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금: Trine Soundtrack - 17 Main Theme
지난 편 내용) 꺼져가는 불씨였던 로마제국을 무너트린 게르만족. 이들은 유럽의 주인이 사라진 기회를 틈타 서유럽 땅에 너도나도 왕국을 세웠습니다.
프랑크족(게르만족 일파) 왈
: "나 왕 할래. 이제 서유럽은 내 거야. 으헿헿"
고트족(게르만족 일파) 왈
: "너만 왕하니? 나도 이탈리아, 에스파냐에서 왕 할 거임"
반달족, 앵글로색슨(게르만족 일파) 왈
: "욕심쟁이들 ㅋㅋㅋㅋ 그럼 북아프리카와 브리타니아는 내 땅!!"
그리하여 게르만족에 의한 서유럽판 땅 따먹기 삼국지가 시작되죠. 게르만의 후예들은 자신들의 땅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아니요. 게르만 일파 중에서 프랑크족, 앵글로색슨 족을 제외한 모든 부족은 결국 멸망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땅을 지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 듯 합니다.
살아남은 게르만 일파들은 훗날 새로운 역사의 서문을 열게 됩니다. 특히 프랑크 왕국은 동쪽의 동로마(비잔티움) 제국과 유럽을 양분하며 큰 번성을 누리며 '고대의 르네상스'를 이끌죠.
하지만 프랑크 왕국의 번영은 오래가지 못했어요. 이들은 곧 3개의 독립적인 나라로 쪼개졌는데, 서쪽은 오늘날의 프랑스, 남쪽은 이탈리아, 동쪽은 독일의 전신이 됩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이야기할 주제가 바로 동프랑크 왕국의 미래, 즉 오늘날 독일의 토대를 이룬 '신성 로마제국'입니다. 많이 들어 보셨죠?
단언컨대 신성 로마제국은 중세 유럽의 역사를 통틀어서도 매우 중요한 나라 중에 하나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지 지금부터 이들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시작해 볼게요.
▣ 신성 로마제국
: 너희는 무슨 나라??
이를 제대로 알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동프랑크 왕국의 '하인리히 1세(873 - 936)'입니다. 진정한 독일의 역사는 바로 이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죠.
919년 동프랑크 왕국.
하인리히 1세가 왕위에 오릅니다.
원칙대로라면 그는 왕이 될 수 없던 사람이었어요. 왜냐하면 그는 정통 왕족 출신이 아니라 '작센(오늘날의 독일 동부의 주)'을 근거지로 둔 호족 출신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동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는 완전히 분열되었던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콘라드 1세가 자식을 못보고 사망합니다. 그리하여 차기 국왕 후보로 작센의 하인리히 1세가 최종 낙점되죠.
하인리히는 매우 주도면밀하고 현명한 국왕이었습니다. 10세기 당시 잉글랜드는 중앙집권적인 사법 체계와 화폐 제도를 구축하고, 상업을 발달시키는 등 매우 효율적으로 통치를 하고 있었는데요.
하인리히 1세 왈
: "우리가 잉글랜드처럼 번영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해서 영토를 넓혀야 함"
그는 작센 왕권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카롤링거 왕조가 그랬던 것처럼) 활발한 정복 활동을 활발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변 세력들을 차례로 침공하여 정복했고, 동프랑크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게 되죠. 그 결과, 그는 10세기 유럽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하인리히 1세가 기반을 닦아놓고 죽자, 그의 아들인 '오토 1세(912 - 973)'는 정적들을 제거하고 주변 슬라브족을 개박살내며 이탈리아 반도까지 탐하게 되죠.
동프랑크 왕국이 서,중부 유럽의 깡패로 등극한 순간이었어요. 이탈리아를 정복하기 시작한 오토 1세가 그 다음으로 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오토 1세
: "이제 황제로 등극해야 할 때가 온 것 같군. 여봐라~ 교황을 들라 해라"
당시 로마의 교황은 '요하네스 12세'였습니다. 오토 1세는 962년 2월의 이탈리아 원정 기간 도중, 요하네스 12세에 의해 로마 황제에 즉위합니다.
하지만 요하네스 12세는 자신의 당파 싸움에서 오토 황제를 이용하려 합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오토는 교황을 폐위하고 새 교황으로 갈아치웠죠.
어쨌든 오토 1세는 비로소 대제가 되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바로 '신성 로마제국'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토 1세는 로마의 황제로 올랐지만, 여전히 그는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신성 로마제국이라는 명칭은 오토 1세의 후대에 붙은 것이죠.
지배해야 할 영토가 점점 커지자, 오토 대제는 심각한 고민이 하나 생깁니다.
오토 대제 왈
: "로마(이탈리아)에 계속 눌러 있고 싶긴 한데, 작센(오늘날 독일의 지방)에서 언제 반란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어떡하냐능?"
상황은 이러했습니다. 이탈리아에 너무 오래 머무를 경우, 본토에서의 권위는 무너집니다. 또 반대로 본토에 집중하자니 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이 떨어지죠.
더구나 당시 북부 이탈리아에는 급성장하고 있는 독립적인 세력들이 즐비해 있었기 때문에, 이 도시들을 한번에 통제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그는 어떤 방법을 썼을까요? 중세 시대, 지도자가 권력을 얻는 매우 효율적이고 빠른 방법이 한 가지 있었는데요.
그것은 당시 교회의 지배권을 활용하는 것이었어요. 즉 교회를 손아귀에 넣어 교회의 대주교나 주교, 심지어 교황까지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이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죠.
또한 황제가 통치 지역 모두를 직접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지방 귀족들에게 독자적인 군사력을 키우고, 자신의 관할 구역을 통제하도록 했죠.
물론 지방 귀족은 황제나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해야만 했고, 그 보상으로 땅과 돈을 받았습니다.
오토 1세 집권기에 고착화된 이러한 지방 통치 방식은 점차 제도화되었고, 귀족과 영주는 관할 내에서 하나의 사회적 공동체를 형성하게 됩니다.
즉 국가의 통치 방식으로 '봉건 제도'가 정착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교회와 수도원의 영향력을 키워, 교회가 나라 안팎의 정치에 깊숙이 개입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죠.
오토 1세에게는 이러한 방법들이 최선이었겠지만, 사실 이로 인해 그의 후계자들은 큰 곤욕을 치러야 했습니다.
교회와 권력을 나눠 갖게 되면서, 교황과 황제 사이에 잡음이 생겨 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야흐로 '황제 VS 교황'의 전쟁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죠.
▣ 황제와 교황의 갈등
: 최후의 승리자는 누구였을까?
신성 로마제국 초기의 황제인 오토 1세와 하인리히 2세는 '작센 귀족 출신'이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하인리히 2세에게는 자식이 없었어요.
그가 죽자, 또다시 황제의 자리를 두고 치열한 후계자 전쟁이 시작되었죠. 황제로 최종 낙점된 사람은 '콘라트 2세(990 - 1039)'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작센 왕조는 동프랑크 왕이 황제로 업그레이드 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대가 끊기게 되자 겨우 2명의 황제만을 배출하지 못하며 결국 지방 귀족 신세가 되죠.
콘라트 2세의 왕조는 후일 '잘리어 왕조'라고 불렸습니다. 그의 아들인 '하인리히 3세(1017 - 1056)'는 당시 매우 어렸던 하인리히 4세를 남기고 일찍 사망했는데요.
이 시점부터 황제의 권력은 미끄럼틀을 타게 됩니다. 어린 하인리히 4세가 통치하게 되자 각지에서 작센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어린 왕과 교황 사이의 갈등은 점점 깊어져만 갔죠.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왈
: "이 어린 황제 녀석아. 너가 뭘 안다고 주교를 임명한다 그러냐?"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황권의 세력을 키우는 동시에, 황제의 주교 임명권을 박탈하려 했죠.
그러나 하인리히 4세는 이를 거절했고 오히려 그를 교황직에서 내쫓으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자 빡친 교황은 작센 귀족과 동맹을 맺고, 하인리히 4세를 교회에서 파문시키고 황제를 폐위시키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중세 역사상 가장 극적인 장면이 연출됩니다.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알려진 이 사건은, 독일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 중에 하나이죠.
1077년 한 겨울, 폐위가 눈앞에 다가온 하인리히 4세는 추운 알프스 산맥을 넘어 허겁지겁 이탈리아에 있는 카노사 성에 달려가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이야기합니다.
하인리히 4세 왈
: "(눈물을 흘리며) 교황님. 제발 황제직만은 빼앗지 말아 주세요. 이렇게 간청합니다"
이 젊은 황제는 누더기 옷을 입고,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사흘 동안 교황에게 '파문'을 철회해 줄 것을 애원합니다.
그레고리우스 7세 왈
: "어린 녀석이 얼마나 간절하면.. 그래! 이번 한번은 봐줄테니 앞으로 설치지 말도록!!"
카노사의 굴욕으로 하인리히 4세는 겨우 황제직을 연명할 수 있었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황과 황제 사이의 갈등이 끝난 것은 아니었어요.
'교황 VS 황제' 시즌 2는 하인리히 5세(1086 - 1125)까지 이어졌습니다. 하인리히 5세는 교황에게 처참하게 무릎을 꿇었던 아버지의 원한을 풀어줄 수 있었을까요?
아니요.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그는 나라 안팎으로 여러 문제에 휩싸여 있었고, 교황 문제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죠.
하인리히 5세는 교황과 극적인 타협에 성공합니다. 이 타협은 그의 선조들이 보면 대성통곡할 정도로 굴욕적인 조항이었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했죠.
그 굴욕적인 조항이란, 눈치채셨겠지만 황제의 주교 임명권을 박탈하는 것이었어요. 또한 교회는 세속 영주권도 받게 되었죠.
하인리히 3세부터 약 100년 동안 진행된 '황제 VS 교황'과의 전쟁에서 최후의 승리자는 바로 교황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제국 안팎의 상황은 거의 패닉 상태였습니다. 교황과 황제가 전쟁을 치르느라 정신 없는 동안 지방 세력들은 충실히 군사력을 키워왔었는데,
그를 바탕으로 지방 세력은 과거 어느 시기보다도 황제로부터 자유로웠고, 실질적으로는 독립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황제의 권력은 땅으로 떨어지고 지방 세력들은 점점 강대해졌죠. 그 결과.. 신성 로마제국은 껍데기뿐인 국가가 되었고,
314개의 군소 국가들이 각자의 지역을 다스리는 형태로 변했죠. 하지만 이런 콩가루 집안이 된 제국을 살려보고자 노력했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프리드리히 1세(1152 - 1190)'입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왕국을 '신성 로마제국(Holy Roman Empire)'라는 명칭으로 부르며, 제국의 존엄성을 세우려 합니다.
그가 썼던 신성 로마제국이라는 칭호에는 이 제국이 로마제국을 계승하고 있으며,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신성 로마제국은 지방 군소 국가들로 분열된 나라였습니다. 따라서 그저 지방의 기득권을 인정해주는 일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죠.
이후 신성 로마제국의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황제의 권력은 계속 약화되었고, 300개가 넘는 지방 국가들이 군웅할거를 지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집권화'의 꿈은 헛된 망상에 불과했죠.. 몇 세기 이후, 신성 로마제국의 몇몇 거대 세력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들은 바로 당대 유럽 최고의 네임드 가문인 '합스부르크 왕가', 그리고 북쪽의 '프로이센'입니다. 이들로 인해, 신성 로마제국은 강력한 영방국가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연재 시리즈
1편 큐팍의 독일 역사 #1: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유
2편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의 공통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