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울의 움직이는 성 ost - 인생의 회전목마
"지금 비 때문에 찝찝하지 않아?"
"아 네...엄청요"
"아...어떡하지.."
".."
"옷은...아 내거 안 맞을텐데"
박찬열과 나는 또 다른 문제에 정착한 듯 했다. 나도 박찬열도 똑같이 옷도 젖고 머리도 젖었지만 적어도 박찬열은 돌아 갈 집이 있고, 다시 갈아 입을 옷이 있다. 나는 시발 돈도 없고 옷도 없고. 이 세계의 진정한 찐따인줄만 알았더니 이 세계의 진정한 거지 타이틀도 휩 쓸 기세였다. 가진게 정말 하나도 없-
"옷은 내가 사줄게."
지는 않구나.
"대신 나 옷 좀 갈아 입고 가자. 으아, 원래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경우 드문데…."
박찬열의 집은 내가 열매를 먹은 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숲, 나무에 둘러 싸여 있어 보이지 않던 작은 통나무 집. 박찬열 집은 아담했고, 들어가자 안은 예상 외로 따뜻했다. 내가 지금 비를 홀딱 맞아 온기를 빼앗겨 따뜻하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지만. 아늑했다. 집이 작고 아늑했다. 집이 작았다. 그 말은 즉슨...
방이 없었다.
"방...방이 없는데? 나 어디서 자요?"
"바닥에서 자"
"헐 춥잖아.."
"여기 생각보다 별로 안 추워. 그냥 자-"
그래, 얹혀사는 주제에 내가 무슨 권리로 박찬열 집을 이래라 저래라 평가할까.
스스로 자기 합리화를 하며 집 안에서 잘 수 있다는 것 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박찬열의 입에서 옷 갈아입는다. 라는 소리가 나왔다.그리고 내가 마음의 준비가 되기도 전에 박찬열은 자신이 위에 입고있던 흰 티셔츠를 훌러덩 벗었다. 으아 미친.. 박찬열의 맨살에 놀라 황급히 고개를 돌렸는데 박찬열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갈아 입을 거 다 갈아 입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 거리는 느낌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속으로 참을 인자를 몇 백번이나 새겼다. 참자, 이 집은 박찬열 집이다. 박찬열은 이 집에서의 자기 맘대로 할 권리가 있다.
"다 갈아 입었어. 앞에 봐도 돼."
그제서야 나는 박찬열 쪽을 볼 수 있었고 박찬열은 웃음기 띈 얼굴로 날 쳐다 보고 있었다.
"...어?"
"왜?"
"만화책보면 엘프들은 맨날 나뭇잎으로 만든 옷 입던데, 아니네요?"
"그게 언제적 얘긴데..."
"옷 입는게 제가 살던 곳에서 입는 거랑 비슷해요."
"...그럴 수 밖에 없겠지."
"네?"
"아냐, 가자."
아까부터 자꾸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말만 반복하는 박찬열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박찬열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집 문을 열고 밖으로 향했다. 나보고 따라 오라는거겠지. 허겁지겁 박찬열을 따라 나오니 비가 그 짧은 사이에 그쳤다. 하늘은 맑고 푸르렀고 햇살은 따사로웠다.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 화창한 날씨에 기분이 좀 상쾌해진 것도 같았다. 한국은 겨울이었는데 존나 여기는 따사롭다 못해 여름이라는 착각까지 들 정도로.
"너 무슨 옷 입어?"
"네?"
"자주 입는 옷 같은거..그런거 없어?"
"아 저 맨투맨이랑 후드집업 같은...아 치마 레깅스도!"
"..뭐라는거야."
아 못 알아 듣겠구나.
"저 그냥 아무 옷이나 다 잘 입어요."
맨투맨이나 후드집업 같은 용어를 다른 세계 사람인 찬열이 알 턱이 없었다. 대충 얼버무리자 박찬열이 알겠다며 내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내가 남자 손을 잡아 본 적이 언제더라.. 초 6때 나름 사랑으로 치부하고 사귀었던 남자친구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괜히 떨리네. 내가 이렇게 떨고있는 와중에 박찬열은 내 손을 잡고 어딘가로 가기 바빴다. 도대체 어딜 가길래. 그나저나 박찬열의 집까지는 정말 온통 푸르른 숲밖에 없었는데 조금, 아니 조금 많이 걸으니 번화가가 나왔다. 사람도 아주 많은. 박찬열처럼 귀가 뾰족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특이한 점 빼고는 모두 다 내가 살던 곳의 사람들처럼 멀쩡 해 보였다.
아 하나 더, 눈동자와 머리카락 색깔이 제 각각인거 빼고.
끊임없이 걷고있는 도중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에 몰리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들을 따라 나도 역시 시선이 향하는 곳을 쳐다 보았는데 허리까지 온 긴 머리와 온 몸이 검정색으로 덮여져 있는 여자. 여자를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은 하나 같이 다 찌푸려져 있고 혀를 끌끌 차면서 가는 사람도, 욕을 하면서 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 시선을 한 몸에 받고있는 여자는 죄인이라도 되는 듯 고개를 푹 숙이며 걸어가고 있었다.
저 여자는 누굴까. 누구길래 이상한 것도 없어 보이는데 사람들이 저런 눈으로 쳐다 보는 걸까.
"..저기요"
"왜?"
"사람들이 왜 저렇게 저 여자만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그제서야 박찬열은 하염없이 가던 걸음을 멈추곤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여자?"
"저기, 저 여자요,"
손가락으로 여자를 가리키자 박찬열은 인상을 찌푸렸다. 왜 다 못 볼걸 본 것 처럼.
"마녀라고 의심 받나보지."
오세훈이 또 확인하러 다시 오겠네. 굳은 표정으로 박찬열은 그렇게 말하곤 앞장서서 걸음을 재촉했다.
계속 걸어 슬슬 다리가 아파질때 쯤 박찬열이 걸음을 멈췄다.
"여기가 그나마...이 주변에선 여자 옷 잘 만든다고 유명한 곳이긴 한데..."
"아.."
"골라봐, 돈은 내가 낼 테니까"
박찬열의 말을 듣고 앞에 있는 가게를 쳐다 보았는데,
딱히 신중하게 고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하나같이 옷이 병신 같았기 때문에,
.
.
"아 웃지마요.."
"아니 자꾸 웃음이, 아 미치겠다 진짜"
정말 마음에 드는 옷이 하나도 없어 무기력 하게 아무 생각 없이 박찬열에게 내 옷을 고르라고 한게 화근이었다. 무슨 옷을 골랐는지 확인도 못하게 하더니 시발 이게 뭐하는…. 온통 정체를 알 수 없는 옷들만 잔뜩 사 놓았다. 저 망할 엘프새끼. 옷이 젖지만 않았으면 난 죽어도 이 옷을 입지 않았을테지만, 내가 지금 찝찝한 기분이 초 절정에 달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박찬열의 집으로 돌아가 새로 산 옷을 입어보니 이게 무슨 마녀가 따로 없다. 어두침침해. 너무한다. 그냥 너무한 것도 아니고 존나 너무한다.
"나 이러고 밖에 안 돌아 다닐래. 여기에만 쳐 박혀 있을 거예요."
어차피 돌아 다닐 곳도 없겠지만.
*
"...어디가요"
"먹을거 구하러"
"어제 옷 사러 갔던 곳이요?"
"아니, 난 거기 있는거 못 먹어."
"...다녀올게"
날이 아주 조금 밝아진 새벽이었다. 뒤척이는 소리에 잠에서 깨 소리가 난 방향으로 실눈을 뜨고 쳐다보니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박찬열이 보였다. 어딜 가냐 물었더니 먹을걸 구하러 간다고 말하고 집을 나가는 박찬열을 보며,
번화가의 있는 음식을 못 먹는다니, 새삼 엘프구나 실감이 났다.
박찬열이 나간 후 창문 틈새로 살짝 고개를 내밀고 바라보니 나뭇잎에 이슬이 맺히고, 새들은 짹짹 거리고. 사람 하나 없는 잔잔한 숲이 눈에 들어왔다.
어쩌다가 내가 이 곳에 오게 된건지.
내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이 곳에서 맞이하는 첫번째 아침.
결국 정말 꿈이 아니었구나.
...박찬열한테 미안했다. 겨우 하루째인데 신세 지는 것 같아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데리고 와서 먹여주고 재워주는 일이 쉽지 않을텐데. 박찬열이 더럽게 착한 거라고 생각했다. 박찬열이 방금 나간 시간대는 어제 우리가 처음 만났던 시간과 비슷한걸 보니 어제 나한테 줬던 그 포도같지도 않은 열매, 박찬열 아침이였나. 자기 아침식사인 듯 보였던 나무열매를 나한테 선뜻 주고, 우는 나를 안절부절하게 쳐다 보다가 살짝 안아준 것도 박찬열. 전혀 마음에 안든 옷이지만 그래도 이 세계에서 입을 수 있는 새 옷을 사준 것도 박찬열. 나랑 같이 먹을 아침을 지금 구하러 간 것도 박찬열. 이 곳에 관해서 알려준 것도 박찬열이었다.
...어마어마하게 좋은 사람이었잖아?
어제 골라준 옷이 병신같다고 툴툴댔던게 미안해졌다. 배은망덕한 년.
복잡한 심정을 가지고 다시 잠을 청했다.
아침 공기에 방이 약간 춥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추운 느낌보다 엄청 더운 느낌이 강했다.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박찬열의 집 천장을 벗어나 전혀 익숙하지 않은, 그러니까...
처음 보는 천장이 날 맞이했다.
작고 아담한 집에서 한순간에 정말 넓고 호화로운 곳, 찬 바람결이 느껴지는 방바닥이 아닌 포근하고 따뜻한 침대에 누워있는 내 꼴을 보니 아무리 봐도 박찬열의 집은 아닌 듯 했다. 그러면 두번째 순간이동인가. 이번에는 누구를 만나는걸까. 멍하니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일어 났냐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한채 그 남자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눈동자가 검정색이였다. 어제 번화가에 갔을 때 지나가다가 본 사람들은 눈동자가 하나같이 휘황찬란 했다. 그 속에 검정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보지 못 했는데.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박찬열은 어디갔으며 나는 왜 여기 있는건지 의문 투성이었다. 그리고 저 남자는 대체 누구지-
*
그러니까, 얘는 박찬열의 절친한 친구고 박찬열의 집에 잠깐 들렀다가 박찬열이 집에 없는 틈을 타서 날 쌔벼왔다 이거...?
이거 완전 미, 미-
"미친놈 아냐?"
헙- 미친놈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내 입을 황급히 틀어 막았다. 그리고 동시에 남자의 표정이 굳어진다. 진짜 무섭다. 아아,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순탄하지 않을까. 뒤늦게 잘못 말했다고 부정 해 보았지만 남자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세훈."
"..네?"
"내 이름."
"아..."
"불러봐."
"...오..세훈"
이 상황에 이름 같은게 귀에 들려올리가 없었다. 그냥 빨리 이 곳을 빠져 나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박찬열의 집에 들린거면 박찬열을 보러 온 걸텐데 도대체 나를 왜. 처음 본 나를 갑자기 데려 올 이유가 정말 하나도 없는데.
"너 나 모르지?"
알 리가 없다. 또한 만난 적이 있을 리가 없다. 일단 인상이 존나 무섭게 생기긴 했지만 박찬열이랑 맞 먹을 정도로 정말, 정말!
..잘생겼기 때문에.
철저한 얼빠주의인 내가 기억을 못할리가.
"야 너-"
갑자기 내 쪽으로 훅 다가온 오세훈이 나에게 말했다. 손목 보여줘봐. 한참의 정적을 깨고 오세훈이 말한 첫 마디였다. 갑자기 내게로 다가온 오세훈과 나의 사이의 거리는 엄청 가까웠다. 얼마나 가까웠냐면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자칫 고개 까딱하면 서로의 코가 맞 닿을 정도로. 자세히 보니 눈동자가 검정색이 아니라 은빛이네. 눈동자 색 이쁘다. 아니, 문제는 그게 아니지. 만난지 하루도 안 된 상태에서 손목을 보여달라니,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순순히 오세훈의 말에 손목을 걷어 올렸다. 손목을 보여주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날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쳐다 보았기 때문에.
손목 정도야 뭐, 어려운 부탁도 아니니까.
"여기요."
손목을 걷는 그 순간, 오세훈이 기다렸다는 듯 내 손목에 입을 갖다 대더니 손목에 대고 입김을 후-하고 불었다.
갑자기 손목에 입김은 왜…
"드디어 찾았다."
"...네?"
"마녀."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내 손목에 방금까지만 해도 없었던 괴상한 모양의 흉터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동시에,
어제 낮에 봤던 마녀로 의심 받고 있던 여자.
그 여자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들.
...굳어지는 박찬열의 표정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떠올라서.
뱀파이어 (Vampire), 오세훈
천계에 마녀가 돌아 다닌다는 소문이 마계 전체에 퍼졌다. 세훈은 천계에 비교적 사람이 많이 돌아다니지 않는 새벽 즈음 마녀를 찾으러 걸음을 서둘렀다. 자신이 마계에서 온 것을 들키면 골치 아파지니까. 수백년이 넘는 시간동안 마녀를 발견 했다는 헛소문은 한 둘이 아니였지만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마계의 사람들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마녀가 나타나는 순간 머지않아 마계가 천계를 지배하리라.
세훈은 옛날부터 마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굳게 믿고 있었다. 마녀만 나타나면 모든게 우리 것이 된다.
*천계 : 천신의 지역. 천족과 천사의 성지.
마계 : 마신의 지역. 마족과 어네드의 성지
.
.
마녀라고 불리우는 여자를 찾았다. 새벽이라 사람도 많이 돌아다니지 않는 길거리에서 여자는 그 마저의 길거리에 있는 나머지 사람에게 손가락 질과 비난의 눈초리를 받고 있어 비교적 쉽게 여자를 찾을 수 있었다. 세훈은 여자를 뒤쫒았다. 여자는 한참을 걸어가더니 어두컴컴한 골목길에 앉아 소리내어 엉엉 울고 있었다. 이때다. 세훈은 잽싸게 여자의 입을 막고 손목을 걷어 여자의 손목을 향해 입김을 후-하고 불었다.
손목에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 즉슨, 마녀가 아니다.
손목에 변화가 없는 것을 확인하자 마자 세훈은 여자의 목덜미를 걷어 자신의 입술을 여자의 쇄골 쪽에 묻었다. 곧 여자는 호흡이 가빠지고 숨이 멎는다. 입술에 묻은 피를 훔친 세훈이 미련 없이 등을 돌린다. 세훈은 오랜만에 천계에 온 김에 찬열의 집에 좀 들려야겠다고 생각한다. 잘 살고 있으려나-
*
누가 엘프 아니랄까봐 숲 속 깊숙히 자리 잡고 있는 찬열의 집을 들어가자 세훈을 반기는 것은 익숙한 얼굴의 찬열이 아닌 처음 보는 한 여자였다. 그 마저 너무나도 편안히 자고 있는 모습에 세훈은 의문을 품었다. 이런 여자가 박찬열 타입이던가? 한참 옛날 박찬열이 죽고 못 살던 인간계에서 건너온 여자와 비슷한 점은 없어 보였다. 그 년이 죽은 이유가 뭐였더라…. 아 그래, 마녀로 의심 받다가 죽었었지 아마. 잠시 생각에 잠겨 멍하니 과거 회상을 하며 누워있는 여자를 바라보던 세훈이 번뜩 생각이 떠올랐다. 이 여자를 데려갈까. 박찬열이 이 여자를 데려온 것도 무슨 이유가 있지 않을까.
단순한 호기심에서 일어 난 일이었다.
.
.
세훈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찬열의 집에 있던 아이를 데려와 더 단순한 호기심으로 마녀가 아닐까 하고 손목에다 입김을 불었다. 그리고 그 단순한 호기심이 나중엔 마계와 천계, 대립된 두 나라의 관계에 한 획을 긋는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당사자인 세훈마저도.
수 백년 동안 마계에서 그렇게 찾으려고 발악을 하던.
"드디어 찾았다."
"...네?"
"마녀."
멸종된 마녀가 내 눈 앞에 있다.
세훈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수 없었다.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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