게는 국민개병제를 시행하는 근대국가의 군대로서 국민과 정부를 대신해 무력을 행사하여 국가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개념보다, 자신이 속한 파벌의 안녕과 이익이 더 먼저였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전략보다 '우리 파벌이 주역을 맡고 적대 파벌은 그저 거드는' 전쟁 상황을 연출하려는 노력이 우선시 되다보니 실효성 없는 예술적인 작전 계획을 가지고 설전이 오갔고, 군 상층부의 정당성에 의문을 표하는 '양심적이고 상식적인 발언'이 있으면 곧 반대 파벌 입장에서는 축출의 좋은 건수가 되었던 것이다.

기록만 살펴보면 일본군의 전장 확대는 이따금 굉장히 충동적이고 무계획적으로 저지르고 보자는 식으로 진행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을 따지고 보면 결국 "우리 파벌도 뭔가 한 건수 올려야겠다!"는 의도에서 시작된 경우가 많다. 진주만 공습 역시 마찬가지. 크게는 해군과 육군의 대립 문제부터, 작게는 옆 부대간의 알력다툼에 이르기까지 이 파벌 문화는 전쟁 시작부터 끝까지 일본군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진 커다란 약점이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오늘날에도 이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아서, 일본 경찰과 육상자위대의 대립이나 해상자위대와 해상보안청의 대립도 어느 정도 이러한 파벌 문화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다.
4 구타 
아니 뭐, 굳이 따지자면 구타 자체는 일본군만의 특이한 전유물은 아니다. 20세기 이전에는 전 세계적으로 구타가 드물지 않았고, 어느정도 잦아든 20세기 와서도 있긴 했을 것이다. 유럽만 해도 라인배틀 시기에는 병사들에게 심한 구타나 압박을 줘서 '전열에서 이탈해서 맞아죽느니 그냥 싸우지'라고 생각하도록 세뇌할 지경이었다. 물론 이게 잘한건 아니지만, 일본군의 진짜 문제는 총의 개선과 상비군 제도로 인한 병사 사기 향상 등의 이유로이미 저런 행위를 할 필요가 없음에도 여전히 저런 짓을 자행한 것이다.

일본군은 단기간 안에 병사들의 충성심을 고양하고, 통제한다는 명목을 대면서 구타를 묵인했다. 장교는 상급 장교에게 맞고, 맞은 장교는 부사관들을 때리며, 부사관들이 병사들 때리고, 상급병이 하급병을 때리는 구타의 쉴새없는 고리가 군 생활을 지배했다고 한다.

게다가 '강한 군기'를 핑계로 병사들에겐 폭력을 당하고도 불만이나 하소연을 할 권리조차 박탈됐다. 구타를 피하거나 고통을 호소하면 하극상으로 취급하여 더한 폭력이 가해졌다. 복장, 내무생활, 군기, 기타 모든 핑계가 폭력을 정당화 했으며, 수많은 암기사항을 강요하고 암기를 하지 못하면 때리는 식으로, 폭력의 방식이 연구되었다.

심지어 자기들끼리 뺨을 때리도록 시키기도 했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책에, 자기가 초등학교 때 담임이었던 선생이 이 비슷한 벌을 자주 줬다는 나온다. 일제 시대에 학교에서 벌어진 일이니 일본 군국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보아도 틀린 해석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은 모두 군인 출신으로 일본군부의 영향이 유독 강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폭력의 결과로 병사들은 판단능력과 이성을 상실했고, 겉보기에는 상부에서 내리는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것 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정신건강에 크나큰 악영향을 끼쳤음을 부정할 수 없다.

결국 겉으로 보기에는 엄청난 군기와 정신력을 보이지만, 실상은 가혹행위로 인하여 정신병적인 기질을 보유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일본 점령지에서 자행된 민간인이나 포로 학살, 가혹행위 등을 살펴보면 그 정도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이다. 인종차별에 눈이 먼 독일군이나, 그들의 잔인한 행각에 대한 복수를 부르짖은 소련군이 벌인 유럽의 동부전선보다도 더 심했을 정도이다.

오죽하면, 전쟁 중의 점령지라기 보다는 식민지긴 하지만 오키나와에 진주한 미국 해병대중 일부가 민간인에 대한 강간이나 살해 등을 자행했다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의 주민들이 대체적으로 미군은 일본군보다는 훨씬 더 주민들에게 잘 대해 줬다고 평가했을 지경.

주한미군의 범죄사례나, 위에서 나왔듯이 오키나와에서의 미군의 민간인에 대한 범죄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미군이 종교가 다른 현지인들과 그리 잘 지내는 군대가 아님에도 이러한 평가가 나왔다. 대체 일본군이 얼마나 맛이 갔으면 저런 반응이 나왔을까?

게다가, 자발성이 없는 이러한 외형적인 군기는 결국 병사들의 무단 이탈, 탈영, 명령 불복종, 심지어 상관폭행 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심지어는 부사관이나 장교까지 처벌을 두려워해 탈영해서 마적단이 된 사례도 있다.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내무생활에 대한 불만해소 차원에서 일본군은 술을 이용했는데, 심한 음주로 벌어지는 각종 사고도 큰 문제였다.

당연히 폐해가 너무 심각하다 보니 그리 맛이 간 일본군마저도 구타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인지를 하고 있었고, 결국은 너무 폐해가 심해서 일본군도 1944년에 대본영의 명령으로 구타나 영내폭력을 금지시키는 발표를 하는 등 내무생활에서 구타와 폭력을 추방하려 했으나, 이미 때리고 맞는게 너무 일상화가 되어 있어서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종전 이후 일본군 해산으로 끗!

게다가, 전투중에도 이러한 폭력과 가혹 행위로 병사들을 통솔할 순 없었기에 전투중에는 잠깐 폭력의 고리가 느슨해졌는데, 이 때에는 병사들에 대한 통제력도 느슨해진다는 큰 문제가 존재한다. 실제로, 감시의 눈길이 없어진 일본 병사들은 자발적으로 적과 싸우지 않고, 그야말로 뿔뿔이 흩어져 전투력이 형체도 없이 소멸하는 경우도 일어났다.

그보다도 더 무서운 점은 이러한 폭력의 고리를 대한민국 국군 및 한국 사회가 그대로 물려 받았다는 것. 일단 국군의 창설기에 구 일본군 장교가 대량으로 유입되기도 했으며, 20세기 후반까지 군대에서는 이러한 구타와 가혹행위가 계속되었으나 몇 년간의 노력 끝에 21세기가 넘어갈 때 쯤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해병대와 전의경 부대에서는 여전히 구타가 남아 있다. 다시 한 번 진짜로 고맙습니다 개들아 더블어 일본제국군의 무능한 장교단류 갑인 똥별의 전통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다...

반면에, 오히려 일본 자위대는 육상자위대의 경우, 해상자위대가 구 일본 해군 출신이 상당수 참여한 것과 달리 경찰예비대를 바탕으로 설립되었으며 아예 구 일본 육군 소속 인물을 배제하기도 했고, 모병제라서 여러 가지 처우 개선을 하다 보니 구타 사례가 없....었으면 좋았겠지만 일본군 시절보다 덜 할 뿐이지 구타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나마 해상자위대는 일본 해군 영향을 좀 받아서 좀 영향이 있다고는 하지만 여기도 일단 모병제라서 한국군보다는 나을 것이다.
5 번외편: 보급 
5.1 멀쩡해보이는 외양 
중일전쟁이 본격화되기 전의 일본군은 서류상에서나 제대로 된 주둔지에 있을 경우에는 보급과 복지수준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식사는 다양한 종류의 고기와 야채생선, 감미(甘味) 등이 매끼에 포함되어 있었고, 그 양도 결코 적지 않다. 간식으로 사이다와 양갱, 찹살떡 등이 지급되었다. 또한 서양의 커다란 건빵을 현재 한국에서 잘 보이는 먹고 보관하기 좋은 모양으로 개량한 것도 일본 육군이다.

최정예라 불리는 근위사단 시설은 내무실은 전부 침대형에 2층 짜리 건물에도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하니 90년대 초의 한국군 사정보다도 나은 수준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국군이 장병들 복지에 지독히도 신경 안쓰는 거지만. 장병복지는 뒷전이지만 고위 장교들은 테니스도 쳐야하고, 골프도 쳐야하고... 병사들 복지 예산은 늘 쪼달리는데 몇몇 고위 장교들을 위한 골프장은 어찌 지을 수 있는건지... 물론 이용가능은 중사부터라지만, 부사관이나 영관이하 장교들이 과연 그 골프장을 이용할 수 있을까??

야마토의 경우 아직까지 해먹이 이용되던 당대의 함선에 비교할 때 초호화급인 침대를 비치함으로써 '야마토 호텔'이라고 불렸으며, 실제로 야마토 급의 식당은 전쟁 전 일본의 해운사들이 운영하던 호화여객선의 조리장에서 일하던 요리사들을 징용해서 운영했다.

게다가 공간절약이 생명인 잠수함도 승무원 대비 침상 비율이 1:1이었을 정도. 미국 잠수함이 1.5~1.75:1 정도였으며 소형함인 독일의 U보트는 2:1의 비율을 보인 것에 비해 엄청난 수치. 대신 반대급부로 일본해군 잠수함들이 싣고 다닌 어뢰는 1척당 6~10발이 전부였다. 그것도 수상배수량 3천톤이 넘는 이호형 잠수함들이 그랬다. 2천톤 대의 미국잠수함들이 어뢰를 24발씩 탑재했고, 배수량이 1천톤도 안되는 독일해군의 7형 유보트들도 14발의 어뢰를 챙겼던 것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적은 수량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보급선이 닿는 한 본토의 국민들이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일단 군인부터 먹이고 본 모양. 종전 직전의 야마토 승조원의 증언 중에는 "매운 카레라이스와 사과와 바나나마카로니가 들어간 샐러드가 맛있었으며, 내가 이러한 것을 먹어도 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 정도였다"는 말도 있다. 일본 해군은 육군보다 그나마 상식적이어서 병사들의 보급에 좀 더 신경쓴 점도 있다. 그러나 육군 역시 기본적으로는 해군과 마찬가지로 주둔지에서는 좋은 급양을 받았다. 문제는 야전 급양.

하지만... 일본군의 보급에서 좋은 점은 딱 여기까지란 것이 문제다.
5.2 처참한 실상 
일본군이 잘나갔던 시절에도 야전취사장비를 구비하는데 이상하게 소극적이어서 전장에서 제대로된 밥을 먹을려면 지급받은 쌀과 반찬으로 밥과 국을 만들던가 민가에서 징발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게다가 식량은 보급하면서 식량을 조리할 연료는 알아서 구해다 조리하라는 식으로 일체 보급이 안돼서, 각 병사들이 문자그대로 알아서 연료를 찾아 다녀야 했다. 그 결과 민가에 엄청난 민폐를 끼쳤고, 점령지의 식량만 약탈한게 아니라 땔감으로 쓰려고 멀쩡한 문짝이나 가구같은 것도 약탈해 갈 정도로 철저한 수탈 덕분에 반일의식을 고취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게다가 전쟁 중에 급속히 팽창하여 수백만에 달하는 병력을 모으자마자 복지는 어느새 뒤켠으로 밀려나고, 연합군의 공격으로 결국 보급마저 끊겨 태평양 등지에서는 몇달을 굶은 병사들이 마침내 포로를 죽여 인육을 먹는 사건도 자주 목격되어 연합군과 일본 양측에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조지 부시(아버지)도 이것 때문에 죽을 뻔 했다. 중국 등에 주둔한 부대들도 민간에서 식량을 '조달'-이라고 쓰고 약탈이라고 읽자-하는 것이 주요 업무들 중 하나였고, 당연하게도 현지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현지의 민간인들에게서 식량을 구입하는 것은 유럽에서도 종종 있었던 일이지만, '구입'과 '약탈'에는 당연하게도 큰 차이가 있다. 게다가 정부와 같은 행정기관을 통해서 거둬들이는 것도 아니고 군인들이 직접 빼앗아오는 것은 더 비효율적이면서도 더 폭력적인 양상이 되기 쉬웠다. 또한 식량 보급의 중요한 부분을 그런 '조달'에 의존하는 것은 1차 세계대전에서부터 거대한 규모로 팽창한 군대를 유지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방법이었다. 일본군은 아예 전선 후방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식량을 조달하는 부대를 따로 운영했고, 그러고도 모자라서 교전지 근방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약탈로 일관한 것이었다.

또한 무기체계 역시 병사에 대한 배려는 많이 부족했다. 열악한 제로센의 생존성을 포함해서 1921년 영국 관함식에서 영국 해군들이 일본의 중순양함을 보고는 "우리가 타는 건 호텔쉽이군 ㅋㅋㅋ"이라며 비아냥을 때린 걸로 보아, 그 열악함을 가늠해볼 수 있다.

장교와 사병의 차이도 심각했다. 초기 일본군은 병사들에게 쌀만을 지급하고 부식을 살 돈을 따로 지급했다. 그래서 가난한 병사들은 부식비를 모았다가 월급에 보태 송금했는데, 덕분에 쌀밥만으로 배를 채워야 했다. 덕분에 백미로만 밥을 먹게 되니 각기병이 유행하게 된 것. 덕분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많은 병사들이 각기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영양 문제는 각기병이 유명하지만 이러한 비타민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문제가 없는건 아니었다. 영양학적으로 쌀이 밀보다 영양의 균형이 좋다고는 하나(쌀에는 생각보다 단백질이 많다) 쌀과 밀 둘다 필수 아미노산이 결핍되어 있다는 문제가 있다. 동양에서 이걸 보완해주는게 콩, 그중에서도 간장이나 된장 종류다. 각기병 문제가 아니더라도 이러한 부식이 없는 식생활은 나중에라도 단백질 결핍 등의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다.

당시 일본군은 각기병의 원인을 파악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해군은 백미 외의 다른 부식류를 충실히 하면 각기병 발병율이 낮아진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았던 반면, 육군은 각기병은 영양불균형 때문에 생기는 병이 아니라 미생물에 의한 전염병이라면서 그냥 쌀밥을 먹였다. 이러한 막장이 발생한 이유는 당시 육군 군의총감이었으며 일본의 대문호이기도 했던 필명인 모리 오가이로 잘 알려진 모리 린타로 장군이 독일유학 경험이 있는 저명한 의학박사였는데, 이 사람이 각기병 미생물 원인론을 신봉했던 것이 문제였다.

결과는 일본육군의 1만여명(상비사단 한 개분에 해당하는 병력이다)이 각기병에 걸려서 사망하거나 전투에 참가하지 못한 반면 해군은 각기병 발병자가 없었다. 이는 각기병의 원인이 비타민B 부족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1차 세계대전 이후로도 계속되었는데, 해결책으로 제안된 현미 및 보리 혼식이 당시의 서민층 식사여서 병사들이 심한 소외감을 느낀다는 의견이 강했고, 또한 야전취사에서 현미 및 보리가 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국군 역시 한국전 당시 일단 야전취사를 할 때는 조리에 시간이 걸리는 보리를 빼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집단취사가 거의 배제된 일본군의 특성상 보리는 줘봤자 제대로 조리할 여건 자체가 되지 않았었던 것이 문제 중의 문제. 이 말은 그냥 쌀만주고 밥은 각자가 해먹으라는 소리로, 주둔지와 야전에서의 식사가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게 만든 원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추세는 1943년 이후 갑자기 상대적으로 나아졌는데,' 그 이유가 정말 걸작이다. 어이없게도 보급체계가 붕괴되면서 아무거나 먹어야 했기 때문에 오히려 비타민 공급 문제는 나아졌던 것이다.

물론 장교들은 그런거 없었다. 다른 반찬들이 잘 나오니까. 2차대전 종전까지 병사들은 장교의 잔반이 사병 식사보다 낫다라는 소리를 할 정도였다(…). 물론 장교의 사병 식단에 대한 착복도 포함되어 있다.

종합하자면, 일본군의 보급은 전쟁이 벌어지기 전이나 특정부대나, 주둔지 등 특수한 곳에서만 정상적이었으며, 전장 등 나머지 장소에서는 기본적인 보급 상태가 굉장히 열악했다. 오죽했으면 위로부터 보급이 끊겨 미군으로부터 입수한 전투식량으로 연명한 부대의 영양상태가 더 좋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물론 1차대전 때 미군은 영국이나 독일 시민보다 잘 먹던 사람들이지만 입수한 전투식량이 매일 전원에게 줄 정도로 풍족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는 걸 감안하면 얼마나 보급이 빈약한 것인지 짐작이 되지 않을 정도.

애초에 기본적인 보급 자체가 다른나라와 크게 차이났던게 사실이다. 주적인 미군은 1인당 4톤의 보급물자가 지원되는 반면에, 일본군은 1인당 2파운드(0.9kg)정도.
6 번외편: 본토 결전용 병기 
일본의 본토 결전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를 넘어서, '침략자'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다.

먼동네 추축군인 독일에서 대전차무기로 판쩌파우스트와 판처슈렉를 개발하여 군대와 국민돌격대에게 나누어준 대신 목숨은 내다버리는 것인 일본군께서는 대전차죽창이라는 걸 개발하여 땅크를 까부수라고 하였고, 소련에서는 조건반사를 이용하여  폭탄을 개발했다면, 효율성(?)을 중시한 일본군께서는 개 대신 노인과 학생을 이용한 폭탄을 만들어 '사용'한 것은 상당히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나마 양심은 있었는지 독일의 국민돌격대(VS)처럼 허접하지만 무기노릇을 할만한 화기류를 보급해 주었는데…… 그런데 그것이,

엔하위키에서 일본군을 키워드로 검색해 봤더니... | 인스티즈

뭔가 2차대전시기의 소총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하지 않은가? 위 그림의 출처에서 설명을 보면 "본토 결전의 단발화승총!" 그러니까 과거 17~18C쯤 업복이가 쓰던 조총과 같은 종류다!!! 1억 국민 공스나화 작전? 갑자기 국민돌격대가 델타포스처럼 느껴진다. 자세히 보면 총대는 학교 책걸상 다리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생긴것만 봐도 무기로 보기에는 너무 허접해서 종전후 미군이 행한 무장해제에서도 살아남아 야쿠자들간의 항쟁에 사용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거는 약과였는데,
엔하위키에서 일본군을 키워드로 검색해 봤더니... | 인스티즈

폭죽과 물로켓을 짬뽕시켜 놓은 것처럼 생긴 이 괴상한 물건이 대공무기란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는 그나마 나은 것이 정규 예비군 부대에 지급된 무기라는 점이다(…). 보통 예비군 부대엔 여분의 정규군 무기 내지는 정규군이 퇴역시킨 전 세대 무기가 보통이다. 당장 독일의 국민돌격대가 이러한 무기로 무장했다. 정규군도 쓰는 팬져파우스트+퇴역한 소총들(닥치는데로 끌어모아서 독일제, 체코제, 러시아제,프랑스제 등등등등) 결국 이는 당시 일본의 빈약한 공업 생산력을 입증하는 요소로 보인다.

여담으로 일본 애니에서 흔히 보이는 프로토타입에 대한 미화도 이 당시의 영향이라는 설도 있다. 프로토타입은 기술자들이 수공업으로 정밀하게 시간들여서 만드니 어찌어찌해서 쓸만하게 만들었는데 정작 양산에 들어가면 빈약한 공업 생산력 때문에 영 못쓸 물건이 튀어 나오니까. 실제로 그런 예가 바로 Ki-84 하야테다. 하야테는 양산 과정에서는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아 비행중 엔진이 멈춰 버리는 등의 일이 많아 전장에서는 구형인 하야부사만도 못하다는 평을 들었으나, 카달로그 스펙만으로는 꽤나 훌륭한 물건이다.

그 외에는 실제 죽창이나 목창을 지급하여 각급 학교 공작시간에 제작하도록 했다. 특히 목창 만든답시고 신문 부수를 줄였는데 이는 정보통제의 목적도 겸한 조치이다. 자신들이 졌다는 이야기는 최대한 숨겨야 했을 테니. 게다가 전선에 편지 보낼 종이로 창 만들자고 위문편지 보내지 말기 운동까지 벌이는 병크까지 터뜨렸다. (…)

민간인을 지키는게 군인의 임무인데 앞장서서 민간인을 죽음으로 내몰다니 일본 군부는 양심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애초에 근본부터 틀려먹었으니 패망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다.
7 그밖에 가지가지 
하여간, 알아가기 시작하면 하나 하나 막장이 아닌 구석이 눈곱만큼도 없다. 제로기의 명성이나, 거대 전함 야마토, 거대 항공모함 등으로 대표되는 일본 해군도 무적의 군기와 훈련도를 자랑하는 것처럼 보인 육군도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야말로 썩어있다고 할 만한 실정이다.
7.1 항복하는 자가 없다? 
전쟁 내내 일본 병사들은 수세에 몰려도 얌전히 항복하지 않고, 반자이 어택을 하는 등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저항을 했는데, 이유는 바로 전시에 항복을 하는 것은 군법위반이기 때문.

물론 군법으로 항복을 허용하는 군대는 없다. 한국군도 전시 절대 항복 금지를 군법에 명시해놓고 있다. 문제는 항복한 사람을 스탈린의 소련군 이하로 취급해버린다는 것. 한마디로 말해 일본군 1명이 항복하면 일가친척친구가 작살난다. 게다가 일본군은 작전 실패를 한 장교들에게 할복자살을 시켰는데, 하물며 군법을 위반한 사람들에게는 과연 뭘 했을까? 이뭐병.

일단 상식적인 군대라면 설령 항복을 하지 말라고 법에 써놔도 정말 임무를 수행 할 수 없고 싸워봤자 득도 없으면 항복하고, 포로로 잡혔다가 본국에 돌아와도 완전히 임무를 저버린 것만 아니면 '군법위반자'는 커녕 '참전 용사'로 대접한다. 물론 여기서 소련은 제외. 소련은 전투중 기절 등으로 포로가 된사람도 배신자 취급했다. 하지만 소련군은 낭비할 만큼 많은 인원과 충분한 영토를 가진 상황인데, 가진 것 없고 영토가 작은 일본이 이 짓을 따라한 것 자체가 에러.

게다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항복한 사람을 저리 대하는 일본군이 제대로 되먹었다고 볼 수는 없겠지. 근본적으로 이러한 사상은 일본의 전쟁문화에서 기인하는 문제에서 비롯되기도 했다. 즉 일본의 전국시대때 농민 아시가루들은 전열의 장창병을 맡았고 전장에서 도망칠경우 마을에서 따돌림이나 보복행위를 받는 문화적 특징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저런 이유로 항복한 부대가 단 한 부대도 존재하지 않는데, 저 사정은 알려지지 않고, 항복한 부대가 없다는 사실만 알려져서 일본군의 군인은 애국심이 강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군인들이다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

웃긴것은 항복하거나 후퇴하는 일 없이 부대가 전선에서 소멸하다보니 미군과 전투를 벌이며 얻은 전훈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종전전까지 똑같은 방식으로 전투를 벌이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했다는 것. 최소한 소식을 전할 사람은 돌아오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 상식인 것인데….

실제로는 의식을 잃는 등 어쩔 수 없어서 항복하거나 포로로 잡히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으며, 애초에 일본군의 뇌리 속에 포로로 잡힌다는 개념이 없었으므로 일단 잡히면 군사기밀이 술술술 흘러나와 연합군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또, 부대원 전원이 모두 도망가 부대가 증발하기도 하였고, 한국출신 군인들은 미군에게 정보와 함께 투항하거나, 멀리멀리 도망가 독립군과 합류해 일본군을 엿먹이기도 하였다. 이 꼴 안 보려고 조선을 그렇게 쥐어짰는데….
7.2 물주와의 대결 
일본은 석유연료의 92%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물론 정밀공작기계의 대부분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석유와 기계를 공급하는 미국과는 사이가 갈수록 나빠졌다. 결국 이것이 진주만 공습의 원인이 된다. 한마디로 생필품과 자금을 대주는 물주에게 자기 능력도 생각하지 않고 한판 붙은 격이니….

게다가 물주와 굳이 붙을 생각이었으면 그 전에 미리 물자를 비축하고 군대를 훈련시키며 자금을 융통하고 수입이 필요한 물자를 얻을 다른 수입원을 강구한 뒤에 붙어야 하는데, 이미 중국과의 전투로 인해 물자와 인원이 보충되기는 커녕 날로 감소되는 상태인데다가 미국외의 다른 국가간의 관계도 나쁘고, 돈도 달랑거리는 상황에서 개전을 결심했으니, 그냥 자살하고 싶어요와 동일어라고 볼 수 있다. 2차대전 전 기간을 통틀어서 일본군의 총전비는 미국의 1/8도 안 된다.
7.3 불탄 자리에서 못줍기 
러일전쟁 당시에 러시아가 콩으로 수프만 쑤어먹어서 각기병으로 고생할때 일본군은 콩을 키워 콩나물을 만들어 먹어서 각기병을 예방하여 승리한 전적이 있다. 물론 알고 먹은건 아니고 '오잉? 콩이 자랐네. 버리긴 아까우니 그냥 먹지 뭐.'이다.(...) 사실 러시아에서도 콩나물이 나오기는 했으나 식용인줄 몰랐기에 먹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은 콩으로 가득한 러시아군의 식료품 창고를 보고 콩나물을 먹을 수 있게 됐다고 좋아했다. 이 점은 미국도 마찬가지. 한국전쟁 당시 포로로 잡혔을때 배식으로 나온 콩을 먹을줄 몰라서 그냥 굶고 있었다고 한다.(...)

문제는 콩나물 자체가 아니라 콩나물이 자라고, 적군이 각기병이 생기는걸 보고 고착상태에 빠진 전선임을 눈치챘을 것이다. 이 전선이 어디냐고? 바로 전설의 203고지다. 한마디로 말해 전체가 막장에 빠졌는데 콩나물 하나 건진 셈. 불탄 자리에서 못 줍는 것도 아니고….
7.4 시끄러운 기습(?)인 반자이 어택 
보병전술의 기본을 망각한 반자이 어택. 총검 돌격의 기본 중의 기본은 두 가지다. 은엄폐와 총검술. 문제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상큼하게 씹어먹은 군대가 일본군이었다는 것이다.

본디 이 일본식 총검돌격이라는 것은 1차대전 이전의 프랑스군이 시초였다. 프랑스의 한 교관께서 총검돌격은 승리에의 의지라는 주창과 함께 정식 교리로 채택했으나, 1차대전으로 수많은 프랑스 군인들을 기관총 밥으로 던져주고 나서야(...) 그제야 문제를 해결할려고 했으나, 이 무식찬 총검돌격이 가져온 후폭풍은 엄청났다. 사실상 2세대 남성들이 씨가 마른 상태였으니 종전 후에도 유력한 산업기반인 인력부족으로 프랑스는 2차대전 직전까지도 큰 경제적 발전을 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력은 돌고 돈다는 법칙에 따라 이것을 일본군이 감동먹고 정식 교리로 채택한것이다.(...) 하긴, 정신력 운운하는 일본군께서 승리에의 열망을 바라면 그것은 곧 승리라는데, 맘에 안들리가 없잖은가(...)

서류상으로는 은밀한 기습을 해야 할 반자이 어택의 전조로 기도소리가 있었다. 주 내용은 작전의 성공과 가족과 천황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고 중얼중얼대던 소리는 점차 커져서 돌격시에는 함성이 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반자이 어택을 할 전장에서 기도소리를 내는 것이 곧 미군에게 "우리 조금 있다가 너네들한테 돌격한다잉~" 하고 떠드는 꼴이라 미군이 저 기도소리를 듣고 기관총 사격 준비를 하는 등 반자이 어택을 미리 대비해서 일본군은 오는 족족 죽어나갔다.

설령 운좋게 적군의 진지에 돌입했다 하더라도 일본군의 총검술 동작은 단 한 가지였다. 찌르기. 나름 총검술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대검의 날을 미군보다 5cm 정도 더 늘이고 긴 길이로 상대를 제압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개머리판을 이용한 타격과 발길질 등 다양한 동작을 활용하는 총검술을 당해낼 리는 없었다(...). 긴 길이로 적을 못 오게 제압하기는 커녕, 실전이든 연습이든 미군 병사는 번번히 일본군 병사에게 손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미군과 일본군 간의 체격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나버려 악력이나 근력에서도 일본군은 밀릴수밖에 없었고, 심할경우 운좋게 기습에 성공해 백병전을 벌였더니 미군에게 멱살을 붙들려 내던져지는(...)사례도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일본군 답게 개선할 의지도 없었다. 일본군 내에서 미군 포로와의 총검술 대련 등을 한 사례가 몇번 있고 일본군 쪽이 번번히 졌지만, 그걸 '근성'이나 '병사의 숙련도' 문제 따위로 간주하고 개선할 생각은 안 했다.

게다가 일본군 장교들은 기본적으로 돌격총검을 중시하도록 교육을 받는다. 거기에다가 소대급화력부터 시작해 연대급 화력까지 총체적으로 뒤지는 상황에서 그나마 정신력으로 뒤집을 가능성이 보이는 것이 반자이 어택이었다. 하지만 화력의 차이가 엄청난데다 병사의 질, 훈련상태, 전투의지에서 총체적으로 뒤지는 일본군이다 보니 가뿐하게 전멸당했고, 역으로 (권총과 수류탄, 정글도를 휘두르는)미군식 반자이 어택에 혼비백산 흩어지는 경우마저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2차대전 당시 자진입대율이 90%에 달하는게 미군이다. 일본군이 구타로 극한에 몰아붙이는 식으로 전투의지를 억지로 끌어냈다면 미군 병사들은 처음부터 왕성한 전투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복수는 달콤하다
7.5 무기체제의 막장 
작전의 오판과 실책을 제외하더라도, 일본군 무기체계는 그 지휘부와 함께 열악하기 그지 없었다. 일본은 당시 정책상으로나 제국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엄연한 개발 도상국에 불과했다.

그 대체적인 이유는 군부의 시대상으로 뒤떨어진 교리와 야전방침에 걸맞게 시대상으로도 뒤떨어진 사실상 서구 국가에선 오래전에 폐기한 병기 설계의 방식과 더불어 전체적으로 열악한 공업 생산 능력으로 카피대상의 오리지널 병기 성능도 따라가기조차 어려웠다.심히 현대의 중국군이 연상된다.

게다가 대전이 전개될수록 그동안 해외로부터 의존할수밖에 없었던 산업의 전 분야가 마비되기 시작하면서 심히 병기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성능의 무기밖에 생산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일본의 진짜 실력이었다. 무슨 말이냐면 그나마 대전 초기에 정상적으로 돌아가던 군수생산과 물자공급은 모두 그 전에 구미,특히 미국으로부터 기술이나 기계등을 지원받았던 것을 통해 그나마 전쟁 초반의 전쟁 수행을 제대로 돌릴수가 있었던 것이다.그거 아니었으면 아예 전쟁 수행을 위한 공업능력 자체가 없었다고 봐도 좋다.

제로센을 예로들면 미국의 공작기계를 이용해 미국의 철과 영국의 보크 사이트,희소금속을 원료로 해 미국의 윤활유,항공기용 가솔린으로 가동시키고 있었다는 것이 실정이었다.

게다가 대전 당시의 일본은 제대로 된 공업 규격조차 존재하지 않았다.일본군 병기의 부품교체나 수리가 막장급에다가 성능이 천차만별이었던 건 바로 이 때문

애당초 당시 일본의 병기생산공정은 대부분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졌을 정도로 일본의 산업역량은 미국과는 비교할수가 없다.당시 전차,대형 군함은 물론 개인화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병기를 자동화 생산공정을 통해 더욱 질좋고 더욱 많은 수의 병기를 더욱 빨리 양산하여 2차대전 참전국중에서 가장 높은 군수물량을 뽑아냈던 게 당시의천조국이었다. 일단 추축국중 가장 기술좋기로 유명한 독일도 천조국의 생산효율 근처에 접근하지도 못했다.
7.5.1 허약한 자, 제로센 
남방작전 기간 대활약을 했던 제로센은 그 화려한 기동성을 위해 방어력을 포기한 설계다. 얼마나 허약할 정도냐 하면은 급강하 폭격기인 SBD 돈틀레스와 제로센의 주익이 서로 충돌했는데 돈틀레스는 멀쩡히 살아남고 제로센만 날개가 찢어져 격추된 사례도 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저 돈틀레스가 이러한 식으로 3기의 제로센을 베어버리고 무사히 돌아왔다는 점. 말 그대로 하늘의 사무라이

게다가 사실상 제로센보다 하위로 평가되는 와일드캣과의 교전비는 그나마 제로센이 더 높지만 조종사들의 실력을 감안하면 그렇게 압도적이지는 않다. 개전 당시 일본 조종사는 중일전쟁으로 실전경험까지 갖춘 베테랑인 반면, 미군은 태평양 전선 자체가 2선급 전장이라서 이른바 엘리트들은 거의 없었고 그나마 조금 있던 대부분의 고참 파일럿은 일단 교육 요원으로 투입해 전선 대부분이 신병 투성이였다.

사실 이는 대전 중기 이후 여유가 있었던 모든 나라가 이렇게 했다. 그래봤자 모두 연합국들이지만. 그로 인해서 독일처럼 백여기 넘게 격추시킨 슈퍼 에이스는 없지만 5기 이상을 격추시킨 일반 에이스는 압도적으로 많은 전체적인 질적 향상을 가능하게했다. 단, 독일은 여유가 없어서 못했지만.
7.5.2 구멍이 숭숭 뚫리는 전차 
97식 중(中)전차 치하는 소총탄에도 뚫릴지도 모른다는 루머까지 존재할 정도였다. 물론 지근거리에서 소총에 뚫리는건 95식 전차이므로 루머는 루머이나(어쨌건 몇몇 전차는 권총탄에 뚫렸다), 치하 中전차는 근거리에서 쏘는 50구경 기관총에 뚫렸다(…). 성능이 이렇게 병맛스러워서 대부분의 2차 대전 토론에서는 가여운 존재로 취급받기도 한다.

엔하위키에서 일본군을 키워드로 검색해 봤더니... | 인스티즈
어부바! 
업혀가는 전차는 94식 경장갑차 테케다.

게다가 문제는 이런 사태가 전차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 후술하지만 육군과 해군은 공통적으로 사용할 병기도 다 따로 마련하는 웃기는 짓을 벌렸으며, 앞서 서술한 생산력 부족과 정밀도 급하락의 문제로 인해 같은 종류의 무기라도 성능이 천차만별에 경우에 따라서는 부품교환도 안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그래서 잠수함등으로 수입한 독일군의 얼마 안되는 무기는 마우저포등의 별칭을 붙여가면서 애지중지하며 마르고 닳도록 써먹었다.

이것도 모자라서 현지의 지휘관이 어떻게든 살아남겠다고 무기와 장비를 개조했다가 천황폐하의 하사품을 제멋대로 손댔다고 처벌받는 레알 기계교 막장상황이 발생했으며, 현지의 병사가 노획무기를 사용하면 군법에 의해 처벌받는 웃기는 상황까지 일어났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총폭탄이 빗발치는 현장에서는 일단 살고나서의 일. 따라서 일본군 가운데 좀 용감하고 머리 쓰면서 잘 싸운다 싶으면 그 부대의 장비는 노획품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현실이었다.
7.5.3 손대면 폭발하는 권총 
장교들의 무기(대표적으로 권총)는 전부 사비로 구입해야 했다. 사실 일본도 육해군 모두 관급 권총이 있고 다른 나라도 장교가 사비로 권총을 조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긴 하지만, 문제는 일본의 경우 국산 권총이 믿을 만한 것이 없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의 국산 권총은 전투용으로 꺼내는 것이 자살행위일 정도로 불안정한 권총인 경우가 많았던 것. 그나마 남부 대형/소형 권총은 본토의 공장에서 제대로 된 품질관리를 받으며 생산된 물건이라면 그럭저럭 괜찮은 물건이 나왔다. 문제는 외국기술을 완전히 배제한답시고 순수 국산기술로 설계한 나머지 괴악한 작동방식을 채용하여 방아쇠압이 너무 높아 당기지 못한다던지, 탄창이 갑자기 빠지는 것은 기본이고, 나중에는 떨어뜨리기만 해도 격발되거나 심지어는 측면에 손을 대기만 해도 발포되는 기상천외한 94식 권총까지 나왔다. 일본권총의 괴악한 전설의 대부분은 이 94식 권총이 일으킨 것. 하지만, 중국 현지에서 숫자만 채우고 품질관리는 뒷전인 상태로 만든 남부식 권총들도 94식과 비슷한 문제를 일으켜서 중국 공산당군조차 노획시 중국현지 생산품은 그냥(...) 버렸다.

그나마 해군은 그 권총을 해군이 사서 (주로 파일럿에 한해서)필요한 장병들에게 나눠주는 식이라도 했지만, 육군은 그 관급 권총조차 부족한 상황에서, 권총이 필요하고 국내 총포상에 대량의 외국산 권총, 그것도 신뢰성 높고 값싼 전투용 권총이 대량으로 유통 중일 때조차 국산품 애용이라는 명목으로 자살행위에 가까운 쓰레기 권총을 자기 돈 주고 사야 했다. 덕분에 미국에서 레지스탕스를 위해 1회용 권총으로 생산한 FP45 리버레이터를 주워다가 권총으로 사용한 일본군 장교도 있었다고 한다.

...이래서야 미국만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전쟁에서 이길 수는 있었을지 의문.
7.5.4 대전차? 그게 뭐지? 
일본군에게 있어서, 전차라는 존재는 그저 보병지원, 더이상의 큰 의미는 없었다.

물론, 어느정도 대전차 라는것의 임무를 상정하고 있기야 했지만, 치하 따위를 중국본토에서 굴리며 “아 이렇게 굴려도 나쁘진 않겠다”-> “아마 다른나라들도 우리들같이 굴릴것이다”(...)라고 착각을 해, 타국에 대해 대전차 및 전차의 중요성 및 인식은 차마 입에 꺼내기 자체가 쪽팔리는 수준이었다.

또한, 말레이 전투에서 성공적인 작전 및, 당시 퍼시벌 중장 휘하의 영국 식민지 치안군을 영국 정규군으로 착각하여 이런 우물안 개구리 자기네들만의 착각은 그대로 못을 박았고, 이와 동시에 전차 운용교리와 전술, 심지어 대전차 전술의 고착과 퇴화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반성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는건 진리다. 정신승리의 말로

일본군 사단의 편제를 볼 경우, 대전차 대대 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는 않는다. 다만 대전차 임무를 수행하는 대전차 중대는 있었으나 평균적으로 보병소대에 배치되는 대전차포라 함은 37mm, 혹은 47mm의 대전차포 4문 정도가 고작이었고 혹은 20mm 대전차 소총이 존재하는 정도였다. 아, 저 일본군 대전차포의 성능이 궁금한가? 37mm 포는 동급의 대전차포중 최약의 관통능력을 자랑하여 영국의 도태장비 2파운더 대전차포보다 못한 물건이며, 47mm 포는 그래도 일본군 최강의 대전차포라는게 포탄이 안깨질 경우에 한해 100m에서 60mm 뚫는게 고작이었다.(...)

이런 병맛나는 관통력이 나오는 것은, 일본의 안습한 철강기술이 큰 이유였다. 당시 일본은 강도가 높은 철갑탄을 제조하는 것이 힘들었도, 치하문서에도 나와있듯, 포탄은 장갑에 착탄할 경우 포탄이 도자기마냥 깨져버리는 일이 많았다. 또한 다른 예로는 포탄이 튕겨져 나가거나, 혹은 미끄러져 튕겨져 나가는 사례까지 있었다. 이는 일본 해군의 경우 APC라는 것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일본 육군은 모르고 있었다. 하긴 사실상 적에 가까웠던 일본해군이 이를 가르쳐줄 리가 없잖아? 그런데도 이런 APC보다도 수중탄에 더 신경쓴 일본 해군이나 육군이나 다를바는 없다

이나마도 중국 본토배치 정예사단의 경우 이런 대전차포가 32문. 태평양전선의 2선급 사단에는 16문. 정작 이렇다할 전차 하나 제대로 없는 중국군에게는 하이 클래스, 넘사벽 괴물 미국을 상대로는 마이너 버전. 미군 전차는 중국군 전차보다 못하다? 뭔가 반대로 된거같은건 여러분의 착각이 아니다. 원래 러시아를 목표로한 영일동맹의 예처럼 일본의 주적은 북방의 소련(러시아)이었다. 오히려 미국은 러시아 견제를 위해 일본을 지원해 주던 입장이었다. 그리고 중일전쟁 당시 중국 본토배치 사단은 러시아를 적으로 두고 훈련받은 부대였다는 것. 하지만 이런 사정을 감안해도 지금 당면한 강적 앞에 2선급 병력과 장비로 상대하겠다는 구상 자체가 웃긴 일일 뿐이다.

당연스럽게 이런 싸구려 대전차포들은 미군 및 영국군 전차를 상대로 전혀 화력을 발휘하지 못 했고, 일본군 입장에서 전차라는 물건은 도로위의 괴물, 악마일 뿐이었다. 심지어 편제 자체도 타국의 대전차 편제에 비해 정말 대전차 편제라고 부르기 민망할 수준의 편제였고 보유수량도 안습, 더군다나 상대인 미군의 경우 보병사단에 약 100여문의 바주카가 배치되어있었으니(...)

무엇보다도, 일본군 높으신 분들의 대전차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는 것은 가히 말할 필요가 있을까? 대전차총검술이라는 병맛스러운 대전차 전술이 자칭 작전의 신 츠지 마사노부에 의해 개발되어 적극 사용되었는데, 이렇다할 활약을 못한 것은 이미 전설 아닌 레전드. 초기 대전차 총검술 이라는 것은 전차의 관측창에 총검을 찔러넣어 전차병을 죽인다 라는 계획이었는데. 당시 미군 및 영국군 전차에는 이미 방탄유리가 관측창에 붙여져 있었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물론 이런 스러운 대전차 전술은 둘째치더라도, 정상적인 대전차 전술을 구사해도 영미의 전차를 까부수는건 정말 힘들었다. 한 예로, 동남아 전선에 배치되었던 마틸다 전차를 상대로 대전차포, 야포, 공병까지 투입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고 결국 성형작약탄을 육탄돌격으로 겨우겨우 마틸다의 측면에 구멍을 뚫는데에 성공을 했으니... 캔뚜껑 하나 따는데 사단 동원할기세 하지만 이마저도 그 마틸다는 수리되어서 또다시 일본군을 유린하고 돌아다녔다.

태평양 전선을 통틀어 이렇게 일본군이 연합군 전차를 격파하지 못하는 경우야 수도 없었으며, 이렇게 되니 야간에 반자이 어택을 해도 끔살, 주간에 탱크 한대만 끌고와도 그걸 못막아 끔살. 결국 일본군은 자연스레 야행성동물으로 변해버릴 수밖에 없었고, 깊은 정글이나 동굴속에 틀어박혀 연합군에게 밀리는 것은 거의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일본군은 산적인가?하는 물음은 둘째치더라도, 과연 제대로 된 대전차 병기와 대전차포 및 대전차 전략 및 전차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박혀있었다면 전차 몇대에 훅 밀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데에 심히 병맛. 실로 전차에 대한 인식 부족과 기술력의 한계, 전술의 한계 등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만들어낸 비극이 아닐 수가 없다.
7.6 알고보면 해군도 덤 앤 더머 
여러가지로 이런 육군보다 활약을 그나마 많이하고 개념은 있어보였으나. 실상적으로 기술력만 놓고 볼 경우 산소어뢰를 제외한 기술에 있어서 일본 해군이 자랑한다는 항공모함이나 전함 역시 육군의 그것과 다를바는 없었다.

그나마 일본의 침략 초기에 가장 높은 성능을 보인 항공모함 역시도, 탄생비화와 설계사상, 성능 모든 면을 놓고봤을때 결코 좋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일본은 태생적으로 항공모함에 관심이 없었다. 함대결전 사상이 뿌리깊게 박혀있던 해군 수뇌부 때문이었는데, 이 해군 수뇌부의 망상을 깨어부수는 것이 바로 워싱턴 해군조약이었다. 이 해군조약에서 일본해군은 88함대라 불리는, 8척의 전함과 8척의 순양전함을 건조해 자신들의 입지를 분명히 하고 영미 해군을 압도할려는 계획이 파토나자, 수많은 일본의 거함거포주의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표면상으로 놓고 봤을 경우, 이건 일본에게 상당한 타격인 것처럼 보였지만, 그만큼 항공모함을 제한배수량 내에서 건조할수 있도록 하고, 또한 일본해군을 미국, 영국 다음가는 세계 3위의 해군으로 올려놓는 의외로 대외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조약이었다. 당시 일본의 한 인사는 "우리가 3이란 비율을 할당받은게 중요한게 아니라 (일본보다 경제력이 훨씬 우월한) 영/미를 5로 묶어놓은게 더 중요한 의의다."라고 핵심을 정확하게 짚었지만 나머지 무뇌아들에겐 씨도 먹히질 않았다. 8척의 신전함과 8척의 신순양전함이 그럴듯해보이지만 과연 당시 일본 경제력으로 이걸 건조/유지할수 있었을까? 하긴 당시 조약에 반발한 일본해군들에겐 "경제?? 그게 뭐지?"정도의 인식밖엔 없었을 지도... 하지만 일본은 이를 자신들이 손해를 보았다고 징징스킬을 시전하였다. 은혜를 모른다

여튼 조약을 어길 수는 없었으니, 기존의 건조중인 순양전함을 설계변경하여 아카기와 카가급을 건조할려고 보니, 기존에 실험 목적으로 운용중이었던 일본해군 최초의 항공모함 호쇼는 둘째치더라도, 자기네들끼리로는 컨셉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 몰라서 난관에 부딪혔다. 결국 영국해군의 커레이져스급 항공모함을 그대로 베껴서 3층의 항공갑판을 가진 항공모함이 탄생했으나, 결론적으로 실패라는것이 드러나버렸다.

우선, 동시에 3대를 날릴수 있다는 것은 좋았으나, 착함할때에는 상부 1층갑판밖에 사용을 할수가 없었고, 또한 격납고가 존재하지 않아 항공기 운영에 큰 차질을 빚었다. 항공기용 엘리베이터도 1,2,3층이 모두 공용하다보니 효율은....... 결국 이렇게 삽질을 저지른 결과, 아카기와 카가를 쓸만하게 개장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미국의 렉싱턴급의 컨셉을 베껴서. 이것들은 귀축영미라고 까면서 좋은거 안좋은거 다 베껴가네

개장된 아카기와 카가는 2층 격납고를 보유하여, 표면적으로는 면적이 넓어져 많은양의 항공기를 보유할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 함재기들의 공통적 문제점인 윙폴딩(날개접기)가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함재기들의 내구성이 취약한데다가 항속거리 확보를 위해서 날개 안까지 연료 탱크를 무식한 방법으로 넣어놓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격납고 용적을 많이 차지해버리는데다 격납고 높이가 낮아서 가면갈수록 대형화되는 함재기를 수용하기가 힘들어졌으며 사실상 2,3층 격납고는 있으나마나한 것이 되었고, 또한 무게중심이 올라가버려 항행성능과 밸런스가 개판이 되고 데미지 컨트롤 능력이 심각하게 뒤떨어졌다. 미해군 항공모함 설계의 뛰어난점은 무기를 장착하는 격납고나 정비고를 개방형으로 만들어 유사시 폭발물이나 항공기를 바다에 투척해 연쇄폭팔을 막을 수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다가 숙련된 선원들의 데미지 컨트롤까지 겹쳐져서 엔터프라이즈같은 불침항모가 만들어긴것이다.

또한 이런 무게중심 문제로 내내 소형 함교만 설치하거나 아예 함교가 없는 항공모함도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항공기 운영과 조타, 데미지 컨트롤 및 각종 명령을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서는 함교의 존재는 필수적인데, 소규모 함교에서는 그 어떠한 대책도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가 없었다.

또한 초창기 일본항공모함들의 공통적 문제인 측면에 부착되어 아래로 향하고 있는 연돌 역시 문제가 되었는데, 연돌에서 나오는 뜨거운 배연은 난기류를 일으켜 항공기의 착함을 방해했는데, 일본해군 기술진들은 연돌을 아래로 향해서 뜨거운 공기가 바닷물에 식으면 난기류가 해결될 것이다라고 생각하였지만. 뜨거운 공기는 무조건 위로 올라간다 라는 기본적인 상식도 모른채 연돌 주위의 선실은 미친듯이 온도가 올라갔고, 연돌에서 빠져나온 열기는 식기는 커녕 여전히 뜨거워서 심지어 항공갑판 바로 위에서 난기류가 형성되어버리는 현상이 발생하고 말았다. 결국 착함도중에 난기류로 수시로 기체들은 전복되거나 착함방향이 틀어져버려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이 문제는 항공모함 류조를 건조하고서도 개선은 커녕 오히려 너무 비대하게 큰 격납고 때문에 최악의 능파성과 수밀성, 데미지 컨트롤 이라는 삽질만 저질러버렸다.

이 문제는 소류급을 건조하면서 슬슬 개선이 되기 시작하였으며 궁극적 설계의 완성은 히류급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설계의 정점은 쇼가쿠급에서 이루어졌지만, 태평양건너 미국에서는 이미 위의 뻘짓을 전간기에 레인저급 1척으로 실험해본다음 바로 희대의 명작 항공모함인 요크타운급을 건조해냄으로써 여전히 설계사상 및 스펙 등은 미국 항공모함을 뛰어넘지 못했다.

미국 항공모함을 뛰어넘지 못했다는 것도 암울한데, 일본 항공모함의 특징이라 할수 있는 2층 폐쇄식 격납고는 피격시에 엄청난 문제를 일으켰다. 층수가 2층이니 입는 피해는 두배이며, 폭탄이 격납고에서 폭발할 경우 그 폭압과 파편 피해는 폐쇄식 설계 때문에 고스란히 데미지를 100% 받아버리며, 설령 화재 진압을 한다 하더라도 불 붙은 항공기나 기자재, 탄약, 항공유 등을 버릴수가 없어 화재는 미칠듯이 번져나갔다. 또한 운 더럽게 엘리베이터가 고장날 경우 각종 기자재를 못 치워서 일어날 카오스에 대해서는...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런 문제는 무게 중심까지는 벌지를 부착하거나, 설계를 여유적으로 해서 무게중심은 잡아도, 궁극적 문제인 데미지 컨트롤에 대해서는 끝끝내 해결되지 못하였다. 이뭐병... 물론 건조수량에 비해서 미국과 비교를 하자면 그야말로 처참한 수준이었고, 결국 상선이나 각종 잡배들을 항모로 개조시키면서 항공모함 보유수를 늘리려고 했지만 무다무다...

결국 무게중심 문제를 끝까지 해결못했고, 전쟁중 누적된 데미지 때문에 일찍 퇴역하였으나 현대 항공모함의 기본적 특징인 항공갑판의 장갑화를 남긴 영국 항공모함, 현대 항공모함 그 자체인 미국 항공모함과는 달리, 일본 항공모함은 이들에 비하면 어떠한 장점이 없어서 결국 도태되고 후세에 자신들의 특징을 남기지 못해 영영 멸종하고 말았다.

전함의 경우도 영국의 영향을 받고, 라이온급 순양전함을 개량한 공고급 순양전함을 도입함으로써 일부 부분에 있어선 상당히 발전한 설계사상을 갖고있었다. 하지만, 뒤떨어지는 탐지시스템과 구질구질한 성능의 레이더, 심지어 후소급 전함같이 레이더가 아예 없는 경우도 있어서 전투시 적함을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이 불가피했고, 이에따라 함상구조물은 미친듯이 올라가버려 무게중심이 병맛 오브 병맛을 자랑했다.

거기에 정작 함포 개개의 성능은 괜찮은 편이고, 공산오차가 적어 탄착군 형성이 우수한데도 불구하고, 지나칠 정도로 수중탄의 개념에 집착한 탓에 신관은 수시로 트러블을 일으켰고, 적함에 직접 명중해도 신관이 작동하지 않아 불발율만 올라가버렸다.

또한 일본 전함들은 야마토급 이전의 전함들은 데미지 컨트롤에 대한 정성이 심히 부족했는데, 심지어 준수한 성능이라는 공고급과 나가토급에까지 함선 측면에 케이스메이트 포곽식 함포가 존재했을 정도니 일부 구획에 있어선 그야말로 종잇장같은 장갑을 가지고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으며, 그만큼 위험피격구획이 많으니 탄약고가 터져 화재가 발생할 확률은 극도로 높다는 것이다.
다만 공고급은 1차대전 전에 영국에 주문하여 설계/건조된 배이다. 당시 공고와 같은 시기에 건조된 대부분의 배들도 저런 방식이었다. 나가토역시 1차대전 중에 설계/건조된 배고 2차대전전까지 미친듯이 개조해 장갑을 강화(화력은 처음부터 410mm 주포를 장비해 강력했고 기동성도 처음부터 매우 뛰어나 미친듯이 장갑을 처발라 배무게가 늘어남에도 동시기 건조된 영/미의 동급함보다도 여전히 빨랐다. 데미지 컨트롤에 대한 정성이 부족한건 맞지만 적어도 2차대전시기의 신전함과 비교해 설계면에서 떨어지는 부분을 까는건 이들 전함들이 1차대전형 전함이라는걸 어느정도 감안해야 한다. 물론 2차대전 전까지 수차례 개장공사를 했음에도 장갑을 덧붙이는데만 신경썼지 이런 취약점을 개선하지 않은 것은 문제지만...

거기에 일본 전함의 주포 탄약보관은 영국의 코다이트식 장약과 영국식 보관법을 그대로 베껴버리는 삽질을 저질렀다. 1차세계대전 당시, 영국 해군 순양전함의 폭침에 대해 코다이트식 장약과 보관법이 큰 문제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걸 일본이 멋모르고 베껴버린 것. 이렇게 되어버리니 탄약고 유폭은 피할수가 없었고, 데미지 컨트롤 능력은 바닥을 기었다. 또한 함상구조물이 쌓아놓은게 많으니 조금만 경사를 줘도 배가 홀라당... 안습. 이때문에 뻑하면 탄약고에 불이 붙어서 펑, 혹은 제풀에 못이겨 펑 해버리는것은 일본 전함의 종족 특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도 모자란데 함선의 격벽을 고정하고 있는 것 역시 용접이 아닌 리벳이라 격벽의 내구력이 심각할 정도로 뒤떨어졌고, 심할경우 격벽이 수압을 못이겨 차례차례 무너져내리는 일까지 있었다. 보통 침수를 막는 작업은 격벽이 버티면서 시간을 벌어주고, 그시간에 수병들이 지지대를 설치하거나 물구멍을 막는 식으로 이루어져야 했지만 일본 전함은 그것이 안되더라는 얘기. 어쩌라고?

또한 자기네들이 진주만 공습 때처럼 항공모함을 굴리는데도 야마토급을 제외하면 방공에 대한 개념 자체가 존재하질 않아 항공기만 오면 알아서 기어야 했다는 것도 큰 문제. 그나마도 그 대공포들은 자동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모든 것들이 사람의 손으로 조작하고 장전해야 했으니 그 대응능력과 효율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거기에 비장갑, 오픈탑 구조를 이룬 노천식 대공포들도 혼재해 있었기 때문에, 갑판에 적 전투기가 기관총질만 해줘도 피바다가 펼쳐졌다. 대공포 성능 역시 위력, 장전속도, 엘레베이션 트레인, 회전속도 등 모든면에서 심각하게 뒤떨어져, 가면 갈수록 빨라지는 항공기들에 대해 대응을 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래가지고 제대로 싸운다 라는 개념이 성립을 하는건지부터가 의심이 간다.
7.7 일본 내부의 국가인 육군과 해군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육군과 해군 사령부 사이가 거의 적군에 가까울 만큼 나빴다는 것이다.

일본의 육군과 해군은 원래부터 기원이 다르며, 지역적 기반도 달랐다. 메이지 시대에 초기에 육군이 주로 조슈번 출신이 장악한데 반해, 해군은 사츠마번 출신이 장악했으며, 두 번은 메이지 유신때 동맹을 이뤄 막부를 타도하기도 했으나 역사적으로 항상 으르렁거리던 사이였다. 이랬으니 육해군이 따로따로 논건 명약관화. 물론 러일전쟁 당시 총사령관인 육군원수 오야마 이와오는 사츠마번 출신이기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해군에서 각각 조슈와 사츠마 출신들이 대부분의 고위직을 독점하였으며, 고급 장교를 양성하는 육군대학교-해군대학교가 생기고 나서야 특정 지역 출신 우대 승진 관행이 사라진다. 그럼에도 태초부터 생긴 해군과 육군의 적대관계는 해소되지 않았다.

양측을 최종적으로 지휘하는 합동 사령부 따위는 끝끝내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사실상 서로 다른 전쟁을 수행한 셈이다. 원래는 덴노라고 불리는 일왕이 양군을 통제하는 총사령관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일왕은 법률상 자리에 앉아서 아무것도 안하니 서로 따로 놀 수밖에 없다. 전투기나 장비조차도 똑같은 걸 서로 따로 개발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 그 예로 해군 전투기 제로센과 육군 항공대 전투기 하야부사는 모양이나 성능이 거의 판박이다. 덕분에 제로센은 함재기에게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있는 '날개 접기'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항모의 엘리베이터에 닿지 않게 끝만 아주 살짝 접히는 정도여서 날개가 짧아진 후기형에서는 생산성을 위해서 날개접는 것을 포기해 버릴 정도였다. 적국인 미국에서는 내륙에서 교전한 하야부사도 그냥 제로센으로 보고됐을 정도로 별로 차이가 없었다.

그나마 기종을 따로 만든 건 미 육군항공대와 해군도 하고 있던 짓이니 차라리 양반이지만, 더 심한 것은 사용하는 무기와 그 탄약 등의 보급체계를 스스로 어지럽힌 것이다. 항공기용 무장만 치더라도, 미군은 육군 해군 차이 없이 브라우닝 50구경으로 통일하는 판에 육군과 해군은 50구경급 중기관총이나 20mm급 기관포 등을 모조리 따로따로 개발하는 추태를 저질렀다. 그것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게다가 탄약도 호환되지 않는다. 똑같은 7.7mm 총탄인데, 육군 것과 해군 것은 규격이 달라서 호환되지 않는다. 이뭐병...

심지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의 전투기 제작을 도왔던 독일인 기술자에 의하면, "일본에는 해군과 육군이라는 두 국가가 존재한다. 그 둘의 관계는 전쟁 중인 국가의 군대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라고 자신의 수기에 남기기도 했다(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 中 인용).

육군의 작전은 해군이 몰랐으며, 육군 역시 진주만 공격을 해군에 심어둔 스파이에게 들어서 알았다고 하니 이는 그야말로 막장의 최종단계이다. 심지어는 전쟁선포 권한조차 육군과 해군에 독자적으로 있었다고 한다. 즉,정부와 해군이 모르는 상태에서 육군 혼자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단 이야기.

심지어는 최고 지휘조직과 지휘관의 명칭까지도 서로 같은 것을 쓰기 싫다고, 육군은 참모본부/참모총장, 해군은 군령부/군령부총장이라고 각각 다른 이름을 붙일 정도였다.

이 불화는 육군 항공모함과 육군 잠수함이 나올 때쯤 백미를 이룬다. 일본 육군이 일본 해군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자체적인 잠수 수송함을 제작하여 육군간의 해상 보급에 이용하려 개발하고 실제로 배치하기까지 했던 것(…).

일단 육군잠수함의 목적은 고립된 섬 지역의 수비대에게 보급품을 수송하기 위해서 잠수함을 만들었는데, 이러한 배를 굳이 건조하겠다고 나선 것은 "해군의 전투용 잠수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육군의 나름의 배려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문제는 조각배도 제대로 만든 적이 없는 육군이 잠수함을 만들려니 개념도 잡지 못했다는 것, 결국 해군이 도와줘서 제조를 간신히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수송용 잠수함의 건조는 기관차 제작공장에서 했다고 한다. 제대로 된 배를 건조하는 모든 조선소는 해군의 군함 건조와 미군에게 격침된 수송선의 보충에 여념이 없어 육군 잠수함 따위를 만들어줄 여유가 없었기 때문. 그나마 기관차 공장은 "길다란 쇠통"을 만들어 본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그럭저럭 쓸 만한 물건이 나왔다고 한다.

여기에 연안작전에 쓰겠다며 자체적인 항공모함(…)까지 제작했으며, 이 항공모함의 용도는 상륙병력 및 상륙정을 탐재하고 이들에 대한 근접지원을 위한 항공기를 탑재하므로 사실상 오늘날의 강습 상륙함과 같으므로 해군도 어느 정도 목적을 이해하고 도와주긴 했다지만 이 정도면 사실상 다른 나라 군대라고 해도 다를 바 없다. 최종적으로는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조차도 육군의 2호연구와 해군의 F연구로 각각 진행되다가 기초연구도 끝나지 않은 상태로 종전크리.

이러한 문제는 자원 하나 없는 섬나라가 전쟁하는 데는 당연히 치명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군비가 2배로 들어가기 때문에 자원도 2배로 들어가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전쟁 재정의 압박이 심해져서 제대로 된 장비 지급조차도 되지 못하고 전투력 증강을 위해 다시 따로따로 무기를 개발하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극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 외에도 육군과 해군은 태평양 전쟁 기간에 점령한 동남아시아의 유전을 각각 따로따로 배정받아서 각자 자기가 보유한 정유시설로 직접 정유해서 사용했다. 태평양 전쟁의 그 극심한 석유부족 속에서도 일본군에게는 이 방법 이외에는 없었던 것이다.

해군이 객관적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태평양 전쟁 개전을 적극 지지한 이유도, 중일전쟁 이래 화려하게 언론에 주목받는 육군을 질투해서라고 한다. 명목은 자원확보였지만, 육군만 전선에서 화려하게 승전보를 올리는걸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결국 질투에 눈이 멀어 가망없는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물론 태평양전쟁의 가장 큰 이유는 석유이긴 하다. 석유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수입하고 쓸만한 유전이 없는 상황에서 금수조치가 이뤄지자 동남아에 있던 유전이 탐나기 시작했고 태클걸 미국에게 선빵때려서 태클못걸게 만든다고 전쟁일으킨게 바로 태평양 전쟁이다. 문제는 그 석유를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것이 일본 해군이었다는 점이고, 결론은 자기가 필요하니 이유 붙여서 국가를 막장으로 이끈 셈.
7.8 우가키 군축의 허상 
육군의 경우, 원래 일본육군이 메이지 시대부터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사단 정수는 평시 상비 25개 사단 전시 50개 사단이었다. 1921년까지 일본육군은 "현실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고 여기던 21개 사단까지는 확보하는데 성공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에서 나타난 현대전의 모습을 보고선 신장비들을 도입하여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산의 한계상 제대로 된 편제를 갗춘 부대를 만들 수는 없었다.

우가키 군축은 바로 평시 21개 사단을 17개 사단으로 줄이는 대신 4개 사단분 만큼의 예산을 현대적인 장비로 무장한 신규 부대를 창설하는 비용으로 돌리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평시에 감축된 사단을 운용하는 간부인원만 유지했기 때문에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급팽창된 사단들에게 배속시킬 장교 및 하사관 인원이 태부족/질적 저하를 부르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특히 일본육군의 장교교육제도상 제대로 된 장교교육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참모교육을 받은 장교의 부족이 심각했다. 사단 감축으로 인해 이들 부대에 배속되던 참모인원까지 줄여버리면서 육군대학의 학생정원까지 동시에 줄여버렸기 때문이다. 1차대전 패배 이후의 군대 축소에도 장교집단의 유지에 노력한 독일과는 정반대이다.

게다가 우가키 군축이 관동대지진과 겹치는 바람에 현대화를 위해 기존의 예산을 유지하면서 사단수를 삭감하려던 계획이 삭감된 사단의 예산이상으로 육군총예산이 삭감당하면서 예산절약을 위해 탄피회수에 광적으로 집착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 정도가 지나쳐버린 나머지 만주사변 기간동안 일본군 보병들은 교전중인데도 한 번 사격한 후에 탄피를 줍는다고 법석을 떠는 희한한 광경을 자주 보였다. 한국군도 역시 이 전통을 이어 받았다. 그나마 현대의 한국군은 예산보다는 실탄유출로 인한 총기사고나 범죄 발생 등을 방지하기 위한 성격이 강하다. 탄피를 수거해야 실탄 소모량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계량할 수 있기 때문에.
7.9 일본군 잔당들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태평양 전선에 투입되었던 일본군들 중 일부는 일본의 항복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통신 두절로 인해 일본의 패망을 통지받지 못하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종전 후에도 계속 무장을 해제하지 않은 상태로 70년대 중반까지 활동하고 있었다. 이쯤 가면 이게 군대인지 산적떼인지 구분이 안갈 지경. 물론 현지 군대나 경찰들과의 총격전 끝에 많은 수가 사살되거나 항복하였고, 일부는 대동아공영권을 실현하겠답시고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나 인도차이나 독립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로 1974년 필리핀에서 생환한 육군 소위 오노다 히로(小野田寬郞) 같은 사람들이 있는데, 이 양반은 패전 소식을 들었는데도 패전을 인정하지 못하고 종전 후에도 계속 숨어있다가 직속상관의 투항명령서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투항했다. 이 사람은 숨어지내는 동안 생존을 위해 주변 마을 사람들을 여럿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으나, 물론 일본의 우익들은 그런 사소한 문제는 개의치 않고 이 양반을 빨아댔음은 말할 것도 없다. 참고로 이 양반은 음식을 훔치다 들키면 목격자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였다. 그것도 1960년대에!! 필리핀의 일본차관 유입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 지 모를 인간이다.
7.10 기타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등에서 언급되는 안습전설 등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군이 보인 추태가 까이는 편이긴 하지만 사실상 그 이탈리아군보다도 더 허접했고 비효율의 극치인 일본군이 보여준 추태보다는 덜하였으며 저 이탈리아 안습전설 등이 상당히 왜곡돼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 중국같은 아시아 이웃나라를 제외하고는 놀림감이 되지 않는 편이 이상하다. 이탈리아군이 남자의 로망을 느끼게 해주는 여럿 잘 싸운 전투로 다시 재조명을 받는데도 여전히 놀림받는 경우가 많은 걸 보면 이상한 일.

여담이지만 아직 일본군의 흔적이 서울에 남아 있다. 보통 사람들은 보기 힘들지만, 바로 용산 미군 부대 안의 건물들. 이 안에서 벽돌로 만든 건물들은 일본군이 만들었던 것들인 경우가 많다고 하며, 대부분 병영으로 사용되던 건물들이다. 2010년 기준으로 아직도 일본군의 별과 장식이 달려있는 건물도 발견할 수 있다.

최근 서울 마포구에 있던 일본군 장교관사를 8억 들여 이축, 복원한 일로 논란이 되고 있다. #

게게게의 키타로로 유명한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의 작품 중 전쟁경험을 바탕으로 한 만화들이 있는데 거리낌없이 묘사되는 당시 일본군의 막장행태를 잘 알 수 있으므로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 작가 미즈키 시게루는 지옥과 같은 동남아시아 전선에 파병되었으며 왼팔을 잃기도 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돌아왔으므로 어설픈 동경이나 자기합리화가 아닌 생생한 당사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 일품이다.

여담으로 엔하인들의 지대한 관심으로 인해 일본군 항목은 모든 군대항목중 미군을 제외하면 가장 길다. 흠좀무
8 관련항목 
8.1 일본군 주요 인물들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볼 수 있다.
8.1.1 '정치에는 상관없는' 순수한 군인타입 
제국주의 정책에도 찬성하지 않고, 한국도 그다지 괴롭히지 않은 순수하게 '군인'으로서 적과 싸운 드문 인재들. 비록 일본군의 간부들이라 철천지 웬수라 할 만하지만, 군인으로선 배울 만한 점이 있는 사람들.

이 사람들 대부분은 출세하지 못했다. 수송선단을 지휘하던 중 미군을 만나자 손실을 거의 입지 않고 성공적으로 재빨리 후퇴했는데, 왜 후퇴했냐는 이유로 질책을 당한 사람도 있으니(...) 수송선으로 미군 전투함을 격침시키란 말인가?
8.1.2 애매모호한 타입 
제법 유능하고 부하들에게 인망도 있으나 제국주의에 찬성하고 가끔 병크도 터트리는 사람들.

8.1.3 군국주의자 타입 
능력이 좋았건 나빴건,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정책을 밀고나간 그야말로 나쁜 놈들. 실제로는 능력도 좋은 놈들이 별로 없다. 아니, 우선 군국주의에 매료당했다는 시점에서 이미 인증무능하다. 도조 히데키를 위시한 삼간사우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8.1.4 인간 쓰레기 
세상 어디가도 듣도 보도 못한 그야말로 캐막장 인간 쓰레기. 이러한 작자들이 군에서 요직에 오르다니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다.

8.1.5 대한민국 건국 유공자 수준 
미군도 전범 재판에 부르지 않을 정도. 이뭐병...츠지 마사노부를 제외하면 아래 맴버들은 일본내에서 삼대오물이라고 해서 가루가 되도록 까고 있다.

8.1.6 기타 
    홍사익: 일본군 중에 전범으로 처형된 유일한 조선인 장성.
8.2 일본군 관련 각종 학설 
9 일본군의 무기체계 
9.1 육군 
9.1.2 기갑, 차량 
모 전차게임에 이 불쌍한 일본군 전차들이 등장할 예정이라고 한다.지못미
9.2 해군 
9.2.1 함선 
    전함
      야마토급(야마토大和, 무사시武藏, 3번함 시나노는 항모로 전용, 4번함은 취소)나가토급(나가토長門, 무쓰陸奧)이세급(이세伊勢, 휴가日向)후소급(후소扶桑, 야미시로山城)공고급(공고金剛, 히에이比叡, 하루나張名, 기리시마霧島)
    항공모함
      아카기(赤城)류조(龍驤)가가(加賀)소류(蒼龍)히류(飛龍)쇼가쿠(翔鶴)즈이가쿠(瑞鶴)시나노(信濃)가쓰라기(葛城)호쇼(鳳祥)
    중순양함(1등 순양함)
      후루타카급(후루타카古膺, 가코加古)아오바급(아오바靑葉, 키누가사衣笠)묘코급(묘코妙高, 아시가라足柄, 나치那知, 하쿠로羽黑)다카오급(다카오高雄, 아타고愛宕, 마야摩耶, 초카이鳥海)모가미급(모가미最上, 미쿠마三隈, 스즈야鈴谷, 구마노熊野, 도네利根, 치쿠마筑摩)
    경순양함(2등 순양함)
      덴류급(덴류, 다츠다)쿠마급(쿠마, 타마, 기타가미, 오오이, 키소)나가라급(나가라, 이스즈, 나토리, 유라, 키누, 아부쿠마)유바리급(유바리, 센다이, 진쓰, 나카)아가노급(아가노, 노시로, 야하기, 사카와)오요도급(오요도)
    미네카제급 구축함
    미네카제, 사와카제, 오키카제, 시마카제, 나다카제, 야카제, 하카제, 시오카제, 아키카제, 타치카제, 호카제, 노카제, 나미카제, 누마카제
    가미카제급 구축함
    가미카제, 아사카제, 하루카제, 마츠카제, 하타카제, 오이테, 하야테, 아사나기, 유우나기무츠키급 구축함
    무츠기, 키사라기, 야요이, 우즈키, 사츠키, 미나즈키, 후미즈키, 나가츠키, 키쿠즈키, 미카즈키, 모치즈키, 유우즈키후부키급 구축함(吹雪)하츠하루급 구축함
    하츠하루, 네노히, 와카바, 하츠시모, 아리아케, 유우구레시라츠유급 구축함
    시라츠유, 시구레, 무라사메, 유우다치, 하루사메, 사미다레아사시오급 구축함
    아사시오, 오오시오, 미치시오, 아라시오, 아사구모, 야마구모, 나츠구모, 미네구모, 카스미, 아라레가게로(陽炎)급 구축함
    가게로, 시라누이, 쿠로시오, 오야시오, 하야시오, 나츠시오, 하츠카제, 유키카제(雪風), 아마츠카제, 토키츠카제, 우라카제, 이소카제, 하마카제, 타니카제, 노와키, 아라시, 하기카제, 마이카제, 아키구모유우구모급 구축함
    유우구모, 마키구모, 카자구모, 나가나미, 마키나미, 다카나미, 오오나미, 키요나미, 타마나미, 스즈나미, 후지나미, 하야나미, 오키나미, 키시나미, 아사시모, 하야시모, 아키시모, 키요시모아카츠키급 구축함
    아카츠키, 테루즈키, 스즈츠키, 하츠즈키, 니이즈키, 와카츠키, 시모츠키, 후유츠키, 하루츠키, 요이즈키, 나츠즈키, 미치즈키, 하나즈키시마카제급 구축함마츠급 구축함
    마츠, 타케, 우메, 모모, 쿠와, 키리, 스기, 마키, 모미, 카시, 카야, 나라, 사쿠라, 야나기, 츠바키, 히노키, 카에테, 케야키타치바나급 구축함와카타케급 구축함자살특공병기
    잠수 항모 I(伊)-400급
9.3 항공병기 
    A5M 96식 함상전투기A6M 제로센 -해군 항공대의 주력 전투기. 일명 동양의 신비 혹은 날아 다니는 불쏘시개 구일본군 약소열전3C6N 사이운G4M - 원샷 라이터란 이명을 지녔던 해군 항공대의 주력 육상공격기G10N 후가쿠: 만들어질 했던 폭격기H8K - 일본군 기체인데도 상당히 뛰어난 성능을 보여줬다.J7W 신덴 -이름만 유명한 2대 만들어진 비행기J8M(Ki-200) 슈스이 - 독일의 Me163을 참고로 제작된 일본군의 로켓추진 전투기J9Y 깃카 - 독일의 Me262를 참고로 제작된 일본군 최초의 제트 전투기Ki-43 하야부사 -육군 항공대의 주력 전투기Ki-44 쇼키 -다른나라가 봤을땐 그럭저럭 하는데 일본군 입장에선 기동성이 후달려서 쓸데가 없던 비행기Ki-61 히엔 -잘 만들었다. 그러나...Ki-84 하야테 -시도는 좋았으나...Ki-115 츠루기 - 무장은 폭탄 한 발.N1K 교푸
    Q1W 토카이
9.4 일본군 관련 링크 

이런 상 병x 국가에게 나라를 뺏겼었다니.. 원통하다... ㅠㅠ

한줄요약 - 태평양 전쟁은 구일본육군과 구일본해군의 누가 누가 삽질을 더 잘하나 내기의 결과물..
추천  8

이런 글은 어떠세요?

 
'ㅅ' 너무 길어서 스크롤 내리고 한 줄 요약만 본 사람 ... 손
12년 전
SSEN  수1
손...
12년 전
찌찌티비  찌간을초월하는쪼녀
발...
12년 전
뀰벌레  뀰뀰!

12년 전
지극히주관적  내 생각은

12년 전
손....
12년 전
난패기있게!!광탈했지..  내점수뻐큐머겅
팔.....
12년 전
LVGD  야이놈아
아무튼 일본이 별로 잘난것도 없으면서 전쟁 걸었다 이거 아님?
12년 전
로그인 후 댓글을 달아보세요
 
카테고리
  1 / 3   키보드
닉네임날짜조회
이슈·소식 "나 살해당할 거 같아…죽으면 장례 치러줘”185 옹뇸뇸뇸05.27 20:22103811 17
유머·감동 들 갈데까지 간듯한 "같이 준비하는” 프로포즈151 NUEST-W05.27 18:03102804 5
할인·특가 가격 인상후 유튜브 프리미엄 끊고나서 느낀 장점184 308679_return05.27 17:3295106 35
유머·감동 아니 근데 민희진 개질투남.twt276 세기말05.27 18:0790545
팁·추천 그리워하는 사람 많은 넷플릭스 초기 작품들191 수인분당선0:4654650 31
CNN선정 세계 최고의 드링크 순위11 갱스터병아리 06.07 15:44 1513 11
故 김광석 타살의혹, 故장자연-이미숙 관계 등 이상호 기자 폭탄 발언 '충격'7 샹근이 06.05 18:22 989 7
하 덜덜한 소말리아!2 햄토리 05.25 17:34 864 2
CN] 한국이 불법조업 中어민에게 총기를 사용한다고? 中네티즌 반응10 안드레이 아르 05.25 00:46 623 9
세계 범죄조직들.jpg8 피자돈까스 05.20 01:18 7444 8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7 밀면 05.17 18:34 865 7
세계 범죄조직들.jpg9 BFA 05.15 22:54 7488 11
세계에서 가장 치안이 위험한 나라..ㄷㄷㄷ.jpg5 신바라기 05.14 13:24 2180 5
제2연평해전 박동혁 병장 치료한 군의관 글7 안재효(23. 신 05.06 01:11 3549 7
한 순간의 희생과 용기가 영웅을 만든다2 갱스터병아리 04.21 05:36 987 2
세계에서 제일 비싼 1위~10위 호텔 하루밤 가격2 피자돈까스 04.16 05:22 886 2
요코하마 초등학교 빗물저장소 16800베크럴 세슘검출9 미남미노미친 03.30 01:34 1237 9
하 덜덜한 소말리아!11 삑뱅☆ 03.22 17:40 901 11
세계 범죄조직들.jpg3 팬덤 03.13 14:32 10279 9
세계에서 가장 치안이 위험한 나라..ㄷㄷㄷ.jpg8 김재중 (27) 03.06 01:14 1969 9
딥웹의 허와 실 (스압주의)10 핥핥 해치지 않 02.03 08:43 52581 18
엔하위키에서 일본군을 키워드로 검색해 봤더니...8 혀기혀기얌 01.14 01:41 4240 8
세계 범죄조직들.jpg28 엠아비스트 01.05 20:00 6657 27
세계에서 제일 비싼 1위~10위 호텔 하루밤 가격4 z2ginw 12.25 06:18 2074 4
주중 韓대사관, 공기총 추정 쇠구슬 피격3 시스(SiS) 12.14 20:38 1747 3
전체 인기글 l 안내
5/28 10:10 ~ 5/28 10:12 기준
1 ~ 10위
11 ~ 20위
1 ~ 10위
11 ~ 20위
유머·감동 인기글 l 안내
5/28 10:10 ~ 5/28 10:12 기준
1 ~ 10위
11 ~ 20위
1 ~ 10위
11 ~ 20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