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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딩조끼ll조회 3536l 6
이 글은 3년 전 (2021/3/31) 게시물이에요

스코틀랜드 태생의 엘리자베스 키스는 3.1운동이 거행된 직후 한국에 들어왔다. 

그는 화가였으며, 한국의 사람, 자연, 문화, 건축물 등을 그림으로 그렸다. 키스는 한국을 그린 그림으로 세계적인 화가 반열에 올랐는데, 3.1운동 직후에 한국에 들어왔기 때문에 당시 3.1운동을 한국에 있던 외국인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상세히 기록할 수 있었다.

3.1운동 당시 한국에 있던 외국인들의 목격담 | 인스티즈



(본문은 그의 책 <올드 코리아>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1.

"나는 한국 사람들이 1919년 3월 1일, 행복한 아이들처럼 춤추고 노래 부르며 비밀리에 준비했던 수천 개 

태극기─나라의 상징이지만 금지되어 있던 그 태극기─를 높이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 누구에게도 이 거사를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날의 행사 일정은 용의주도하게 계획되었고, 상세한 지시가 지하 신문을통해 전달되었다. 

유명인사 중 33인이 독립운동의 대표자로 선정되었고 그중 몇몇은 이미 반역죄로 고생을 했던 사람이었다. 

33인은 그들이 일본 판사에게서 어떤 벌을 받을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점인 태화관에 모여 작별 점심을 나누었다. 

이 오찬에는 일본 정부 고관도 몇 사람 초대되었지만 그들은 오지 않았다. 그 대신 말직에 있는 사람을 하나 보냈다. 

만약 초대된 일본고위직 사람들이 참석했더라면, 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크게 낭독하고 서명하는 장면을 목격했을 것이다. 

 

33인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다음 경찰에 스스로 자수하러 갔다. 만약 체포될 때까지 기다린다면, 

매를 맞아가며 또는 총 끝에 찔려가며 서울 거리를 끌려갈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좀 우울한 유머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미리 자동차를 대기시켜놓고 있다가 위엄을 잃지 않고 판사에게 가서 자수하는 동시에 독립선언서를 제출했다.

 

2.

그날 아침 내내 서울에는 이상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외국인들은 전혀 소식을 모르면서도 왠지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에 뒤숭숭했다. 

고종의 서거로 인한 국상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침내 사람들이 파고다공원(현재의 탑골공원)에 집결했다. 

여기서 신호만 받으면 일제히 한 목소리로 “만세, 만세, 독립 만세!”를 부르기로 한 것이다. 군중이 이리저리 몰리면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내 종이 울리고 한 젊은이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서 들렸다. 그는 그날의 행동 지침을 낭독하고 이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3.1운동 당시 한국에 있던 외국인들의 목격담 | 인스티즈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큰 도의를 분명히 하는 바이며, 이로써 자손 만대에 깨우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하는 바이다. 아!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쳤도다.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왔도다.”

 

사람들에게 전한 행동지침은 다음과 같았다. 

1.폭력을 행사하지 말 것, 

2.난동을 피할 것, 

3.일본인의 물건을 사지 말 것, 

4.만세를 부를 때는 다 같이 할 것,

5.자진해서 체포되려고 하지는 말되 일본인들이 포승줄에 묶으려 할 때 저항하지 말 것, 

6.반항해 덤벼들지 말 것.

 

 

 

3.

어느 독립선언서에서 발췌한 다음 글은 정치적 성명서라기보다는 한 편의 시 같은 느낌이다.

 

거룩한 단군의 자손인 우리들

온 사방에는 우리의 적들뿐.

우리는 인류애의 깃발 아래 목숨을 바친다.

구름은 검어도 그 뒤에는 보름달이 있나니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을 약속하도다.

 

확성기 소리가 멈추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숨겨 갖고 있던 태극기를 일제히 휘두르며, “독립 만세, 독립 만세”를 크게 부르며 춤을 추며 길로 나갔다. 함성이 터지면서 군중은 모이고 흩어지고 또 모이면서 질서 정연하게 서울의 대로를 행진했다. 양반, 선비, 교복을 입은 남녀 학생, 상인, 막노동자, 거지, 심지어는 술집 여자들까지, 계급의 상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독립 만세를 부르짖었다. 배제학당 교장이었던 

휴 신 Hugh Cynn(한국명 신흥우─옮긴이)은 《한국의 재생Rebirth of Korea》(1920)이라는 책에서 자신이 목격한 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3.1운동 당시 한국에 있던 외국인들의 목격담 | 인스티즈


<The Los Angeles Times Los Angeles, California 01 Apr 1911, Sat • Page 24>

"한 손에 책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모자를 든 학생들, 하얀 옷을 입고 주름진 초록색 장옷을 걸친 부인들, 소매를 걷어 올리고 연장을 든 일꾼들, 고운 비단 두루마기를 바람에 날리는 양반의 자제들, 앙상한 손가락에 비쩍 마른 팔뚝을 한 순박한 농사꾼들, 이마에 흰 천을 질끈 동여맨 몸체가 단단한 달구지꾼들, 긴 담뱃대를 들거나 귀 뒤에 펜을 꽂은 부유해 보이는 상인들, 솜 넣은 바지를 입은 퉁퉁하게 생긴 남자아이들, 혹은 나막신을 신고, 혹은 비단신을 신고, 서구식으로 옷을 입은 청년들, 천차만별의 연령, 직업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들 일체가 되어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즐겁게 “만세, 만세, 만세! 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4.

미국 사람들이 설립한 여자대학(이화학당, 지금의 이화여대)이 하나 있었는데, 그 대학 교장은 소속 학생들이 자기 명령을 어기고, 독립선언서를 읽던 날 교정을 몰래 빠져나가 가두 시위행진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학생 중에도 제일 똑똑한 학생 하나가 붙잡혀 감옥에 들어갔는데, 후일 나는 그 교장과 같이 그 학생을 면회 갔다 

 

3.1운동 당시 한국에 있던 외국인들의 목격담 | 인스티즈



(제4대 이화학당장으로 있던 룰루 프라이 여사Miss Lulu Frey(1868~1921)는 1893년 선교사로 내한하여 1907년에 학당장에 취임했고, 독립만세운동 이후 감옥에 갇힌 학생들을 구하는 등 노심초사, 심신이 피곤하여 휴가를 얻어 도미했고,1920년 대수술을 받고 1921년에 타계했다).(R.I.P)

 

나는 그때까지 애국활동하는 학생들이 얼마나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고 수모를 겪는지에 대해서 다 알지 못했다. 우리는 투옥된 학생과 겨우 몇 인치 정도 밖에 안 되는 작은 문구멍으로 대화를 해야 했다. 학생의 얼굴이 겨우 보였는데, 그 학생은 한국 사람에게는 힘든 자세인 무릎 꿇는 자세로 앉아 있어야 했다. 구멍은 어찌나 작은지 이쪽저쪽으로 머리를 움직여야만 얼굴 전체를 볼 수 있었다.

 

학생은 우리 모습을 다 볼 수는 없고 목소리를 듣고 누구인지 알아보는 정도였다. 학교에서 루스Ruth라고 불리는 이 학생은 반질거리는 까만 머리를 등 뒤로 땋아내렸다. 기품이 고고한 얼굴이었고, 치아는 하얗고 뺨은 불그스레했으며 새까만 눈동자는 반짝거렸다. 슬픈 표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환희에 넘친 표정이었다. 학생은 왜 자기가 학교의 명령을 어기고 독립운동에 참가했는지 또 어떻게 체포되었는지 말했다. 그는 시편 23편(“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이 유일한 위로가 되었다고 말했다. 동정을 구하는 표정이라기보다는 승리한 자의 모습이었다. 

 

선생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울었지만 루스는 조용하고 침착했다. 루스가 보인 태도에 놀란 내게 교장이 전해준 이야기는 더 놀라웠다.

 

5.

전국의 학교는 사흘 동안 고종황제의 거상居喪을 치르고 있었다. 나흘째 되던 날도 교내는 조용했는데, 새로 온 선생이 내게 “학생들이 북쪽 지방 사람들이 사용하는 두건을 준비하고 있고, 흰옷에다가 짚신을 신고(조의의 표시) 있으니, 문단속을 잘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아침 식사 때 직원들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도쿄에 유학한 학생들이 돌아오고 있는데 우리 학생들이 그들에게 영향을 받고 있는 듯합니다”라고 걱정했다.

 

외국인들은 그렇게 전국적인 행사가 준비된 것을 모르고 있었고, 

《조선독립신문》을 밤에 인쇄해서 배부하는 것을 우리 학생들이 도와주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때는 그런 신문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그 운동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를 처음 깨닫게 된것이 삼월 일일 점심 무렵이다. 

 

학생 하나가 내게 와서 “우리는 모두 파고다 공원으로 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불러요!”라고 했다. 나는 “너희들은 가면 안 돼!”라

고 했고, 그들은 “학생들이 모두 거기에 모입니다. 우리는 꼭 가야 합니다”라고 했다.

 

나는 반대했고 마지막에는 “차라리 나를 죽이고 가라”고까지 말했다. 조금 후에 어떤 선생이 내게, 이리 와서 한 학생 방에 펼쳐 있는 독립선언서를 읽어보라고 했다. “이 글을 읽어보세요.” 그 학생이 순박한 태도로 독립선언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참으로 좋은 글입니다. 우리의 지도자와 목사님의 이름이 서명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참석하는 것이 결코 잘못된 일일 수 없습니다.” 

 

그래도 나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한 학생이 “그럼 선생님이 우리 중 한 사람과 같이 가면 안 되겠습니까?” 했다. 

나는 동의했고 루스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 한편 다른 학생들은 다른 짓을 하지 않고 루스와 내가 종로로 전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 강당에 모여서 나라를위해 기도하겠다고 약속했다. 우리가 차를 갈아타기도 전에 학생 한 무리가 모자를 벗어 흔들며 만세를 부르며 몰려왔다. 그중에는 공립 중학교에 다니는 여학생들도 끼어 있었는데, 루스는 너무 흥분해서 내가 어깨를 잡고 말릴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하지요?” 루스가 물었다. 

 

“남대문으로 가자”고 내가 말했다. 하지만 거기에서도 학생 한 무리가 경찰에게 쫓기며 달려오고 있었다. 루스가 시위운동에 동참하게 해달라고 졸랐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는 돌아가기로 하고 세브란스 병원을 향해서 갔는데 거기에도 사람이 많이 모여있었고 경찰의 칼이 번득였다.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 루스를 잡아끌며 우리 학교 근처까지 왔다. 정문 가까이 오니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가보니 전교 학생들이

이층 난간에 서 있었다. 남학생 이백여 명이 마당에 서서 모자를 내저으며 소리를 치니 우리 여학생들이 화답하고 있었다. 

나는 남학생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당신들은우리 학생들이 있는 데로 오면 안 돼요.” 나는 남학생들을 손으로 떠밀며 말했다. “문밖으로 나가요. 소리를 지르려면 교정 밖으로 나가서 해요. 어서 밖으로 나가요.”

 

6.

나는 선생들을 문마다 배치해서 남학생이 들어오지도,여학생이 나가지도 못하게 했다. 나도 위층 난간으로 올라가서 제일 큰 문을 감시했다. 한 선생이 잠시 돌아선 틈을 타서 여학생 몇이 재빠르게 빠져나가 길거리로 나갔다. 몇 명이 그렇게 빠져나가는 것은 할 수 없었다. 

 

용감한 학생이 나에게 항의했다. 그 학생의 아버지 어머니는 시골에서 살해되었고, 유일한 혈육인 오빠는 칼에찔리고 매를 맞았다. 그 학생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다른 학생들이 일제히 합창을 했다. “나가게 해주세요, 나가게 해주세요, 제발!” 눈물 흘리던 학생은 마침내 빠져나갔고, 그다음에 내가 그를 만났을 때는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이 학생은 정황상 유관순으로 추정된다─옮긴이).

 

3.1운동 당시 한국에 있던 외국인들의 목격담 | 인스티즈




이렇게 학생들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던 중, 밖을 보니 정문 저쪽 편에 경찰이 서 있었다. 그는 잠시 서서 보다가 곧 사라지더니 다른 경찰을 데리고 다시 나타났다. 우리를 감시하던 경찰의 상관은 일본인이었고, 다른 경찰 세 사람은 한국인이었다.

 

나는 이 일본인 경찰관이 친절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아버지 같은 목소리로 학생들에게, 선생님의 말을 들으라고 권고했다. 그렇지만 그가 학생들에게 “선생님 말씀을 따를 사람 손들어봐요”라고 했을 때 손을 드는 학생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자 경찰은 칼을 빼어 들고 학생 중에 덩치가 큰 스무 명 정도를 골랐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학생들에게 다시 한 번 호소했다. “학생들! 내 말을 듣겠다고 약속해요. 내가 학생들에게 잘못된 일을 하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잖아요.” 이 말에 학생들이 두 손을 들면서 포기했고 경찰은 학생들을 잡아내는 것을 멈추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또다시 말했다. “학생들, 내가 학생들 사랑하는 거 알지요?” 다시 그들이 손을 들었다. 경찰이 학생들에게 숨긴 문서가 없냐고 물었다. 내가 보기에 그 경찰은 그래도 착한 사람 같았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우리 학생 몇 명이 문밖으로 나갔어

요. 당신의 명함을 주면 내가 경찰서로 찾아가겠습니다. 그리고 그 학생들도 내 말을 따르겠다고 약속하면 그들을 석방시켜주십시오.”

 

나는 그 후 사흘 연달아 경찰서를 찾아갔다. 하지만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그 학생들은 이미 모두 감옥으로 보내졌던 것이다.

 

----------------

 

옮겨적다보니 긴 글이 되었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화여대 학장이었던 프라이 여사의 마음이 어땠을지 참 먹먹해지더라고요.

 

3.1운동 당시 한국에 있던 외국인들의 목격담 | 인스티즈

https://www.fmkorea.com/3477247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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