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정우열씨는 반려견 풋코와 올해로 열아홉 번째 여름을 함께 보냈다.©정우열 제공
만 18살 5개월의 개와 살고 있다. 나이가 드니 아무래도 전 같진 않지만, 그래도 큰 병 없이 기특할 만큼 건강하게 살아온 편이었다. 아이구, 관리를 정말 잘 해주셨네요, 하고 사람들이 자꾸 날 칭찬하는데, 실은 내가 한 건 별로 없고 개가 알아서 잘 살아준 거라 으쓱하면서 머쓱하다. 어어, 풋코. 잘하긴 니가 잘했는데 칭찬은 내가 받네? 고마워, 미안해. 사람들이 지나가고 둘만 남으면 개에게 속삭이곤 한다. 그런데 지난 5월,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멀쩡하던 개가 갑자기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뒷다리는 땅에 질질 끌리고 고개는 푹 처진 채 헥헥거리며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그 후로 한동안 매일같이 한 시간 거리의 동물병원 입원실에 가서 개는 온종일 링거를 맞았고, 나도 그 옆에 하릴없이 누워 있었다. 그땐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개를 돌보는 것 이외에, 그동안 내 뒤를 바짝 쫓던 근심걱정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생각해본다.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 큰 어른 인간이 개 한 마리 붙잡고 너무 생산력이랄까, 노동력이랄까 하여튼 무슨 력을 낭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 과연 이러는 게 세상이 나아지는 데 먼지 한 톨만큼이라도 기여하는 바가 있을까. 동물병원은 온통 조그만 털북숭이를 끌어안고 세상 근심 다 짊어진 듯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 천지인 곳이라, 어쩌면 생산력이나 노동력, 하여튼 그 무슨 력이 콸콸 새고 있는 구멍인지도 모른다. 누가 억지로 시킨 것도 아니고 어떤 숭고한 대의가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이 사람들은 굳이 스스로 복실이들을 품어서 고통받고 있구나. 사람이 죽음을 맞으면 무지개다리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던 반려동물이 마중을 나와 반겨준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된다.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사람들에게 꽤 위로가 되는 이야기인 것 같다. 고마운 일이지만, 나는 어쩐지 이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한 사람이 전 생애 동안 몇 마리의 (반려)동물을 보살피고 그들에게 얼마나 큰 행복을 주었든, 그러는 동안 그 몇백, 몇천 배 이상의 동물을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것이다. 잡아먹고, 잡아먹기 위해 고통스럽게 키우고, 그러다 수틀리면 구덩이를 파서 포클레인으로 밀어 넣고, 그래도 어떻게든 먹겠다고 또 키운다. 만약 우리에게 무지개다리 건너에서 꿈에도 그리던 반려동물과 재회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전에 마땅히 우리가 도륙한 수많은 동물들을 먼저 만나 빚부터 청산해야 할 것이다. 개의 건강상태는 좀 나아졌다. 우리는 올해로 열아홉 번째 여름을 함께 보냈다. 여름이면 언제나 함께 바다에서 헤엄을 쳤는데, 이젠 안 될 것 같았지만 혹시나 하고 얼마 전 개를 물에 넣어보니 역시나 더는 헤엄치질 못했다. 얼른 개를 물 밖으로 꺼냈다. 응, 괜찮아, 풋코. 그동안 실컷 헤엄쳐서 행복했으니 그걸로 됐지. 앞으로도 뭐든 행복하면 하고, 행복하지 않으면 하지 말자고. https://n.news.naver.com/article/308/0000029426?cds=news_edit추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