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장대비 소리가 루한의 귀를 간질였다.
루한은 빗소리에 창문을 열고 창 안으로 들어오는 비를 그대로 맞았다.
마른 얼굴이 비에 점차 젖어갔지만 루한은 닦을 생각이 없는지 그저 비를 맞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거세어져가는 빗발에 루한은 그제서야 창을 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누이와 자형에 대한 걱정과 하늘에 대한 원망이 섞여있는 한숨이었다.
제가 가마타고 이 집에 올 때에는 참으로 화창하더니 하필 이 때 장마가 시작되다니.
날씨 좋을 때에 의주로 떠나도 한참 걸리는 거리인데 장마 시기에 의주까지 가려면 얼마나 더 시간이 걸릴지.
루한은 머리 속으로 거리와 시간을 계산하다가 머리가 복잡해져 바닥에 벌러덩 눕고 다리를 꼬았다.
그러다가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고 다시 일어나 벽에 등을 기댔다.
벌써 호판의 집에 들어온 지 아흐레가 지났다.
루한은 그 시간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 해 좀이 쑤셔 죽을 지경이었다.
족보가 팔리어도 양갓집 규수처럼 대해준 덕에 종처럼 어디 불려갈 일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치마에 발이 걸려 넘어질까봐 밖에 잘 나가지 않아 거의 방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활발한 성격에 축국까지 즐기는 그에게는 이런 생활이 답답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답답한 생활을 언제까지 해야할지 알 수 없어 암담했지만 누이를 위해서는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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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가 순간 덜컹였다.
아니, 덜컹한 정도가 아니라 크게 흔들릴 정도여서 루한은 그에 놀라 소리를 낼 뻔하다가 꾹 참았다.
아무리 낯이 고와도 사내는 사내다.
다른 사내들처럼 목소리가 걸걸한 것은 아니었으나 여인들처럼 여린 것도 아니었으니 늘 조심해야했다.
"도착했습니다요, 아가씨."
잠시 후, 가마가 멈추고 밖에서 들리는 청지기의 말에 루한은 조심스레 가마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는 제 눈 앞에 떡하니 서있는 대문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집안이 몰락하기 전에 살았던 집도 거대하다 느꼈는데 그 집은 호판의 저택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루한은 청지기가 대문 안으로 소리 지르는 것도, 그에 문이 열리는 것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덜컥 겁이 났다.
지금 제가 들어가려는 집이, 그리고 속이려는 집의 주인이 누구인가.
왕명을 집행하는 행정 기관인 육조의 호조, 그 중 으뜸 벼슬인 호조판서, 호판이 아닌가.
자칫 잘못하다간 저뿐만 아니라 누이와 자형까지 큰 화를 입을 수 있다.
루한은 어쩌면 저 거대한 저택에서 도망치지 못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고위 관직은 노론이 모두 꿰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만약 제가 도망가거나 심기를 거스른다면, 여장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다른 육조인 병판에게 말해 저를 죽이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병판과 호판이 절친한 사이라는 것은 저잣거리 코흘리개도 다 아는 사실이니.
루한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야한다. 누이를 위해서. 자형을 위해서.
그리고 그는 청지기의 부름에 천천히 조신하게 걸어갔다.
발끝에 걸리는 치마가 익숙치 않아 신경쓰였지만 최대한 조심하며 앞을 보고 걸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자 닫히는 문 소리에 루한은 자신의 심장이 같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다짐을 해도 벌써부터 위축되었다.
루한이 다시 속으로 정신차리자는 말을 되뇌일 동안,
청지기가 사랑채의 방문을 향해 조심스레 말했다.
"대감마님, 안에 계십니까요? 아가씨 오셨습니다요."
청지기의 말에 호판은 채비를 하고 나간다 하였고, 청지기는 이 말을 그대로 루한에게 전해주었다.
루한은 그에 알겠다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그 동안 주위를 살펴보았다.
가장 먼저 눈이 간 것은 역시 저택이었다.
밖에서 볼 때보다 더 거대한 저택은 호판의 위치를 정말 실감나게 알려주었다.
같은 벼슬이라도 이리 다르구나.
그리고 그 다음은 담을 살펴보았는데 거대한 대문에 걸맞게 높은 담은 나무를 타야 겨우 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장정 두 명이 합심해서 열고 닫는 대문으로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루한은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도망치기 보다는 들키지 않게 최대한 숨죽여 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듯 했다.
"아가씨, 대감마님 나오십니다."
루한은 사랑채에서 걸어나오는 남자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이 집의 주인인 오 대감은 매우 점잖게 걸어오는 것 같았으나 왠지모르게 그의 걸음걸이가 방정맞게 빠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을 입증이라도 하는 듯이 오 대감의 신발코는 흙에 채여 더럽혀져 있었다.
오 대감이 제 앞에 다다르자 루한은 약간 고개를 숙여 인사를 대신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지 않았는지 모르겠구나."
대감께서도 방정맞게 급히 오신다고 고생하지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라는 말을 속으로 삼킨 루한이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대감께서 보내주신 가마 덕에 편히 잘 도착하였습니다."
"허허,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목소리가 나쁘구나. 고뿔이라도 든 게냐?"
예상한대로 목소리를 아무리 가늘게 해도 사내인 티가 나나보다.
루한은 다시 한 번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소녀, 몸이 유약하여 고뿔이 자주 들어 목소리가 형편없습니다."
"허허, 죄송해야 할 필요는 없다."
부드럽게 말하던 오 대감은 갑자기 짧은 신음소리를 냈고 그 소리에 루한은 살짝 고개를 들어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는 한 여인과 젊은 사내가 이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필시 대감부인 강 씨와 그의 아들 오세훈일것이다.
강 씨는 인자하게 웃는 낯으로 우아하게 걸어오며 오 대감에게 인사를 청했고 오 대감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강 씨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부부 사이가 좋지 않다는 뒷소문이 아주 헛말은 아닌 듯 했다.
"대감, 이 무더운 날에 어찌 나와 계십니까. 몸이 좋지 않다고 하셨는데...
이, 아이 때문입니까?"
인자하게 웃는 낯으로 말을 했지만 강 씨의 말에 적의가 느껴졌다.
저를 향한 투기였다.
그 투기의 이유가 남편을 너무 사랑해서인지, 그저 제가 싫은 것인지는 몰라도 확실한 것은 강 씨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소, 부인. 이 먼 곳까지 왔는데 어찌 마중을 아니 나갈 수 있겠소?"
"호호, 소첩도 그리 반겨주시면 좋을련만... 그보다 소첩,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해보시오."
오 대감은 왜 하필 지금 물어보느냐는 식의 타박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강 씨는 개의치 않고 질문했다.
"대감께선 어찌 노론도 아닌 남인 집안의 아이를 들이시는지요? 게다가 저 아이는 이제 족보없는 계집이지 않습니까?"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 속엔 엄청난 독기가 들어있었다.
몸이 좋지 않다며 바깥 출입을 자제한 사람이 고작 남인 계집 하나 보겠다고 득달같이 달려나온 것을 못마땅하게 느끼는 것이었다.
그리고 강 씨의 말대로 같은 노론 집안의 규수면 어느 정도 이해를 하겠는데 이제는 족보도 없는 남인 집안의 계집을 들여왔으니 속이 뒤집어질만도 했다.
오 대감은 남인 계집과 제 아들 앞에서 이런 소리를 들어야한다는 것이 못마땅해 속으로 혀를 찼다.
방정맞은 년, 어디서 감히...
오 대감은 강 씨에게 참견말라며 호통을 치고 싶었지만 여기엔 종들 뿐만 아니라 남인 계집까지 있다.
안 그래도 부부 사이가 좋지 않다고 소문이 난데다가 함부로 화를 냈다가 남인 계집이 저에게 겁이라도 먹으면 큰일이다.
오 대감은 애써 미소 지어보인 채 대답했다.
"부인은 당파가 그리 중요하십니까? 게다가 이 아이는 비록 남인 출신이기는 하지만 이 아이 아비는 나의 글벗이었소.
벗의 사연을 다 알면서 모른 체 할 수 없기에 거둬들인 것이오.
게다가 족보가 팔리어도 양반은 양반이니 그런 말은 삼가주시오."
거짓말이다. 아버지에게 노론 집안의 글벗이 있을리 만무했고 있다면 누이와 저에게 소개를 했겠지.
게다가 벗의 사연을 다 알면서 모른 체 할 수 없다면 왜 제 누이만 불렀을까.
저는 서얼이고 누이는 양반이라서?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루한이 속으로 비웃는 것도 모른 채 오 대감은 고개를 돌려 루한을 쳐다보며 말했다.
"윤아야, 내가 대신 사과하마. 그리고 경계하지 말거라.
지금의 노론과 소론, 남인은 한 가지에서 나뉜 것 뿐이고 같은 뜻을 가진 스승에게서 배운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니,
나는 우리들이 여전히 한 가지라고 생각한단다.
그러니 경계하지 말고, 걱정말고 편히 지내거라."
그 말에 루한은 어이가 없어졌다.
한 가지? 한 스승? 여전히?
환국이 발생한지 채 50년을 겨우 넘겼을까 말까한데 지금 그 소리가 나오는가?
그 때 노론과 서인들에 의해 남인들이 얼마나 죽었는지 생각하지 않고 말하는 것인가?
"그보다 덥지 않느냐. 이제 너는 우리와 가족과 다름없다.
그 장옷 좀 내리어 얼굴 좀 보여다오."
오 대감의 말에 루한은 그럼 그렇지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루한은 사내다운 손을 최대한 끝동 안으로 숨기며 장옷을 내렸다.
루한의 얼굴을 가렸던 장옷이 사라지자 오 대감은 감탄했다.
장안에서 소문난 미인이라더니 절세가인이라는 이름이 붙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구나.
뒤에서 별 이상한 말을 들으면서까지 남인 계집을 데려온 보람을 느낌 오 대감의 눈은 점차 욕망으로 가득 찼고 루한은 애써 그 시선을 무시하며 미소지었다.
제가 와서 망정이지, 누이가 이 시선을 받았어야 했을거란 생각에 속이 뒤집어 질것 같았다.
그리고 루한은 오 대감의 욕정에 가득 찬 시선을 받으며 조심스레 그의 가족을 살펴보았다.
오 대감은 지체 있으려 애쓰는 욕정 가득한 늙은 뱀같았고,
강 씨는 표독스런, 독기를 품은 뱀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물을 뱀.
그리고 그의 아들 오세훈은 어떤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었으나 마치 간특한 뱀처럼 속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가족 모두가 마치 뱀과 같자 루한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 참, 사대부(士大夫) 집안이 아니라 사대부(蛇大夫) 집안이로구나.
오 대감은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루한을 계속 쳐다보고있자 심기가 불편해진 강 씨가 나직한 목소리로 오 대감을 불렀고 그제서야 정신차린 오 대감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소문이 너의 미모를 다 담아내지를 못 하여 한참을 바라보았구나.
윤아야, 너는 이제 우리 가족이며 너는 저 별당에 머무르거라."
-
깜박 잠이 들었나.
눈을 떠보니 천장이 보였다. 벽에 기대있다가 잠든 것을 누가 침상에 뉘여준 모양이었다.
헌데 누가...
아, 옥이가 나를 눕혔나. 하지만 옥은 나이 어린 여종이었다. 그 아이가 저를 옮길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
"여봐라, 옥이 게 있느냐?"
"네, 아가씨. 찾으셨습니까?"
"옥이 네가 나를 침상에 옮기었느냐?"
"아니요, 도련님께서 하셨습니다."
도련님? 오세훈?
루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남녀가 유별한 이 세상에 방에 들어와 저를 옮긴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이 방에 그가 들어온게냐."
"그건 저도 잘..."
옥이 말끝을 흐리자 루한은 인상을 찡그렸다.
들켰을까 하는 것보다 감사 인사를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 되었기 때문이었다.
왠만하면 그 집안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한참 고민하던 차에 옥이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그리고 도련님께서는 감사 인사를 받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혹시 이 때문에 고민하거나 찾아올지 모르니 미리 일러두라 하셨습니다."
옥의 말에 루한은 고민 덜어줘서 고만굽, 이라고 중얼거리며 실소했다.
진짜 웃긴 놈이구만.
쓰차여서 그 동안 못 왔어용... 그래서 좀 길게 길게 적었는데 끝이... 끝이? 마무리가 이상하네요... ㅋㅋㅋㅋ
그리고 원래 별당은 그 집안 자식들이 머무는 공간이지만 머물 곳이 딱히 없어서 별당으로 했어욯ㅎㅎㅎㅎㅎㅎ
짧은 상식이 드러나넹...
그리고 위에 적힌 蛇는 뱀 사 자 입니다. 뱀같은 양반집이란 뜻으로 썼어요.
마침 발음이 비슷해섷ㅎㅎㅎㅎ
오타 있으면 알려주세요!!
수정수정
언제 완결날까... 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