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에 일본에서 추방된 한 예수회 선교사가 스페인 정부에 일본의 정벌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이 사실을 안 다른 예수회 동양순찰사 발리냐노가 급히 다음과 같은 다른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일본인들은 매우 흉폭하고 호전적이며 이들을 정복해 페하의 신민으로 삼는다한들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히데요시같은 일본의 군주들은 바다 멀리 떨어져있는 에스파냐가 선박으로 수십만의 병력을 보낼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있으므로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
'네 방위의 제국의 지배자', '위대한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칭하던 스페인 왕은 읽고 있던 성경을 집어던질 정도로 그 편지의 내용에 분노했다고 했다.
이처럼 오랜 기간을 거쳐 일본과 접촉했던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네덜란드인들은 감히 군대를 보내 일본을 정벌할 생각을 못한 것이다. 이윽고 히데요시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막부가 1630년에 쇄국령을 단행하자, 스페인 정부는 쇄국령을 재고해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의 막부 정권은 사절단 전원을 처혐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런 일이 중남미나, 서아프리카 국가에서 일어났다면 그 즉시 토벌군을 보내 해당 국가의 군주나 왕족, 귀족들은 교수대에 매달리고 백성들은 대학살을 당했겠지만, 스페인은 일본에 대해 항의사절도 보내지 못한 것이다. 스페인은 어쩔 수 없이 일본과의 통상을 포기하고 말았다.
한편 일본에 대해 공포감을 갖고 편지를 스페인왕에게 보냈던 발리냐노가 중국에 관해 필리핀 총독에게 편지를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스페인은 중국을 점령하여 식민지화 해야합니다. 일본은 풍요롭지도 않고, 너무 강하므로 정복의 대상으로는 적합하지 않지만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무력을 이용하여 중국 정복에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크리스트교의 일본 포교를 중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발리나뇨가 중국의 국력을 얕보았던 이유는, 그는 단지 남중국의 조그만 지역을 중국으로 오인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중국은 일본보다 작은 국가로 생각한 나머지 일본은 점령하기 어려워도 중국은 점령할만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 마테오 리치 등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가면서 중국의 실상이 유럽에 알려지게 된다.
그들이 방문한 중국이 300여 년 전 마르코 폴로가 그의 견문록에서 전했던 공포의 기마민족인 거란족을 의미하는 '키타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다시 스페인의 예수회교단은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고에즈라는 수사를 중국에 보냈다. 고에즈가 갖은 고생 끝에 알아 낸 사실을 마테오 리치에게 편지로 써서 보내면서 한탄했다.
"아아, 중국이 바로 키타이입니다!!"
그 편지로 인해 스페인을 비롯한 전 유럽 국가들은 엄청난 쇼크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추진하던 중국 원정계획은 모두 백지화되고 말았다. 남미의 아즈텍이나 잉카 같은 정복의 대상에서, 일본과 같은 무역의 대상으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1661년 명나라 부흥을 외치며 복건성 일대에 할거하며 청나라에 대항하고있던 정성공은 당시 네덜란드에 점령 당해 통치를 받고 있던 대만에서 네델란드군을 몰아내고 탈환하여 항청운동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에 네델란드는 인도네시아로 돌아가 그 경영에 전념하게 된다. 서양 세력은 그때까지 동양을 일방적으로 점령할 수 있었을 정도로 세력이 강하지 못했었던 것이다. 중국이 서양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유린당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말 일어난 산업혁명의 효과가 사회전반에 나타나기 시작한 19세기 초부터였다.
http://blog.daum.net/dalmunzz/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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