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부산 국제신보 (국제신문의 전신)의 입사(入社) 시험에 1위로 합격하며 기자생활을 시작하였다.[1] 1974년 중금속 오염 실태를 취재해 기사를 연재했는데, 이 기사로 입사 4년차인 만 29세에 한국기자상(7회)을 수상하기도 했다. 조갑제는 당시 박정희를 비판한 글을 자신 만큼 많이 쓴 사람이 없다며, 사회부 기자로서 권력에 쓰러져가는 사람들, 고문 받는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쫓아다니면서 기사를 썼다.[2] 이 과정에서 박정희 정부를 비판하다 두 차례 강제해직 당했다.[3] 또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취재를 자청했던 것이 주요 동기로 신군부에 의해 해직됐다.[1] 특히 이 광주민주화운동 취재는 1985년 양대 월간지에 보도를 내놓기 시작하면서 이 보도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다음인 1988년, 국회에서 광주특위와 5공특위가 열리게 한 기초자료가 되었다.[4]
1981년 상경하여 월간 마당에 창간 멤버로 입사했고 르포 기사 분야에서 일했다. 당시 그의 대표적인 기사가 ‘부산 김근하(金根夏)군 유괴 살인 사건의 내막-하느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는 기사였다. 마당의 2대 편집장을 지낸 후 1983년부터 월간조선에서 일했다.
서슬퍼런 독재정권에서도 자기 목숨조차 귀하게 여기지 않고 투쟁한 언론인..광주특위 5공특위 기초자료도 다 조갑제 자료..
허나 1987년 12월 대선을 보고 1988년 급격하게 사상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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