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1월 14일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 군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서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을 받던 중 사망했다

전두환 정권은 사망원인이
'책상을 탁 치자 억하고 쓰러졌다'고 발표했다
'탁' 치니 '억' 하고 죽어버린 젊디젊은 생명

1987년 5월 17일
노동자였던 황보영국은 분에 이기지 못해
부산상고(현 개성고) 앞에서 '독재 타도'를 외치며 분신했으며

1987년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학교 앞 시위 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고
같은 학교 학생의 부축을 받으며 사경을 헤맸다

열사들의 생명이 하나, 둘 꺼져가던 그 무렵
불사일 것이라 의심치 않던 독재정권의 생명도
그들 모르게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1987년 5월 18일
천주교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은
박종철 군이 고문으로 죽은 뒤 사망 원인이 은폐, 조작됐고
고문경관은 다섯 명이라는 사실을 공개했다

발표를 들은 국민들의 분노는 폭발했고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80년대 중반이 지나며 5·18 민주화 운동 정신을 이은
학생과 시민들의 반독재 투쟁은 치열해져 있었고

전두환 독재정권은 투쟁이 거셀 때마다
갖가지 간첩사건과 용공 사건을 조작해 이를 탄압했다

그 과정에서 고문은 필수적이었고
86년 부천 경찰서에선 성 고문 사건까지 벌어졌다
박종철 군도 조작의 일환이었고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던 그 와중에 4·13 호헌조치가 발표됐다

호헌조치의 내용은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후임자에게 이양한다는 것인데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후임으로 앉혀
사실상 독재를 계속 이어가겠다는 발표였다

4·13 호헌조치는
국민들이 요구하던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거부였다
전국은 다시 분노로 달구어졌다

1987년 5월 27일
마침내 전국의 민주화 운동 지도자 2,200여 명이 세운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본부'가 출범했고
반 독재 투쟁 세력은 하나로 결집됐다

1987년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 군이 최루탄에 맞아 생과 사의 기로에 서 있었을 때
독재권력 이양을 코앞에 둔
두 독재자들은 웃음 짓고 있었다

1987년 6월 10일
박종철 군에 대한 고문살인을 규탄하고
민주헌법을 쟁취하려는 대규모 시위가 펼쳐졌을 때

민주정의당은 정당대회를 열고 있었고
새 대통령 후보 노태우를 발표하며
광주와 민주주의를 피로 물들였던 두 주역의 독재권력 승계식이 진행되었다

1987년 6월 10일
국민운동 본부는 독재정권에 대한 항쟁의 뜻으로
자동차들은 오후 6시에 경적을
승객들은 흰 손수건을 흔들며 동참해 달라는 지침을 내렸고

시내는 경적소리로, 흰 손수건의 물결로 가득 찼다

그날, 단 하루 만에 전국 22개 도시에선
민주주의를 열망하던 학생과 시민 3,80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1987년 6월 11일
치안 당국은 전날의 집회를 '폭력성을 드러낸 법질서 유린 행위이며
앞으로도 법질서 파괴행위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밝혔다

서울의 시위대는 경찰들의 '단호한 대처'로
명동성당 쪽으로 밀려났다

시위는 밤까지 이어졌고
5박 6일간의 명동성당 농성은 투쟁의 뜨거운 구심점이 됐다

시민들은 자발적인 모금으로 명동성당의 농성을 지지했고
성당 안팎엔 시민들이 보낸 다양한 격려의 글들이 붙었다

명동성당 옆 계성여고 등에서는
도시락과 물 등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농성이 진행될 수 있도록 도왔고
다 먹은 도시락 안에는 '잘 먹었습니다', '고마워요' 등의 쪽지가 들어있었다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 요구는 전국 16개의 도시로 번져갔고
150만 명이 참여하는 거대한 항쟁의 큰 파도가 전국을 덮었다

특히 부마항쟁의 도시, 부산은 더욱 격렬한 투쟁으로 맞섰다
계속된 독재로 억압된 민주주의의 불씨는
87년 6월 전국의 거리에서 힘차게 타올랐다

1987년 6월 26일
전국 37개 도시에서 국민평화대행진 시위가 열렸다
6만여 명의 경찰이 배치됐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물길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경찰은 3,467명을 연행했지만
시민들의 적극적인 동참으로
시위 규모는 이미 6·10대회의 3배를 넘어섰다

놀라운 점은
침묵하던 사무직들이 시위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며
동참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무직을 비롯한 시민들의 지지와 동참은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어주었다

광주와 부산 등 주요 도시에선
날마다 수백만 명의 시위대가 경찰을 무장해제시키기도 하면서
'독재 타도'의 함성을 드높였다

6월 항쟁은 시위가 거듭되면서 참지 못해 터져 나온 사무직
이른바 '넥타이부대'의 합세로 온전한 시민항쟁으로 발전했다

시위를 막던 전투경찰들도
시민들의 열망과 항쟁의 대의 앞에 흔들렸다
가슴에, 헬멧에 꽃을 달고
그들도 경찰이기 전에 한 국민으로서 염원의 한 줄기가 되었다

1987년 6월 29일
마침내 군사독재정권은
새 대통령 후보가 6·29 선언을 발표하며 시민 앞에 굴복했다
독재정권은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였다

1987년 7월 9일
이한열 열사의 영결식에는
100만 명의 추모객이 모인 가운데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죽음은
민주주의가 무엇을 딛고 일어난 것인지를 깨닫게 했다

민중이 얻어낸 승리였지만
대통령 직선제는 국민을 향한 독재정권의 기만이기도 했다
국민들의 요구를 무시하고는 선거에 이길 승산이 없었던 상황에서
노태우에게 힘을 실어주자는 계산이었다

더구나 야당의 김영삼과 김대중은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했고
야당을 지지하던 표는 양분되어
군부독재를 청산하려던 국민들의 염원은 실현되지 못 했다

수많은 광주시민들의 목숨을 빼앗고
삼청교육대 및 수많은 용공, 간첩사건 조작을 성공시킨
전 씨와 신군부의 군사독재정권은
새 대통령 노태우를 통해 연장되었다

하지만 6월 항쟁으로 민중의 힘을 확인한 노동자들은
신군부가 만든 노동악법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투쟁을 이어갔다

투쟁은 울산의 현대 노조를 시작으로
마산, 창원 등의 주요 공단과 서울, 인천, 부천 등으로 확산됐고
7월부터 석 달 동안 무려 1,000여 개의 노동조합이 세워졌다

이는 노동자가 사회 변화의 한 주체임을 깨닫고실현해 나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4·19에서 5·18로, 다시 6·10으로 이어지며
시위대에 꽃을 달아주던 당신들은 결국
오래전 심었던 민주주의 싹에서 꽃을 틔우는데 성공했다

민주주의 아래, 6월의 함성이 타오르던 그때 그 광장들에선
또 다른 촛불들이 타오르고 있었다

당신들이 미래를 위해 지켜냈던 민주주의
미래에서 그 민주주의를 받은 우리는
나라가 건네주는 꽃을 가슴에 달 수 있을까

당신들이 목숨 걸고 전해준 선물을
우리도 미래로 잘 전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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