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몇 살이에요?"
금선은 어색하게 웃었다.
"내 나이? 서른여섯이다."
서른여섯이라면 서봉석 선생보다 한 살 많을 뿐이었다. 그는 다시 물었다.
"내가 어른이 되어서도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요?"
금선은 웃었다. 어째서일까. 그 웃음은 의자가 삐걱대는 소리 같았다. 슬프고 공허하고…… 무의미한 웃음 같았다. 적어도 웃음은 아닌 것은 분명했다. 차라리 울음에 가까웠다.
"고맙다, 성준아. 내가 지금 얼마나 기쁘고 흐믓한지 넌 모를 거야. 어른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으면? 그래,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으면 그럼 니 뜻대로 하기로 할까."
한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약탈이 시작됐다 中/최인석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 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 리. 타.
아침에 양말 한 짝만 신고 서 있을 때 키가 4피트 10인치(147센티미터)인 그녀는 로, 그냥 로였다. 슬랙스 차림일 때는 롤라였다. 학교에서는 돌리. 서류상의 이름은 돌로레스. 그러나 내 품에 안길 때는 언제나 롤리타였다.
*
"그 말은 내가 모텔까지 따라가야만 우리한테 [우리란다] 돈을 주겠다는 뜻이군요. 그런 뜻 맞죠?"
"아니, 그건 오해야. 난 그저 네가 오다가다 만난 딕이나 이 누추한 동굴 따위는 버리고 가서 나와 함께 살고 나와 함께 죽고 뭐든지 나와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것뿐이야." (대충 그렇게 말한 것 같다.)
"미쳤군요." 그녀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잘 생각해봐, 롤리타. 조건은 아무것도 없어. 다만 한 가지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아무튼 거절하더라도 네…… 결혼자금은 줄 테니까."
"정말이에요?" 돌리가 물었다.
나는 현금 400달러와 수표 3600달러가 든 봉투를 건넸다.
그녀는 머뭇거리면서, 반신반의하면서, 내가 주는 보잘것없는 선물을 받았다. 이윽고 그녀의 이마가 아름다운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 아니," 그녀는 마치 괴로운 듯이 힘주어 말했다. "우리한테 사천 달러나 주시는 거예요?" 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내 평생 가장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턱을 적시고, 나를 불태우고, 코가 막히고, 그래도 울음을 그치지 못하자 그녀가 내 손목을 만졌다.
"네가 만지면 그대로 죽을 것 같아." 나는 말했다. "정말 같이 안 갈래? 나와 같이 갈 가능성은 조금도 없는 거야? 그것만 말해줘."
"없어요. 안 돼요. 자기, 안 돼요."
그녀가 나를 '자기'라고 부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롤리타 中/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어린 왕이 말했다.
"밤이 되어도 내 곁을 지켜준다면, 너를 나의 왕비로 삼을 텐데……"
시녀가 말했다.
"제게서 내려오세요."
어린 왕이 말했다.
"이 거대한 성에는 누가 살고 있어? 수천 명의 시녀들과 나를 '끌어내려야' 직성이 풀리는 수백 명의 신하들이 살고 있지. 너는 겁먹은 게 틀림없어, 하지만 너는 어린애가 아니야, 약간 피가 나는 거지 ……"
시녀가 말했다.
"제게서 내려오세요."
어린 왕이 말했다.
"나는 절대로 내려가지 않아.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살거야!"
병 속의 좀길앞잡이 中/황병승
"아픈 건 아름다워요."
그녀가 말하는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그녀 입술은 단어들로 가득 찬 여울. 넘쳐흐르기를 기다리며, 두 손을 모으고 있는 나.
책상 오른편 모서리 위에 얌전하게놓인 하얀 책자를 흘깃 쳐다본다. 정신과의사와 환자들을 위한 핸드북이다. 환자와 감정적으로 가까워지면 안 된다. 경고문. 하지만 난, 샌드라가 말을 하고 있으면 우리가 지켜야 할 역활들을 망각해버린다.
"구해줘."
내가 말한다.
"네?"
같이 춤을 춰줘. 같이 말을 해줘. 내 의자와 너의 소파 사이. 살균된 내 하얀 와이셔츠와 너덜너덜한 너의 블라우스 사이의 공간을 메워줄 세상을 만들자.
빙판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걸 지켜보는 기분. 어쩌면 커튼에 불이 붙는 걸 지켜보는 기분.
우리들 세상의 벽 中/타블로
이것은 말하자면 환희의 비명으로, 저주가 풀림과 함께 그동안 내 심장을 묶어 왔던 마녀의 사슬이 한 고리씩 떨어져 나가는 소리랍니다. 그녀는 대체 얼마나 내 심장을 단단히 묶은 걸까요. 처음부터도 사슬이 심장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던 탓에 통증은 만성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고리 하나가 부서질 때마다 심장이 푸주한의 칼끝에서 떨어져 나온 힘줄 부스러기처럼 점점 떼어지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고통은 내가 살아 있었고 살아서 당신을 위해 무언가를 했다는 증거이므로, 내 심장은 기쁘게 터져나갑니다. 몸속을 돌던 붉은 피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밖으로 토해지고 나면 비로소 이 심장은 뛰기를 멈출 것입니다.
개구리 왕자 또는 맹목의 하인리히 中/구병모
"계속 내 생각만 나지?"
"네."
"어려서 그래."
"나도 계속 네 생각만 나."
"왜요?"
"늙어서 그런가봐."
두 사람/이석원
추모공원을 나올 때까지도 안치함이 있는 건물 전광판에는 여자가 보낸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너는 누구였어?
셔틀버스와 버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자는 내내 그 문장을 곱씹었다. 단어들만이 순서를 바꾸었다.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
너는 도대체 누구였어?
너는 누구였어, 도대체?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中/장강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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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은 한주 보내 망고들 :)
참고로 이석원의 두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글귀긴 하지만 두사람이 실린 보통의 존재는 그닥 추천하고 싶지 않아.
다 직접 타이핑하는 거라 혹시 오타 있으면 알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