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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혁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오늘 처음으로 '딸기 요거트 프라푸치노 벤티 사이즈 주문하신 고객님'이라는 갑갑한 굴레에서 그가 저 스스로 벗어난 거다. 그는 언젠가부터 자발적으로, 우리 사이에 세워져있던 다소 높다란 벽들을 하나 둘 씩 허물고 있었다.
급하지 않게, 부담스럽지 않게.
그러나 정확하고 분명하게.
"진혁이에요, 이진혁."
이진혁, 아마 한 두세 번쯤 더 말했던 것 같다.
자기 이름이 이진혁이라고.
이진혁. 한 글자 한 글자 강조하듯 힘주어 말하는 그 음성, 퍽 진지해진 말투와 미간.
그 목소리를 바로 코앞에서 듣는 것도 모자라 내게 줄곧 닿아있는 저 빤한 눈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이상하리만치 숨이 막혔다. 힘들었다. 괜히 티슈 한 장을 뽑아 들곤 묻은 것도 하나 없는 손등 어딘가를 벅벅 닦는 척했다. 덕분에 손등이 벌게졌다. 그런다고 숨겨질 부끄러움도 아니었지만 그렇게라도 해야했다.
"까먹음 안 돼요."
"..."
"진짜…나 확인할 거야."
이름이란게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닌데, 형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저러면 왠지 두 손에 꼭 쥐고 있어야 될 것만 같아진다.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그 석 자를 머릿속에다 펼쳐 놓고 여기저기로 굴려보고 또 굴려보았다. 잘 갖고 있으라고,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손에 쥐고 있다가 두고두고 꺼내보라는 말처럼 들려서.
뭐 사실 가끔 어떤 건 형체가 있는 것보다 더 소중한 법이기도 하니까.
별 다른 내색 한 번 않고 카운터 앞에선 그가 영수증은 버려달라 말했다. 얼마 나왔는지 구태여 확인도 하지 않았다.
두 손으로 건네받은 검은색 무광 신용카드를 바지 뒤춤에 꽂혀있던 가죽 반지갑 맨 앞 칸에다 도로 집어넣곤 그냥 뚜벅뚜벅 앞장서 걸어간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간결하고 깔끔했다. 그게 전부였다.
마른 주제에 꽤 다부진 구석까지 있는 널찍한 등판을 말없이 쳐다 보았다.
뭐가 그리도 급했던 걸까. 굳이 나를 성큼성큼 앞질러 제 등을 보이고 서있는 그를 아주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괜히 덩달아 조급해진 마음에 잔 걸음으로 따라 붙는 내게 이진혁, 그가 조용히 말했다.
"천천히 와도 돼요, 넘어져."
내게 굳이 뒤를 보여야 할 정도로 그토록 급한게 무엇이었는지 불현듯 솟았던 궁금증은 의외로 쉽게 해소됐다.
오랜 습관처럼 몸에 밴 다정함이 향하고 있는 곳이 어딘지를 깨닫게 된 그 때, 하루 종일 서있느라 퉁퉁 부어버린 다리로 느릿느릿 걸어오는 나를 위해 그저 가만히 문을 잡고 서있는 그 사람의 너른 등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날 향해 돌아본 얼굴에 핀 그 깨끗한 웃음을 보며 거듭 생각했다.
'이진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란 사실, 당장 구 하나만 갖고 뒤져봐도 몇 십 명은 더 되겠지만, 세상에 이 사람 같은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을 거라고. 어쩌면 그 조금도 닮은 사람조차 절대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 없이 봐도 결국 생각 없인 볼 수 없는 그였다.
사람이 이토록 인간문화재처럼 대체 불가능할 수 있는 걸까.
이렇게 유일무이할 수가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이상한데.
여름날의 다람쥐를 좋아하세요?
04. '걱정'에 관하여
v
조금의 변주 따윈 용납하지 않았다. 변화란 요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그저 틀에 박힌 일상 속을 매일 같이 걷던 나였다.
카페 출근이 있는 주중, 알람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무조건 7시로 고정. 반도 채 못 뜬 눈을 잘 어르고 달래 고양이 세수를 끝내고 아무렇게나 옷을 갈아입으면 곧 집을 나서야 할 시간이 참 빨리도 찾아온다. 대충 산 사람 같아만 보일 정도의 화장을 한 상태로 부랴부랴 카페로 향하고 있을 때면, 출근하기도 전에 퇴근을 향한 욕구가 쉴새 없이 샘솟아 문득 서글퍼지곤 했다.
애초에 여유로이 아침을 챙겨 먹는 것 따위의 사치는 부릴 수가 없었다. 다 타버린 식빵 조각을 입에 욱여넣기라도 할 수 있으면 그건 다행인 편에 속했으니까.
그건 꽤 오래됀 습관이었다. 시간이 없어 끼니를 어쩔 수 없이 못 챙겨도, 몸살을 시들시들 앓게 되어도 언제나 그저 그러려니 하는 것. 아무렇지 않은 척 같지도 않은 오기를 부리는 일.
누군가의 애정 어린 걱정을 듣는 건 고사하고, 정작 나 조차도 내 자신을 방치하는데 익숙했다. 아프면 아픈데로 슬프면 슬픈대로 그냥 내버려뒀다. 언제나 그랬듯 나는 그 원인에다 나의 지난 모든 일들을 끼워 넣었다. 그 끝엔 언제나 나를 향한 자책이 있었다. 그래서였겠지. 사랑 따위 받을 자격 없다 여겼고 그럴 일도 애초에 없을 거라 굳게 믿었다.
그만큼 '걱정'이란 건 내게 너무나도 낯선 감정이었다.
그런데 이게 왠걸,
〈 밥은 먹었어요?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사는 삶이 지긋지긋하다고 하늘에다 몇 번 하소연 좀 했더니, 신께서 왠 다람쥐 한 마리를 곁에 보내주셨다.
〈 바빠도 밥 챙겨먹어요.
〈 냉방병 안 걸리게 조심하고.
밥은 먹고 일하는지,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그는 내게 묻고 또 물었다. 다리는 좀 어떤지, 나를 힘들게 만드는 나쁜 진상 손님은 없었는지 사소한 모든 걸 궁금해했다. 그는 마치 내 하루를 제 하루처럼 여기고 있었다.
〈 오늘도 웃게해줘서 고마워요.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두드려서는 그 어떤 것도 열지 못한다는 걸 너무 잘 아는 사람이었다.
세상 무해한 그가 나에겐 어쩐지 참으로 유해했다.
v
8월 한여름에 느닷없이 감기에 걸렸다.
아니, 실내 온도 준수 뭐 그런 것도 모르는 건가 다들. 에어컨 온도 1도만 올려도 카운터로 찾아와 노발대발 민원을 넣는 사람들 때문에 오들오들 떨면서도 에어컨 밑에 서있던 게 아무래도 화근이었다. 어쩐지 요 며칠새 몸이 물에 가득 젖은 솜처럼 무겁다 했지.
아침엔 목이 좀 칼칼하니 따갑고 잔 기침 좀 하고 말더니, 점심 시간을 넘어가니 머리까지 띵하니 아팠다. 드문드문 추웠다 더웠다 추웠다 변덕을 부렸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지, 이쯤 되니까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간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았다. 주문 받는 내내 혀가 지맘대로 꼬였다. 이 속도 모르고 마주선 손님들이 하나 같이 인상을 팍 쓴 채 돌아간다. 서러운데 서러워 할 힘도 없었다.
그러거나 말 거나 밀려드는 주문에 이렇게 과로사로 죽는 건가 했는데 만리장성을 이룰 것처럼 즐비하게 늘어서있던 줄이 드디어 사라졌다. 아니나 다를까 모니터를 봤더니 벌써 두 시가 다 된 시간이다. 시계 보는 버릇을 심어준 그 시간. 잠시 나가서 편의점 두통약이라도 사올까, 아니면 조퇴를 하겠다고 해볼까 고민했는데,
시간을 확인하자 마자 빠르게 포기했다.
띠링-♪
그도 그럴게, 당연히.
이진혁 그가 오는 시간이었으니까.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온다.
언제나처럼 그가 내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와 섰다. 나는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걱정해주는 사람 한 명 생겼다고 그새 어리광이 늘었는지도 모르니까. 틈을 보이는 것에 대한 공포증이 있었다. 그래서 아플 여유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라 여겼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저 깨끗하게 웃었다.
"주문…딸기 요거트 프라푸치노로 드리면 되죠."
내가 물었다. 대답이 없어서 이마에 맺힌 땀을 멋쩍게 훔쳐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무어라 대답도 않고서 나를 그저 빤히 바라만 본다. 기분 탓인지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열 받은 것 같기도 한 그 생소한 얼굴. 공항 보안 검색대 통과하는 사람처럼 괜히 쫄아서 나도 모르게 그의 눈치를 보았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가 드디어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나는 모든 행동을 멈춘 채 그를 마주했다.
"그거 말고,"
"?!"
"얼그레이 티 한 잔 주세요."
예상을 단번에 뒤집는 말을 툭하고 던져 놓는다. 그러면서 표정 변화도 한 번 없다. 창피하게 괜히 아는 척 했다. 그냥 조용히 입 닫고 있을 걸. 열 때문인지 민망해서 그런지 삽시간에 얼굴이 화르륵 달아 올랐다.
왜 갑자기 차를 달라고 할 까. 표정은 왜 또 저렇게 죽상일까. 나한테 뭔가 화가 난 게 있는 것 같은데. 아픈 머리에 그에 관한 잡념이 한 가득 들어차 왱왱 골을 울렸다. 금방 심란해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 포스기를 두드리는데 안 그래도 열 나는 손이 자꾸만 덜덜거려 창피했다.
"…마시고 갈 거에요."
기다란 손가락으로 제 관자놀이 어딘가를 매만지던 그가 조용히 말했다. 처음으로 마시고 가겠다고 한다.
오늘은 또 어디서 무슨 바람이 불어 그럴까. 그런데 왜 아직도 저런 표정이지? 별의 별 생각이 다들다보니 불현듯 울고 싶어진다. 서럽다. 아프고 힘든 건 누구보다 내색하지 않을 자신이 있던 난데, 등줄기까지 간지럽히던 그 다정함이 언제 그랬냐는 듯 싹 가셔버린 그의 차디찬 표정은 정말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 일 없는 척 하고 싶은데, 생각 이상으로 어려웠다. 그새 어리광이 늘었다는 예상이 어쩌면 맞아 떨어질런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픈 것보다 더한 서러움도 꾹 참고 말을 이어가던 내게 아랫입술을 한 번 깨문 그가 슬쩍 입술을 뗐다. 말로는 쉽게 표현 못할 시선은 여전히 내 멍한 얼굴에 닿아있었다.
"그거…마셔요."
"네?!"
전보다 조금은 누그러든 표정으로, 그대신 세상 모든 걱정 한 아름 끌어다쓴 표정으로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말해도 못 알아 듣는 내게 그가 가만히 턱짓했다. 그거 마시라는 뜻이다. 몸살 기운에 노곤해져있던 정신이 갑자기 확 들었다. 햇빛을 너무 가까이서 쐬서 그랬다. 나는 어쩐지 감기를 안겨다 준 에어컨 바람보다 태양빛 앞에서 더 무력해졌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오히려 그가 더 울 것 같은 얼굴로 날 보고 있다.
저 얼굴을 난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런지.
"약은."
"…,"
감정을 전하는데에 그리 많은 글자가 필요하지 않다는 걸, 그를 보며 깨닫는다. 단 두 자 말하는데도 가슴이 철렁했다. 약은. 낮고 곧은 그 음성.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먹었다고 거짓말 하는 것도 싫었지만 사실대로 말하는 건 더더욱 싫었다. 누군가에게 내 안위를 맡기는 것도, 나에 관한 걱정을 주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대답하지 못할 거라는 걸 이미 알고있는 듯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따 같이 병원 가요."
"…?"
"데리러 올게."
찬 거 먹지 말고. 날 향한 걱정이 제 운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말했다.
이것 또한 대답하지 못했다. 말하는 법을 까무룩 까먹은 사람처럼 뇌가 일시정지했다. 도무지 생각을 해봐도 맞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덕분에 솟구치는 열이 그칠 줄을 몰랐다.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목이 따가웠다.
아파서 그런 거겠지. 정신이 없어서 그런 거야. 갑자기 펄펄 열이 끓는 이유를 바로 눈앞에 세워 두고 아무 생각이나 했다.
나온 허브티를 도로 내 손에 쥐어 준다. 손과 손이 슬쩍 맞닿았다. 열 끓는 내 손이 저 손에 닿자마자 그가 다시금 나를 올려다본다. 또다시 나온 그 울 것 같은 얼굴. 난 정말 괜찮은데. 아무렇지 않은데.
왜 내가 아픈 것 갖고 저런 얼굴을 하는 걸까. 화도 났다가 열도 받았다가, 금방이라도 눈물 몇 방울 쏟을 것 같은 얼굴을 했다가.
"…아프지마요, 속상해."
마지막 말을 끝으로, 안 그래도 띵하던 머릿속이 그야말로 암전 상태가 되었다. 그 자리에 고스란히 뿌리 내린 나무처럼 그대로 멈춰버린 나를 두고 그가 사라졌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지 몇 번씩이고 뒤를 돌아가면서 그렇게.
나는 그가 쥐어주고 간 허브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저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기가 쏙 달아 날 것만 같은 그 허브티를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처음으로 쉽게 낫고 싶지 않다는 시답잖은 생각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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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너무...오글...진부...사죄합니다...
이번편 따분 역대급이라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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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댓글 읽으면서 눈물 찔끔하다는 그 중요 사실 다들 아실런지...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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