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 부부는 금슬이 정말 좋았는데
원나라 출신 왕비들과 결혼했던 고려왕들의 기록을 볼 때
이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
노국대장공주는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개혁 의지를 지지했으며
기철을 위시한 친원파들에게서 공민왕을 지켜냈고
흥왕사의 변 당시 공민왕을 대비의 밀실에 숨기고는
김용의 반란군을 자신의 몸으로 직접 가로막으며 공민왕의 목숨을 구했다.
(노국대장공주는 원나라의 공주였기에 김용의 반란군이 해칠 수 없었다.)
공민왕은 자신을 위해 여러 가지 도움을 준
노국대장공주를 몹시 사랑하여
다른 여자들에게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이런 부부에게도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아이"가 없었다는 점이다.
첫 번째 아이를 유산으로 잃은 노국대장공주는
1364년 다시 한 번 임신한다.
다음 해 2월 출산을 준비하는 노국대장공주에게 문제가 생기는데
노국대장공주와 아이의 목숨이 위험한 난산이었다.
노국대장공주와 아이가 위험해지자 공민왕은
사형수들을 제외한 죄수들을 사면하고는 사찰에 기도를 드리도록 했다.
공민왕의 노력에도 노국대장공주와 아이는 호전되지 않았고
공민왕은 사형수들까지 사면시켰다.
(당시 사형수들은 보통 사면되지 않았는데
공민왕의 간절함을 나타내는 기록이다.)
그러나 노국대장공주와 아이는 출산 도중 사망하고 만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였으며
매일 불공을 드리며 탄식했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은 공민왕에게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었는데
밥을 먹을 때도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와 같이 먹었고
살아있을 때처럼 초상화에 말을 걸었다고 한다.
이후 공민왕은 폐인이 되어 간다.
- 1373년 3월 -
(노국대장공주가 죽고 8년이 흐른 뒤)
공원왕후(공민왕의 어머니)가 공민왕의 행동에
후사가 걱정이 되어 말을 걸었다.
"어찌하여 비빈들을 만나지 않습니까?"
공민왕이 눈물을 흘리며 공원왕후에게 말하기를
"공주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공원왕후가 공민왕의 말을 듣고는 답했다.
"태어나면 죽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왕 또한 그 일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행동이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우니
다시는 이런 행동을 하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