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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같이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똘망똘망한 새끼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이러는 거야.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안하겠어요?’ 하고. 그래서 너와 새끼곰은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그거 참 멋지지?
시간마저도 그러한 나의 걸음걸이에 맞추어 느리게 뒤뚱뒤뚱 흐르고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은 이미 저만큼 앞장서서 가고 있었으나, 나와 나의 시간만은 진창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상실의 시대 (원제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소년을 따라 호텔로 올라가는 동안 비장한 평정심이 내 심장을 지탱해주었다. 미국식 표현을 빌리자면 ‘올 것이 왔다.’ 발각, 인과응보, 고문, 죽음, 내세, 그 모든 것을 절묘하게 요약하는 불길한 표현이다. 그녀를 별 볼 일 없는 자들의 손에 맡겨놓았지만 지금은 그런 문제로 고민할 때가 아니다. 나는 당연히 싸우리라. 아, 싸우고말고. 그녀를 빼앗기느니 차라리 만사를 끝장내리라.
나는 지금 들소와 천사를,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물감의 비밀을, 예언적인 소네트를, 그리고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떠올린다. 너와 내가 함께 불멸을 누리는 길은 이것뿐이구나, 나의 롤리타.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운동화지.
-응.
-하얀색이지.
-그래.
-가방은 긴 끈 달린 갈색.
-어떻게 알아?
-네 거니까 알지.
그 집에서의 하루는 그 우물에서부터 시작되었어. 엄마가 신새벽에 그 물을 길어올리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지. 아버지와 나도 그 우물가에서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어. 이제는 그 시골마을도 수돗물을 상용해. 우물은 덮개로 덮여있어. 그 집에 가게되면 덮개를 걷어내고 우물 속을 들여다봐. 아직도 저 깊은 우물속에 물이 찰랑찰랑 고여있어. 그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게 되면 기뻐. 내가 본 최초의 물이 마르지 않고 있다는 게 안심이 돼. 그 물을 들여다 볼 때만큼 너를 좋아해.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흙먼지가 커다란 꽃처럼 피어올랐다. 빵공장에서 트럭들이 쏟아져나왔다. 트럭은 빵공장에서 나갈 때는 보름달 빵처럼 부풀었다가 돌아올 때는 러스크 빵처럼 납작해졌다. 길가로는 흰 머릿수건을 하고 하늘색 제복을 입은 처녀들이 소리 없이 지나다녔다. 정자나무 아래에 노인들이 죽은 듯이 잠을 자고 있었다. 매일이 똑같았다. 빵틀에서 똑같은 빵이 찍혀나오듯이 오늘은 어제와 같고 내일도 오늘과 같을 것이었다. 그리고 네가 따라오고 있었다. 매일 따라오는 네가.
*첫사랑, 성석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