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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 녀석은, 나에게 남자사람친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유년기부터 우리는 지독시리 붙어다녔기 때문에 내 친구들이나 전정국 친구들은 함께 노는 자리에 둘만 빠진다고 해도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그 말은 우리 둘이 함께 있는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수순이 되었다는거다.
언제부터인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거리가 결코 가깝지 않은데도 그 녀석은 나를 여자라는 이유로 항상 집 앞에 데려다 주곤했다.
일종의 버릇이었다. 서로의 인생에 서로가 빠지면 서운한, 그리고 섭섭한. 하지만 서로를 친구라고만 정의하기에도 섭섭한.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아이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묘해지던 시점이. 내가 어느 순간부터 그 녀석과의 신체접촉을 피하고 눈 마주치는 것을 어색해하던 시점이.
그리고 그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자각한 시점도. 모두 얼마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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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술 공부를 하는데 종종 전정국을 모델로 썼다.
싫은 척 하면서도 완성된 그림을 선물로 툭 던져주면 입꼬리가 슬핏 올라가는 모양새가 퍽 귀여워서. 곱상하게 생긴 외모도 한 몫한다.
티는 안 내지만 크로키 할 때 선을 따면서 가끔 감탄도 한다. 쟤는 대한민국 평범한 고딩인거 빼면 비쥬얼이 정말, 대박인데. 자기도 저 잘생긴건 충분히 알고 있을거다.
오늘도 주말이라고 롤이니 뭐니 피씨방 가려는걸 억지로 붙잡아서 앉혀놨는데 가만히 있으라니까 하품을 쩍- 한다.
" 야, 넌 나말고 친구가 없냐? "
" 어, 그니까 제발 좀 가만히 있어. 도대체 어젯밤에 뭘 했길래 일분에 한번씩 하품을 하냐. "
눈 끝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날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전정국의 종아리를 발로 까주고 다시 크로키를 이어갔다.
매번 불러내서 틈틈히 그려놓은 덕에 거의 다 완성이 됐다.
힘들어 하는데 계속 앉혀놓긴 뭐해서 남은건 알아서 마무리 하기로 하고, 멀뚱멀뚱 나만 보고 있는 정국이의 등허리를 팡팡 두드려줬다.
" 수고했다. 나머지는 나 혼자 할게. 피씨방 간다며. 가도 돼. "
" 벌써 다 지나갔거든? 안 갈거야. 밥이나 줘. "
그러더니 입맛을 쩝쩝 다시며 내 방문을 열고 주방으로 나간다. 이젤을 정리하고 따라나가니 냉장고를 뒤적거리고 있다.
아니, 근데 웃통은 왜 까고 있는데? 귀랑 볼에 열이 화악 달아오른다.
" ㅇ,야. 넌 남의 집에서 누구 맘대로 그렇게 옷을 훌렁훌렁 벗어?! "
" 첨 보는 것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왜 그래? 부끄럽냐? "
" 누가 부끄럽대? 아, 저게 진짜! "
괜히 노발대발 하는 내가 웃긴지 비식비식 웃는다.
방학이 끝나서 붉게 물들였던 머리를 새카맣게 다시 염색하고 조금 긴 머리를 깔끔하게 다듬은 그 모습이,
훤히 드러난 상체가 또래와 다르게 다부져서, 옆에 서있는 내가 한참을 올려다 볼만큼 훌쩍 커버린 키가 어색해서.
나는 그만 그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 야, 어디가! 나 밥 달라니까! "
내 방문을 닫고는 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주방 쪽에서 계속 들려오는 목소리도 다 무시하고는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만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이러면 안돼. 왜 이러는거야, 자꾸. 아까 봤던 그 녀석의 모습이 눈을 감아보아도 자꾸 머릿속에 넘쳐 흐른다. 내가, 쟤를 좋아해?
" 여주야, 어디 아파? "
다정하게 물어오는 목소리에 울컥 눈 뒤가 뜨거워졌다.
아, 오늘은 좀 괜찮게 넘어가나 싶었는데. 그래도 나 나름대로 요새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는데. 정국아, 내가 너를 좋아하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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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기의 풋사랑을 표현해보고 싶어서 최대한 현실적으로 적고 있는데 실제로 저런 남사친은 없죠 :(
오늘은 많이 짧은데 다음 화는 길게 가져올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