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작성 엽혹진 수원 삼성 블루윙즈
사진 네이버 구글 등
17년전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50분경
진천역을 떠나 안심역으로 향하던
대구지하철 1호선 1079호 열차에서
당시 우울증을 앓던 56세의 김씨가 인화물질이
든 페트병 두개를 들고 탑승하였고
지하철이 중앙로역 구내에 들어서자 페트병 안에
든 인화물질을 돌연 바닦에 쏟아부은 뒤
불을 붙여 화재가 일어 났습니다.
순식간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으나 1079호의
기관사는 후속 조치를 하지 않은채 홀연히
본인만 대피 하였으며 본부 사령실 또한 화재로
인해 화재 경보가 울렸음에도 단순 오작동으로
처리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1079호 열차의 화재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1080호 열차가 중앙로역에 진입
정차해 있는 1079호에 화재가 발생한 것을 본
1080호의 기관사는 1079호 열차와 교신을
시도했으나 이미 대피해버린 1079호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고
이를 본부 사령실에 보고 하였으나 본부 사령실은
그저 기다리라 라고만 지시
뒤늦게 화재 사실을 알아챈 본부 사령실은
1080호 기관사에 중앙로 역에서 떠나라 라고
지시 하였으나 이미 열차는 전력 공급선이 타버려
동력을 잃고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전등마저
꺼지며 암흑천지가 되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본부 사령실은 출입문을 모두 개방하고 승객 탈출을
도우라고 지시 하였으나
1080호의 기관사는 1079호의 기관사와 마찬가지로
직업정신을 잃은 채 평소 습관 처럼 열차의 마스터키를 뽑아 본인만 홀연히 대피하였습니다.
이 와중에 우연히 1080호 객차에 타고 있던 코레일 금호역장 권춘섭씨가 위험을 무릅쓰고 비상 개폐 장치를 찾아 문을 열고 다른 승객들의 대피를
도왔으나
실제 방화가 일어났던 1079호 열차보다
1080호의 열차가 훨씬 많은 사상자가 발생 하였습니다.
이처럼 본부 사령실의 미흡한 조치와
더불어 직업정신을 잃은 기관사 들의 대처에
사망자 192명 부상자 148명등
34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최악의 인재가
되었습니다.
정작 방화를 일으킨 장본인인 김씨는
무사히 대피를 하여 화를 면하였고
범행 당시 손과 발에 화상을 입어 대구시 북구의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다가
당시 화재 상황의 목격자 들에게 범인으로
지목되어 범행 2시간 여만에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검찰은 김씨를 ‘현존 전차 방화 치사상죄’로 사형을 구형했지만
법원은 김씨가 처해있던 상황의 정상을 참작하고 사망자 대다수가 김씨의 방화 행위에 따른 직접적인 결과가 아닌 대구지하철쪽의 잘못된 대응으로 숨진 정황을 인정해 무기징역을 선고
그러나
김씨는 범행 1년 뒤인 2004년 8월31일 수감중이던 진주교도소에서 지병 악화로 숨지고 말았습니다.
참사 이후
1080호의 기관사 최씨에게 금고 5년
1079호의 기관사 최씨에는 금고 4년
종합 사령 방씨에 금고 4년
종합 사령 홍씨와 손씨에게 금고 3년 형을
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