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혁 잊을 수 없는 사람 눈을 뜨고 보니 사방이 허했다. 하얗고 꿈만 같은 게 내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는데, 잘 생각해 보니 어제 피를 질질 흘리는 채로 쓰러졌었다는 게 떠올랐다. 설마 멀쩡하게 잠에서 깼을 리는 없겠고, 아마도 이건 죽은 후이리라 싶어 몸을 더듬었더니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어찌 됐든 죽었으니 뭐든 다 해 봐야겠다 싶어 첫 발을 내디뎠지만 어쩐지 붕 뜬 감성에 기분이 묘했다. 죽은 후에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싶어 생각해 봤지만 딱히 죽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는 것 같아 머릿속이 공허했다. 밍기적밍기적 걸음을 옮겨 어디론가 움직이긴 했지만 대체 어딘지도 모르겠고, 죽기 전보다 가벼운 몸이 어색해서 나는 그냥 그 자리에 다리를 접고 앉았다. 내가 죽은 건 전부 김태형 탓이었다. 이 이야기를 하자면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김태형은 내 중학교 동창이었다. 나는 김태형과 크게 친하지 않았어서 김태형을 그저 그랬던 애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랬는데 몇 년 전 연말부터 발신자 표시 제한이 걸린 전화가 한 통씩 걸려오기 시작했다. 딱한 말도 없이 한참을 규칙적인 숨소리만 들려 주던 통화는 연말마다 걸려왔고 나는 그걸 이상히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며칠 전부터 나를 쫓는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련히 지나가는 사람이겠거니 싶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에 대한 의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뒤를 돌아 따라오던 사람을 노려보자 그가 벽 뒤로 몸을 숨겼다.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이내 다시 나를 향해 걸어왔다. 나는 뭔갈 생각할 새도 없이 남자의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고 이내 남자도 나를 따라 뛰어오기 시작했다. 잠시 간의 추격전 끝에 남자는 내 손목을 낚아챘다. "내 얘기 좀 들어 봐!" "들을 생각 없어!" 그러고선 남자의 몸을 아무렇게나 때렸지만 남자는 저항하는 내 몸을 끌어안고 놓을 생각을 않았다. 일방적인 난투극 끝에는 남자의 팔을 문 내가 있었고, 그 다음 장면엔 내 머리를 벽돌로 내리친 남자가 있었고, 그 다음 장면엔 허망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는 김태형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김태형이 괘씸하기도 했고, 그 전말이 궁금하기도 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김태형을 찾을 필요 없이 안개가 걷혔고 김태형의 앞엔 경찰 하나가 앉아 있었다. "그래서 걜 왜 죽였는데?" "말했잖아요, 좋아한다고.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혁이한테 내가 잊을 수 없는 존재가 됐으면 좋겠어서요." "완전히 미친 놈 아냐 이거." 김태형이 경찰의 말에 개의치 않고 내가 있는, 아마 제 눈엔 허공일 공간을 바라봤다. "나한테도 혁이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이거든요. 아저씨도 첫사랑 못 잊었잖아요." "몰라 이 미친 놈아." 김태형이 그렇게 말하고서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소름끼치는 웃음을 끝으로 시야가 점점 흐릿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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