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발을 만들어 층층이 쌓인 책들 사이에 끼인 주황색 다이어리를 집어들었다. 그러고선 휑한 책상 위에 걸터앉아 첫 장을 넘겼다. 고등학교 때 쓰던거니까... 진짜 오래된 거네. 툭, 사진 한 장이 떨어진다. 손톱을 세워 사진을 집어들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마구 휘날리는 연분홍색 꽃잎 사이로 피터팬이 보인다. 여전히 사진 속에서도 눈이 부시는 내 피터팬.
"선생님 저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빨리 갔다 와!!"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기다리지 않으셔도 돼요 하하" 저거 또 저런다. 하시는 선생님의 말씀에 입꼬리를 들썩거리며 계단을 두두두두 내려간다. 도저히 못 참겠는 걸 어떡합니까. 내 자리 옆에 바로 창문이 있는데, 한창 잎이 휘날리는 시기라 운동장 옆 산책로에는 온통 꽃잎이 뒤덮혀 보기만 나른해지는 풍경이 연출된다. 저건 찍어야 해! 꼴에 숨긴다고 조끼 속에 넣은 카메라를 꺼내어 셔터를 마구 누른다. "와 진짜 이쁘다-" 뒷걸음질을 하며 여유로이 벚꽃을 감상하는 찰나, 내 등에 뭔가 툭 하고 닿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곳에는 노란색 명찰. '김태형' 시야를 가득 메우는 석자에 당황하고서 고개를 들었다. "아... 미안해." 웃는다. 입꼬리를 잔뜩 들어올려 아랫니까지 훤히 드러내며 맑게 웃는다. 그 미소가 벚꽃의 연분홍색과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피터팬, 내가 그토록 바래오던. 넌 나와 많이 달랐다. 나는 적잖이 소심한 성격에 친구가 많은 편이 아니었다. 반면에 너는 사교성이 좋아 주변에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다. 그런 너는 그런 나를 잘 챙겨주었고 친구가 되어주었고 내 모든 것이 되었다. 내 모든 것이 되어주진 않았다. 되었을 뿐이지, 되어주진 않았다. 그걸 깨달은 순간 나는 날개를 잃은 팅커벨이 된 기분이었고, 웬디가 될 수 없단 걸, 나는 너의 모든 것이 될 수 없단 걸 알아차렸다. 먹을 땐 입가에 묻는 부스러기를 꼭 혀로 핥는 버릇, 양치를 하고선 꼭 칫솔의 물기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세 번 털어내는 버릇. 꼭 우유에 초코가루를 타먹어야 하는 식성, 야채를 골라내고 고기만 쏙쏙 잘도 빼먹는 재주. 너의 모든 것. 그래도 좋았고 여전히 너는 나의 피터팬이었다. 어두운 필름에 비친 모습도 여전히. 나의 피터팬.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내 시야를 가득히 메우는 세 글자, '김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