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말들이 달라졌으리라
봄은 떠난 자들의 환생으로 자리바꿈하고
제비꽃은 자주색이 의미하는 모든 것으로
하루는 영원의 동의어로
인간은 가슴에 불을 지닌 존재로
얼굴은 그 불을 감추는 가면으로
새는 비상을 위해 뼛속까지 비우는 실존으로
과거는 창백하게 타들어 간 하루들의 재로
광부는 땅속에 묻힌 별을 찾는 사람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가슴 안의 시를 듣는 것
그 시를 자신의 시처럼 외우는 것
그래서 그가 그 시를 잊었을 때
그에게 그 시를 들려주는 것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더라면
세상의 단어들이 바뀌었으리라
눈동자는 별을 잡는 그물로
상처는 세월이 지나서야 열어 보게 되는 선물로
목련의 잎은 꽃의 소멸로
죽음은 먼 공간을 건너와 내미는 손으로
오늘 밤의 주제는 사랑으로
-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더라면/ 류시화
눈을 다 감고도
갈 수 있느냐고
비탈길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답했다
두 발 없이도
아니, 길이 없어도
나 그대에게 갈 수 있다고
- 첫사랑/ 김현태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고여들 네 사랑을
온 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것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 낮은곳으로/ 이정하
모든 소망을 열람하였으나 꿈은 여태 싱싱한 상처를 낸다
나는 회전 목마를 탄 아이처럼 자꾸 뒤를 돌아본다.
너와 함께 행복해지는 법은 알지 못하나
너 없이 삶을 버티는 법도 배우지 못하였으니.
순간은 파도로 몰아치고 봄은 꽃으로 뚝뚝 떨어진다.
언젠가 네 가까운 자리에 놓고 온 심장 자꾸만 뒤척이고 꿈틀거리는데.
오월을 나는 어찌 견디나. 사랑, 너를 어찌 견디나.
- 오월에 나는/ 황경신
이 밤도 파도는 밀려와
잠 못 드는 바닷가에 모래알로 부서지고
사랑은 서로의 가슴에 가서 고이 죽어 가는 일이다
- 인연서설 中/ 문병란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금방 자긍심을 회복할 수 있다.
내 자신이 충분히 소중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타인이 나를 사랑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겠는가.
- 감정수업 中/ 강신주
우리는 서로의 몽타주다
나는 세계를 지우는 일을 했고
너는 세계를 구성하는 구멍에 빠졌던 가난
내가 없었던 세상을 가장 근처에서 만지는 일
네가 없는 꿈을 꾼 적이 없다
예쁜 예감이 들었다
우리는 언제나 손을 잡고 있게 될 것이다
- 연인 中/ 이이체
그만 잊어야겠다
흐린 날 바다에 나가보면
우리들이 인연은 아직 다 하지 않았는데
죽은 시간이 해체되고 있다
더 깊은 눈물속으로
더 깊은 눈물속으로
그대의 모습도 해체되고 있다
- 더 깊은 눈물 속으로 中/ 이외수
내가 첫 사랑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때는
그것을 모두 비워내고 난 뒤였다
찻잔을 비워낸 후
그 후에는 찻잔에 다시 입을 가져다 댈 수가 없었다
그저 오롯이
아쉬움만 남았다
- 찻잔/ 아라가키 유이
내리는 비에는
옷이 젖지만
쏟아지는 그리움에는
마음이 젖는군요
벗을 수도 없고
말릴 수도 없고
- 비 /윤보영
추억은 늘 뒷걸음 치고 기다림은 언제나 앞질러 갔다
지금 이 시간도 1분 후면 추억이 되리라
아, 그때 나는 왜 네 가슴에 별을 심지 못했을까
- 활자 생애 中/ 이기철
아픈데는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
없다, 라고 말하는 순간
말과 말 사이의 삶들이 아프기 시작했다
물소리가 사무치게 끼어들었다
- 눈 사람 여관/ 이병률
먼저 와 서성이던 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그 사이
늦게 도착한 바람이 때를 놓치고, 책은 덮힌다
다시 읽혀지는 순간까지
덮여진 책장의 일이란
바람의 지문 사이로 피어오르는 종이 냄새를 맡는 것
혹은 다음 장의 문장들을 희미하게 읽는 것
언젠가 당신에게 빌려줬던 책을 들춰보다
보이지 않는 당신의 지문 위에
가만히, 뺨을 대본 적이 있었다
어쩌면 당신의 지문은
바람이 수놓은 투명의 꽃무늬가 아닐까 생각했다
때로 어떤 지문은 기억의 나이테
그 사이사이에 숨어든 바람의 뜻을 나는 알지 못하겠다
어느 날 책장을 넘기던 당신의 손길과
허공에 이는 바람의 습기가 만나 새겨졌을 지문
그 때의 바람은 어디에 있나
생의 무늬를 남기지 않은 채
이제는 없는 당신이라는 바람의 행방을 묻는다
지문에 새겨진
그 바람의 뜻을 읽어낼 수 있을 때
그때가 멀리 있을까,
멀리 와 있을까
- 바람의 지문/ 이은규
청춘의 가지 끝에 나부끼는
그리움을 모아 태우면
어떤 냄새가 날까
바람이 할퀴고 간 사막처럼
침묵하는 내 가슴에
낡은 거문고 줄 같은
그대 그리움이
오늘도 이별의 옷자락에 얼룩지는데
애증의 그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사람아
때없이 몰려오는 이별을
이렇듯 앞에 놓고
내가 얼마나 더 외로워져야
그대를 안을 수 있나
내가 얼마나 더 외로워져야
그대 사랑을
내 것이라 할 수 있나
- 내가 얼마나 더 외로워져야/ 유안진
악토버 - Platonic 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