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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그다지 긴 이야기는 하지 않고 갔다. 

세훈 역시 딱히 물을것이 없었기에 소녀를 일찍 보내었다.

 

 

'지루하네요.'

 

 

상담소 문을 닫으며 한,

 

소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세훈은 다시 곱씹을수록 화가 나는지

손끝에서 빙글빙글 돌리던 펜을 던져버린다.

 

그 때,

소녀는 꽤 흥미를 잃은 눈을 한 채 그를 바라보았었다.

 

일 다시올게요,

하는 말도 없이 사라질 정도로.

 

"으……."

 

꼬맹이한테 무시당한 기분이었다.

그는 잠깐 고개를 들어 소녀가 남겨둔 기록을 본다.

꽤 정갈한 글씨체였다.

 

[성명: 알아서 뭐해


나이: 말 안해줄래


병명: 당신이 정할 것


주소: 찾아오지 않았으면 하니 적지 않음


취미: 산책


직장: 백수가 보면 통탄할 항목이잖아, 남을 좀 배려해.


기타: 재미없는 상담사다.]

 

 

 

"……."

 

 

세훈은 짜증 가득한 표정을 짓는다.

선배가 이 꼬마 손님을 떠맡긴 이유가 뭔지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따지고 싶었지만……

그는 이미 학회의 일정으로 외국으로 떠나버린 참이었다.


세훈은 한숨을 흘리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차라도 마실 심산으로 전기포트에 물을 올리고 다기와 쿠키를 꺼낸다.

적당히 데워져 끓기 직전에 포트의 전원을 끄고 찻주전자에 물을 붓는다.

 

향긋한 향이 퍼져 올라왔다.

 

 

 

"좋은 차가 있었으면서 한 잔도 안 내준거예요?"

 

 

 

세훈은 잠시간 저 꼬맹이가 언제 다시 들어왔으며 왜 이미 테이블에 앉아 있는지에 대해 고민해야했다.

소녀가 쿠키를 우물거리며 그가 쓰려 꺼내놓은 찻잔을 쥐고 따뜻하다며 웃고있었다.


세훈이 멍하니 서있자 소녀가 다가왔다.

그러곤 티포트에 담긴 진홍빛 액체를 찻잔에 따른다.

익숙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재미없는 건 똑같아 보이지만."

 

 

소녀는 몇번 더 쿠키를 오물대다 말을 잇는다.

 

 

"해줄게요. 내 얘기."

 

 

세훈은 찻잔을 하나 더 꺼내 차를 따른다. 소녀의 앞에 앉는다.

소녀는 짐작하기 어려운 감정을 담은 표정이다.

 

그러더니 이윽고, 입을 연다.

 

 

"자그마한 숲길이었어요, 내가 처음 간 길은."

 

 

 

 

숲길은 어떤 집으로 이어져있었어요.

통나무집이었죠.

나는 조금 빨리 걸었어요.

평평한 흙길 위로 아마 한참을 걸었을거예요.

 

멀리서 작은 점 하나로 보이던 집은 점점 가까워졌죠.

 

오두막집이었어요.

 

나는 조금 들어가기 망설여졌지만,

왜인지,

문을 열었어요.

 


문은 조금 차가웠어요.

 

-차가웠다구요?

 

 

네. 조금 차가웠어요.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갔어요.

안에는 조금 낡은 가구들이 있었죠.

 

끄트머리가 조금 부스러진 낡은 테이블 위에는 요리한지 조금 된 거 같은 빵과 스프가 있었구요.

배가 고프긴 했지만 먹지는 않았죠.

 

꺼림칙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그랬을 뿐이죠.


거실로 보이는 걸 지나쳐갔어요.

밖에선 조금 넓은 집으로 보였는데,

실내에 들어가보니 그다지 넓진 않더라구요.

 

어쨌든 나는 조금 더 들어갔죠.

작은 방이 여러개 있었고,

작은 아기가 누워있었어요.

 

 

-어떻게 생긴 아기였죠?

 

 

포대기에 고이 싸인, 왜소하게 생긴 아기였어요.

비쩍 말라서 좀 안타까워 보이기도 했는데,

아무튼 난 상관하지 않았거든요.

 

그 애,

눈을 감고서,

누워 있다기보단,

아, 그래요. 차라리 쓰러져 있었다는 게 맞았겠네요.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아기를 지나쳤죠.

지나치면서, 그냥 실감나는 인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숨을 쉬려고 가슴이 위아래로 움직이지도 않았거든요.

그러고 나니 다음 방으로 통하더군요.

그 방에는 대여섯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애가 서있었어요.

그대로 멈추기엔 조금 어려운 자세였는데,

용케도 그러고 있더라구요.

 

 

-어려운 자세라니, 어떤 자세죠?

 

 

막 뛰어나가려고 할 때의 그 자세 있죠? 그 자세요.

아무튼 그 여자애도 지나쳐서, 다음 방으로 갔어요.

 아까 그 여자애랑 비슷하게 생겼지만 조금 더 큰 여자아이가 있었죠.

그 아이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었어요.

 

 

-말을 걸어봤어요?

 

 

말을 하지 않았어요.

여러번 불렀지만 아이는 무시한 채 울었죠.

그러고보니 그 애, 옷을 걸치고 있던데.

 

아, 그러니까 입지는 않고, 그냥 걸치고 있었단 거죠.

 

 

-어떤 상황일 것 같았어요?

 

 

대충 짐작은 가지만 말하지 않을래요.

여러번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그냥 지나쳐왔어요.

그리고 방 문을 열려고 했지만,

 

잠겨있었어요.

 

 

네, 그게 처음 본 거였어요.

그러고 옆에 있던 쪽문으로 빠져나왔어요.

조금 꿈같은 얘기죠? 잘 알아요. 다들 그렇게 얘기하니까요.

하지만 그건 분명한 현실이었어요.

 

아무도, 믿지 않지만.

 

 


-

 

 


소녀는 이야기를 마치고 조금 남은 찻물을 한 입 머금었다.

세훈은 조금 어지러운 느낌이었다.

 

저 이야기는 꿈일 터.

그렇다면 그 속에 녹은 무의식을 추출해내야만 한다.

 

 

하지만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 단계적인 방 속에서의 '소녀'가 희연이라고 하더라도 대략적인 상황을 알지 못하고서는 그 기억도 무의식도 끄집어낼 수 없다.

아니, 대충 끼워 맞춘다고 해도, 그 오두막집에, 낡은 가구나 식은 음식이나 차가운 문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세훈이 메모하던 리갈패드를 내려다본다. 전혀 연관성이 없는 단어들의 나열이었다.

 

하긴, 첫 상담에서 모든 걸 간파하면 그게 천재가 아니고 뭐겠어.

 

대학 시절에도 성적 우수와는 거리가 멀었던 그다. 그는 그냥 대략적인 골격은 잡혔으니 다음 상담에서 마저 살점을 붙여나가겠다 생각했다.

 

 

"일단 오늘 상담은 여기까지하죠. 예정된건……일주일에 세번이지만, 뭐. 언제든 와요. 손님도 없으니까."

 

 

세훈이 짧게 웃으며 말한다.

소녀는  물끄러미 그 웃는 낯을 보더니 기어들어갈듯한 목소리로,

 

"매일 올거예요."

 

한다.

 

 

"마시고싶은 차를 들고 오는것도 좋겠죠. 없는것도 많으니까."

 

 

세훈은 소녀의 말에 덧붙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찻주전자는 텅 비었다.

 

희연은 힐끗 찻잔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곤 마지막 남은 쿠키를 마저 입 속에 넣는다.

 

 

"쿠키 맛있네요."

 

 

"아, 요 앞 가게에서 사왔어요. 한 팩에 12개 들이. 삼천……."

 

 

"직접 만들어 먹는 게 더 낫지 않아요?"

 

 

"오븐도 없는데……."

 

 

"직접 만드는 게 더 좋아요."

 

 

소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훈이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린다.

 

'아니 뭐 어쩌란거야…….'

 

상담소가 아니라 카페가 되어가는 기분이다.

 

 

 

 

 

"오랬다고 진짜 올 줄은 몰랐는데요."

 

 

 

세훈이 빙글거리며 의자를 돌리다 소녀를 본다.

단정하게 교복을 입고 있는 소녀는 한 손에 바스락거리는 비닐 봉지를 들고 서있다.

 비닐 봉지 속에 뭐가 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지 무거운 건 아닌 것 같았다.

 

 

"받아요."

 

 

소녀는 툭 던지듯 이야기하고 오른손을 내민다.

조금 가까이서 보니 반투명한 봉지 안에 무언가가 들어있다.

세훈이 그것을 받아들고 안을 본다.

앙증맞은 리본으로 포장된 쿠키였다.

 

 

"산거예요?"

 

 

세훈의 물음에 소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아니, 잠깐 노려본 것도 같았다.

소녀는 묵묵히 쿠키를 꺼내 세훈의 앞으로 던져놓는다.

 전혀 예쁘지 않은 모양이다.

삐뚤빼뚤한 원과 불규칙한 초콜릿칩의 분포.

샀다고는 믿기지 않는 비주얼이다.


세훈은 잠시 이 쿠키를 입에 넣어야하나에 대해 고민했다.

소녀는 이미 하나 뜯어 입에 넣었다.

꽤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다.

 맛있는 모양이다.

 

 

"요리도 할 줄 아나봐요."

 

 

"……."

 

 

"맛있네요."

 

 

"……."

 

 

"차라도 내올까요?"

 

한참만에 소녀는 대답한다.

 

"루이보스. 저지방 우유에 밀크티로 부탁해요."

 

 

세훈은 슬쩍 웃고는 전자레인지에 우유를 넣고 물을 끓인다.

소녀는 물끄러미 세훈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키가 참 크다, 고 생각했다.

 


살짝 곱슬거리는 그의 머리카락은 색이 조금 바랜듯한 흑갈색이었다.

남자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마르고 예쁜 다리는 진청색 청바지로 감싸져있었고,

그 위론 하얀 의사 가운이 드리워져있다.

소녀는 빤히 치마를 입은 제 다리를 내려다본다.

문득 여자란 사실이 부끄러워지는 것도 같았다.

 


오세훈.

 

고리타분한 말만 늘어놓는 다른 상담사와는 다르게 조금 직설적이고 게으른 상담사.

조금 긴 곱슬머리를 한 느긋한 남자.

차를 좋아하고 쿠키 한조각의 여유를 사랑하는,

 

 

나와 같은 사람…….

 


소녀는 눈을 감았다뜬다.

친구가 되고싶다.

조금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그녀였지만,

 

왠지 그랬다.

그냥 그랬다.

 

친구가 되고싶다고.

 

 

"있잖아요."

 

 

그가 뒤돌아본다. 까만색 눈동자가 의문을 담고서 그녀를 향한다.

 

 

"잡담도 괜찮죠?"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소녀는 살풋 웃는다.

 

 

"웃는 거 예쁘네요."

 

 

"……."

 

 

소녀가 당황한듯한 표정을한다.

 세훈은 그게 또 웃긴지 웃어버린다.

고등학생이나 됐으면서 순진한 어린 아이같다.

 

귀엽네.

 

그는 중얼거리듯 이야기했다.

 

 

"네?"

 

 

"아니에요. 그럼 그 잡담이란거 한번 해보죠."

 

 

세훈은 따뜻한 밀크티가 담긴 찻잔을 내민다.

소녀는 두 손으로 찻잔을 쥐고 한 모금 마신다.

 

달콤한 시럽 내음.

 

지나치게 달지는 않은 맛이었다.

 

 

"학생때 주로 뭐했어요?"

 

 

"나야……. 공부했죠. 친구도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라서요."

 

 

"놀지도 않았어요?"

 

 

"주로 자거나 아니면 책 읽거나 했죠."

 

 

세훈은 키득거린다.

소녀는 빤히 그를 바라본다.

 

학창시절부터 재미없었구나…….

 

소소하게 감탄한다.

 

 

"서류에서는 알 수 없는 뭔가가 있겠죠?"

 

 

"사람의 모든 정보를 서류화할 순 없으니까요."

 

 

"궁금하네요."

 

 

"비밀이에요. 궁금하면 저랑 많이 얘기해야 할걸요!"

 

 

 

소녀는 장난스럽게웃는다.

세훈이 빙글 웃어버리며 쿠키를 집어든다.

 

 

친구가 생긴 것 같네.

 

 

세훈은 즐거운듯 얘기하는 소녀를 바라본다.

소녀의 뒤로 보이는 창문은 서서히 노을의 주홍빛에 물들어간다.

 

슬슬 문 닫을 시간이지만…….

 

세훈은 얘기를 끊고싶지 않았다.


그렇게 해가 진다.

 

세상은 황혼에 뒤덮인다.

 

 

 

 

 

 

 

세훈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빤히 자신을 바라보던 소녀의 눈동자가, 추위에 달아오른 발그레한 두 뺨이, 옅은 분홍색을 띠던 입술이, 무엇보다도, 세상 모든 것에 흥미를 잃은, 그러나 다만 눈 앞에 놓인 찻잔과 찻물에만은 흥미를 가지는, 그 눈빛이, 새까만 천장 위로 아로새겨졌다. 그는 멍하니 속으로 그녀의 텅 빈, 공백같은 새하얀 웃음을 떠올렸다. 사랑스러웠다. 마음에 들지 않는 첫인상과 달리, 소녀는 사랑스러웠다. 그 외모가 특히 눈에 띄던 건 아니었으나, 그랬다. 그저 그랬다.

 

세훈은 생각을 그만두려 눈을 꽉 감아버렸다.

그러나 그럴수록 한구석에서 차갑게 식혀내던 관심이 서서히 고개를 쳐들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불판 위에 둘러 놓은 기름마냥, 이곳저곳에 튀어 오히려 역효과만 냈다.

데인 듯한 뜨거움, 세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찬 물을 세 잔이나 마시고 나서야 멍한 정신을 다잡을 수 있었다.

 

도대체가, 하고, 낮은 탄식을 흘리며 그는 눈을 감았다. 자자, 자야한다. 그래야 이 빌어먹을 감정도 어떻게든 가라앉을 것이다.

 

 

 

마침내 완연히 어둠이 잡아먹은 방 안은, 그의 숨소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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