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에는 벚꽃이 없었다.?

일본의 국화인 벚꽃이 일본에 없었다는게 아이러니 할꺼야
(놀랄만한 사실은 일본에는 국화가 지정이 안되어 있어,
황실을 의미하는 국화가 국화로 인정받고있고
사무라이의 꽃이라고 일컷는 벚꽃은 제 2의 국화로 기정사실화 되어있는 현실)
정확히는 왕벚나무가 없었고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시초는 고대에 한국 불교가 일본에 포교되던
서기 6세기경부터로 추정하고 있어.
왜냐하면 일본에 불교가 된 시기가 흠명천황 13년(서기 552년)인데 <정사 일본서기(日本書記) 기록>
(공식기록이 서기 552년이고 훨씬 이전에 백제로부터 건너간 사람들에 의해 전파되어 있었데)
흠명천황 시절은 백제의 성왕(523-553) 때로 백제에서 불상과 경전을 보낸 사실을 <일본서기>는 공식기록으로 남기고 있어.
더불어 일본 벚꽃 최대 생산지인 요시노산이 있는 나라땅은 서기 538년 부터 백제 성왕에 의해서 백제 불교가 일본에 포교된 나라땅의 터전이며,
거기 있는 왕벚나무의 DNA가 한국의 왕벚나무와 일치함.
(일본 식물학자 코이즈미 켄이치는 애당초 기원이 한국이라고 1933년에 주장했지만 일본은 함구하고있고
이후에 많은 일본학자들도 벚꽃의 기원이 한국이라는 사실을 언급하지만 묵살되어짐)
학명또한 일본학자가 최초로 발표해서 "푸르누스 에도엔시스 마쓰무라"라고 되어 있고.. 그로인해 기원이 일본이라고 알고있는 사람이 대다수 인데
공식 발표기록을 보면"1908년 남제주성당에서 근무하던 프랑스인 에밀 타케신부가 한라산 북쪽 관음사 뒷산 해발 6백m 지점에서 왕벚꽃나무를 채집했다.
당시 세계적인 권위자 독일의 베를린 대학 괴네교수에게 이를 보내 제주도가 왕벚꽃의 자생지로 확인 발표"
이때부터 왕벚꽃의 족보를 놓고 세계학자들 간에 논쟁이 있었지만
생물학적 기록에서도 일본에서는 한군데서도 자생지를 발견하지 못했어, 대신 한국에서는
타케신부가 발견한 자리 부근에서 1백년 생이 발견됐고
또 전남 대흥사 등 10군데에서 계속 발견되어 왕벚꽃의 고향은 한국이라는 주장이 유력하게 된거지.
우리나라에서 벚꽃이 인기있던 시기는 효종(1619-1659)시절이고
이때 북벌을 계획하고 궁재로 쓰기 위해 지금 서울 우이동과 장충단근처에 왕벚꽃나무를 대량으로 심었다는 기록이 있어
민간요법으로도 인기가 많아서수백년전부터 감기처방으로 벚나무 껍질을 벗겨 말려 두었다가 달여 마시거나.
종기나 부스럼 두드러기도 재료로 쓰였데.
벚꽃나무 열매와 꽃망울이 달린 가지를 꺾어 술을 담기도 했고.
그렇게 사랑받던 벚꽃은 일제시대를 지나 해방후에
일본의 국화라는 이유때문에 포풍 민주화를 당하게 되지
(위에서도 말했지만 일본국화는 없고 국화와 벚꽃이 국화로 기정사실화 된것)
그냥 수백년된 벚꽃나무들이 일본국화라는 이유때문에 막 잘려나감ㅠㅠ
- 일본벚꽃의 기원은 한국
2. 일본에는 과거제도가 없었다?

(그림은 조선시대 과거시험 풍경을 기록한 "북새선은도")
벚꽃에다가 너무 많은 글을 싸지른거 같아서
간략하게 쓸께..
과거 우리나라는 고려때부터 과거제도가 있어서
"개천에서 용났다.""장원급제"라는 표현들이 있잖아?
(우리나라는 1894년까지 과거시험이 치뤄지다가 갑오개혁으로 인해 폐지됐음)
반면에 일본에는 우리나라처럼 과거시험이 없었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유명무실했지
출세의 개념이 아니라 그냥 하급 관리를 뽑는 제도일 뿐이라서
(관직이 너무 낮고 출세할 수 있는게 아니었음)
자연스럽게 to the 망..
더구나 일본은 대대손손 이어받는 세습제였고
시험따윈 개나주고 손가락빨면서 있다가 아버지 천당가면 자식한테 자동 인수인계되는
손안대고 코푸는 그런 시스템이라
있는집 자식들은 과거시험을 칠 필요도 없었지..
결국 일본에 과거제도가 도입된 이유가
어중이떠중이가 관직을 맡는 세습제를 타파하고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도입했는데
도리어 역효과가 난거지...
한줄요약- 일본 과거제도 망
3. 일본에는 도공이 없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도자기 생산 기술이 없었다.
이건 대다수 일게이들이 알꺼야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 도공들을 일본으로 대려간 사건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속되게 도자기 전쟁으로도 부르지)
임진왜란 전까지는 일본에서 도자기를 자체생산할수 없어서
수입을 해왔었거든

(만화에서도 나오는 수입산 백자.)
조선의 도자기 기술이 얼마나 부러웠으면
우리선조들이 막쓰던(생활에 쓰던)
막사발을보고 뿅가서 보물로 지정되기도 하고.. (이도다완)

효우 게모노 라는 애니메이션인데 캡처화면속 내용이 조선통신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는 장면이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손님대접을 위해 차를 마련했고

일본에서 보물이라 불리는 이도다완을 찻잔으로 내세웠으나
아까도 말했듯이 이도다완은 허울뿐이고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막사발이라고 했듯이




되려 통신사에게 혼남..


그리고 역관광..
자연스럽게 일본 문화속에
조선에서 만든 도자기를 갖는 것은 부와 명예의 상징으로 표현되기도 했어
조선도공이 만든것은 신이 만든 도자기라 해서 "신기(神器)"로 부르기도 했고.
일본입장에서는 여러모로 부러웠던 모양이야.
한줄요약
-조선 도공 만세
4. 일본에는 호랑이가 없었다.?

일본에 호랑이가 없는건 신박한 사실인데
지정학적으로 일본이라는 나라가
열도였기 때문에 호랑이가 없었다는게 정설이야.
그리고 원숭이가 있는곳에는 호랑이가 없고 호랑이가 있는곳에는 원숭이가 없다는 설도 있어
그래서인가 우리나라에 원숭이가 살았다는 기록은 없어
※ 원숭이 기록 있다고 태클거는 게이 있어서 하는말인데 고구려가 있던 영토,발해가 있던 북쪽에는 서식한 기록이 있음.
"이차돈이 순교하자 하얀 피가 한 길이나 솟아올랐다. 하늘이 컴컴해졌다. 땅이 진동하며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나뭇가지가 부러지자 원숭이들이 떼지어 울었다."이것도 유명하지)
때문에 조선,중국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게 되었고


결국 누에라는 일본 요괴로 표현되어지기도 했어
다시한번 이해를 돕기위한 만화 짤.

차나왕 요시츠네? 에서 나오는 호랑이사건

일본에는 호랑이가 없는데 마을에 호랑이가 출몰했다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

사건의 정황

당시 일본인들은
호랑이의 모습을 구전을 통해 알게되거나 그림을 통해 알게됨
때문에 일본에서 희소한 호랑이는 매우 귀한 상품으로 팔리면서

(배가본드에서도 나오는 조선 호랑이)
일제 강점기때도 무차별적으로 포획되었었지
(이때 호랑이와 표범이 씨가 마름)
한줄 요약
- 일본에는 호랑이가 없다. 그대신 원숭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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