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15]
"너 진짜 구정모한테 고백했어?"
너도 진짜 간 크다. 요구르트에 빨대를 꽂던 유정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더니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김여주 또라이 기질 어디 안가. 인정하는 부분이였다. 19년 인생을 살아오면서 간 큰 짓도 많이 해봤고, 또라이같은 짓도 많이 해봤지만 이번 사건은 지금까지 쳐 온 사고의 케이스와는 약간 빗나갔다. 지금껏 차곡 차곡 쌓아온 업적을 읊어보자면 야자를 째고 영화를 보러가기 위해 이층에서 뛰어 내렸다가 다리가 부러져 이주간 통깁스를 했었고, 슬리퍼를 던지다가 유리창을 깬다던가, 말뚝박기를 하다가 허벅지 인대가 늘어난다던가 하는 유형들이였다. 한마디로 남들이 보기에 상관관계가 전혀 없어 보이는 남자애한테 고백했다가 대차게 까인 이번 사건이, 평소에 내가 저지르던 사고의 영역에서는 아주 멀리 벗어난다는 말이였다. 그도 그럴것이 오그라드는 옛날 말로 학교 간판이라 불리는 구정모한테 고백했으니 말 다한 셈이였다.
"설마 애들 앞에서 고백하고 까인건 아니지? 그런 미친 짓 한건 아니지?"
"아니, 까인게 아니라니까. 대답을 안한거라니까?"
"그게 까인거지 뭐."
언제 왔는지도 모를 노설아가 유정 옆에 앉아 조곤조곤 속을 긁었다. 화낼 기력조차 잃어버린 나는 마른 입술로 무성의하게 어, 어 하고 의미 없는 대답만 반복했다. 쓸데없이 눈치만 빠른 유정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은건지 조심스럽게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근데 너 걔 언제부터 좋아한거야? "
[햇살반 구정모 A]: give me something, sweeter
w. 박미모
[2019.05.03]
구정모와 처음으로 대면한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벚꽃이 한창 만개하던 봄이였다. 쉬는시간, 점심시간마다 각 반에서 아이들이 떼로 몰려나와 벚꽃나무 아래서 사진을 찍던 시기였다. 벚꽃이 피면 비를 내리겠노라고 하늘하고 약속이라도 한 것인지 매년 벚꽃이 피고 일주일 후에 내리는 비가 꽃잎을 몽땅 쓸어갔기에 아이들은 그 일주일의 순간을 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야, 김여주. 니가 나무 위로 올라가라."
"우리 배려심 넘치는 정아, 나 다리 깁스 푼 지 일주일도 안지났는데."
"에이, 명색이 체육부장이신데. 떨어지면 이 언니가 받아줄게."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최연장자로 승급한 우리들은 학교에서 마지막으로 찍게 될 벚꽃 사진에 심혈을 기울였다. 고심 끝에 한 명이 나무 위로 올라가고 나머지 셋이 떠받드는 모션을 취하기로 했다. 저번주까지 목발을 짚던 나는 당연히 제외일 것이라 생각하여 흔쾌히 동의했는데, 육년 우정에 더이상 약자 배려 칸은 존재하지 않았다. 유정이 웃는 얼굴로 어서 올라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물론 어릴적부터 높은 곳에 오르는건 껌도 아니였기에 다리가 약간 불편하다는 패널티가 존재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는 개뿔. 나는 이날을 기점으로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 속담을 좌우명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다 나았다고 생각한 오른쪽 다리 상태가 여전히 메롱이였던 것이다. 나무 몸통에 왼쪽 다리를 올려 체중을 앞쪽으로 실은 후, 튀어나온 땅을 발판 삼아 오른쪽 다리를 올리는 것까진 무난하게 성공했다. 제대로 자리를 잡기 위해 무릎을 굽히다가 오른쪽 다리에 힘이 탁 풀렸다.
"헉,"
순간 시야가 친구들 뒷통수에서 하늘로 바뀌었다. 즉 뒤로 떨어지고 있다는 증거였고, 최소 뇌진탕일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사람이 죽을때가 되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고 하였던가. 사실 그것보단 사진 찍으려다 나무에서 떨어져 사망한 여고생으로 뉴스에 출연하게 되는것이 훨씬 두려웠다. 그건 진짜 수치스러울 것 같은데. 곧이어 빌어먹을 유정놈의 놀란 토끼눈이 눈에 담겼다. 안그래도 방울만한 눈에 힘까지 주니 꼭 애나벨 같았다. 짧은 십구년 생을 마감하면서 마지막으로 눈에 담는 장면이 저주인형 뺨치는 유정의 모습이라니, 아마 나는 전생에 사람 하나, 아니 둘은 죽인 죄인이였을 것이다. 전생을 곱씹기 무섭게 바로 등에 무언가 닿았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등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지나치게 부드럽고 따뜻했다. 묘한 기분이 들어 실눈을 뜨고 앞을 바라봤더니, 눈 앞에,
"어.. 괜찮아?"
[2019.07.15]
"구정모가 날 받치고 있었던거지. 근데 그게 다야."
"와, 그때였냐? 그날 완전 난리 났었잖아."
"그런 일이 있었어? 야, 그러면 말이 달라지지. 여자애들하고 말 한마디 안 섞어본 앤데."
"불쌍하니까 그렇지, 불쌍하니까. 인성까지 잘생긴 정모가 갸륵한 목숨 하나 건져준거지. 생명은 소중하니까."
대화가 한바퀴 쭉 돌다가 다시 유정으로 돌아갔다. 대화의 내용이 아까부터 묘하게 속을 긁는데 정확히 어느 지점인지는 모르겠다.
[2019.07.19.]
급식으로 스파게티가 나오는 날이였다. 한달간 지켜본 결과 구정모는 반찬이 맛있는 수요일 아니면 스파게티가 나오는 날에만 급식실을 찾았다. 최대한 젓가락질을 천천히 하며 급식실 안을 빠르게 스캔했다. 평소 구정모와 어울리는 무리들은 심심찮게 눈에 띄는데, 이상하게 구정모만 보이질 않는다.
"대체 어딜 간거야."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정신을 어디다 팔아 먹었길래 된장국을 젓가락으로 퍼먹니. 떠먹여 달라고 시위 하는거야?"
진작에 식사를 마친 유정이 옆에서 바르작대며 핀잔을 주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뇌신경 세포는 구정모를 찾는데만 혈안이였다. 한달에 급식실을 채 열번도 찾지 않는 구정모를 오늘도 놓치면 적어도 일주일은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저기, 쟤 구정모 아니야?"
유정의 손가락 끝을 따라가니 식수대에서 남들보다 0.5배속 느린 속도로 물을 마시고 있는 저 종이 인형같은 형상이 보였다. 미간을 찌푸려 자세히 들여다보니 구정모의 뚜렷한 이목구비가 흐릿하게 보였다. 머릿속에서 목표물을 포착하자 몸은 알아서 움직였다.
"야, 어디가. 설마 가서 따지기라도 하려고?"
"어."
"미친놈, 진짜."
나도 이제 너 안말려, 알아서 해. 체념한 유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
"대답?"
"어. 그때 너 대답 안하고 그냥 갔잖아."
이판사판, 더이상 물러날 곳도 없었다. 싫다고 하면 깔끔하게 포기할 생각이였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나도 싫다는 사람 바짓가랑이 붙잡고 추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던 그가 입술을 깨물더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난 기억력 나쁜 사람은 싫어."
"무슨 소리야?"
너를 처음 마주친 순간부터 모든걸 기억하고 있는데.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쑥 내려갔다. 나는 수신호를 잃어버린 안테나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서 있다가, 애꿏은 슬리퍼 앞코만 바닥에 두어번 찔러댔다. 구정모 역시 그런 나를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봤다. 둘을 감싼 기류가 팽팽해 질 쯤,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한적했던 복도가 이동수업을 가는 아이들로 인해 붐비기 시작했다. 체육복을 입고 지나가는 아이를 보자 그제서야 체육실 키를 내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교내에서 가장 극성맞은 체육 선생님의 말씀을 거역했다간 남은 학교 생활을 순탄하게 보낼 수 없다는걸 알았기에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
"구정모. 거기 서서 뭐해? 화학실 안 가?"
"야, 너 더워? 귀가 왜이렇게 빨개?"
"..좋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