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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꿈이 아니야!







달이 완전히 태양을 가렸다. 대낮에 찾아온 어둠은 순식간에 이그조 대륙 전체를 집어삼켰다. 미사에 참여하던 사람들은 대제 앞 여신상에서 황금빛이 뿜어져나오자 침을 꿀꺽 삼켰다. 압도적인 빛이 대신전 천장을 뚫고 나가 어두운 하늘을 밝혔다. 덕분에 제국 백성들이 모두 여신의 빛을 보고 감탄을 터뜨렸다. 기도를 올리던 하이프리스트들은 더욱 기도에 집중했고, 그들의 곁을 지키던 성기사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교황, 레이는 여신상 앞에 서서 두손을 모았다. 레이의 손에도 역시 여신상에서 나오는 빛과 같은 빛이 뿜어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여신상에 손을 대자 빛은 두배로 증폭되어 뿜어져나와 하늘에 닿았고, 여신상 앞에 검은 공간이 열리며 거센 바람을 일으켰다.





“!”





대신전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거센 바람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면서도 커다란 구멍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소용돌이치는 구멍에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나도 따라 일어나며 아버님의 얼굴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아버님도 모르고 계셨나본데.. 하긴, 레이가 입을 열 스타일은 아니지. 나 역시 이번 꿈에 대해서는 레이와 매리를 제외하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번 일은 나와 레이, 하이프리스트만 알고 있던 일이었고, 다른 이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저 바람을 일으키는 구멍에 공포에 휩싸인 얼굴일 수 밖에 없었다. 





레이가 여신상과 공명을 하다말고 나를 부른다. 공주님! 레이의 외침에 아버님과 오라버니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레이 옆으로 자리를 옮기려던 나의 행동에 아버님이 팔을 들어 내 앞을 막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더냐, 공주. 걱정스럽게 나를 내려다보는 아버님의 눈빛에 그저 믿음직한 웃음을 지어보일 수 밖에 없었다. 오라버니들도 곁으로 다가와 위험하다며 말리기 시작하는데 다시 한번 레이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공주님, 지금입니다! 그런 레이를 본 아버님은 나를 향해 나즈막하니 입을 여셨다.






“공주는 마치 지금 이 상황을 예견한 눈빛이구나.”

“일단 보내주세요. 나중에 모두 설명드리겠습니다, 아바마마.”

“...”

“아바마마!”





말없이 굳은 표정으로 나를 내려보시던 아버님은 팔을 거두셨다. 내가 간절히 필요해보이는 상황이었고, 이 상황을 일단락짓는게 우선이었다. 아버님은 단순히 딸의 안위를 걱정하여 일을 그르치는 주군이 아니다. 오라버니들이 화들짝 놀라 나를 불러세우려 했지만 나는 재빠르게 뛰어 아버님을 지나쳐 레이 옆에 섰다. 뭘 어떻게 해야하는데?! 나의 물음에 레이가 이것은 차원의 문이라며 어서 그 안에 손을 집어넣으라고 말했다. 나는 거침없이 구멍 속으로 쑤욱 팔을 집어넣었고, 이를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식겁하며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뿐인 공주가 위험하게 생겼으니 그럴만도 하다. 근데 교황이 설마 제국의 공주에게 위험한 일을 시키겠어? 레이에 대한 믿음 하나로 손을 집어넣었더니 손 끝에 뭔가가 걸렸다. 레이는 다 보고있다는 듯이 어서 잡아서 끌어당기라며 나를 재촉했다. 이거 굉장히 무겁잖아! 나는 결국 다른 한 손 마저 구멍 속으로 집어넣고 힘껏 잡아 당겼다. 젖 먹던 힘까지 죄다 끌어모아 끌어당기자 갑자기 탄력을 받은 듯 커다란 구멍 안에서는 건장한 남자 하나가 내 손에 잡혀 쑤욱 빠져나왔다. 남자가 빠져나오자마자 레이는 황급히 여신상에서 손을 떼었고, 바람을 일으키던 구멍은 점점 작아져 소멸했다. 힘 쓴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앉아 숨을 고르면서 대제에 쓰려져있는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꿈에서 본 얼굴과 같았다.






바람이 멈추고 장내가 잔잔해지자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이 상황 자체가 그들에게는 흥미로운 가쉽거리일테다. 가장 먼저 아버님이 정적을 깨고 레이를 향해 물었다. 어서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야 할 것이오. 레이는 많은 신력을 쓴 탓인지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아버님께 살짝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일단 미사를 마치고난 후 얘기하자고.






레이는 대제 단상 위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남자를 올려놓고 성수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이프리스트들을 남자의 주위로 모아 그를 위한 기도를 올렸다. 묵묵히 지켜보시던 아버님은 미사가 끝나자마자 레이를 따라 응접실로 가셨다. 이를 지켜본 이들에게 모두 입을 단단히 다물라고 명령을 하신 후에.






오라버니들도 아버님을 따라가려다가 남자를 옮기는 데 좀 도와달라는 내 부탁에 하는 수 없이 남자를 들고 교황의 침실로 향했다. 일단 침대의 눕혀놓고 남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감상을 하고 있는데, 오라버니들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나에게 묻는다. 아마도 내 부탁으로 듣지 못한 설명을 내게 들어보려는 심산인가본데,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오라버니들은 답답함에 몸서리를 친다. 결국 포티아 제국 제2황자이자, 현 황태자인 대니(Daniel) 오라버니가 한쪽 무릎을 숙여 내 앞에 앉아 손을 꼭 잡는다. 시선을 피하는 나를 진득하게 부르더니 간절한 눈빛으로 나에게 묻는데 유독 그 눈빛에 약한 나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 했다.






“말도 안 돼...”

“이게... 다른 차원에서 넘어왔단 말이냐..?”

“이거라니?! 닉(Nicholas) 오라버니, 그렇게 부르지마!”

“...”






내 설명에 대니 오라버니는 그저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었고, 존(Jonathan) 오라버니는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넋두리만 늘어놓았다. 근데 닉 오라버니가 침대에 누워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하는 말에 발끈하며 외치자, 닉 오라버니는 눈을 흘기면서 그럼 저게 뭔데? 하고 묻는다. 저거라고 하지 말랬지?! 하고 또다시 발끈했다가 딱히 소개할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닉 오라버니가 킬킬 웃으면서 이거 맞네, 이거. 하는데 죽일듯이 노려보며 정강이를 걷어찼다. 윽, 신음을 흘리는 오라버니는 다리를 싸매고 끙끙 앓다가 내 머리를 쥐어박으려는 듯 손을 들어올린다. 하지만 대니 오라버니의 손에 막혀 나를 향해 낮게 으르렁거리기만 하길래 대니 오라버니 뒤에 숨어 혀를 빼꼼히 내밀어주었다.






“일단 나는 아바마마를 좀 봬야겠구나.”

“왜요, 오라버니?”

“이 자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아버님은 교황님에게 뭔가 들으셨을 것 같은데...”

“흥, 한낱 여신님 심부름꾼이 뭘 알겠어.”







이번에는 레이를 험담하는 닉 오라버니에게 화가 나서 대니 오라버니 옆구리 사이로 쑥 주먹을 뻗었다. 정확하게 오라버니 배에 꽂힌 주먹에 닉 오라버니는 다시 한번 신음을 흘린다. 아오, 이게 진짜!!! 나를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기세로 달려드는 오라버니에 뭐가아아?! 하고 대들자 사이에 껴있던 대니 오라버니가 중재에 나선다. 결국 대니 오라버니에게 말 조심하라고 한소리 들은 닉 오라버니는 씩씩거리며 날 노려보다가도 대니 오라버니 앞이라 꼼짝도 못하고 방에서 나갔다. 꼴 좋다, 흥. 유독 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닉 오라버니는 항상 이렇게 싸우고 대니 오라버니에 의해서 멈춘다. 그렇다고 막 서로 진짜 죽이려고 그러는게 아니라 그냥 성격이 맞지 않을 뿐이다. 아니, 오히려 둘다 자기주장이 강하다는 비슷한 성정 탓에 부딪힐 일이 많다. 특히 저 거친 오라버니 입때문에 심기가 뒤틀린 내가 먼저 때리면서 시작되지만 정작 나는 오라버니에게 한번도 맞지 않았다. 대니 오라버니가 틈틈이 막아준 것도 있지만 닉오라버니도 실제로 날 때릴 마음은 없는 모양이다.







“나도 갈래!”







닉 오라버니가 나가고서 대니 오라버니를 향해 말했다. 아버님에게 같이 가겠다고 하자 대니 오라버니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렸고, 존 오라버니에게 묻는다. 너는? 존 오라버니는 신기한 표정으로 침대에까지 올라가 남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오라버니.. 얼굴 뚫리겠어... 좀 더 있었다면 코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을 것 같은 오라버니를 기겁하며 떼내었다. 존 오라버니는 잔뜩 들떠서 내 어깨를 잡고 흔들어댄다. 자,잠깐만. 오라버니! 어찌나 쎄게 흔들던지 눈이 핑핑 도는 느낌에 우욱, 헛구역질을 하자 대니 오라버니가 기겁을 하며 존 오라버니를 나무란다.






“아... 미안, 공주야... 너무 신기해서...”

“..우워어억...”

“괜찮아?”







존 오라버니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나를 살핀다. 나는 손을 들어보이며 안 괜찮으니까 일단 나가자고 오라버니의 등을 떠밀었다. 오라버니를 남자에게서 떼워놓는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나가다말고 슬쩍 뒤를 돌아 여전히 곤히 잠들어있는 남자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문을 조용히 닫았다.







*









“아바마마!”






닉 오라버니를 제외하고 우리들은 응접실로 향했다. 레이와 이미 얘기가 끝난 상태였는지 아버님은 차를 마시면서 우리를 맞았다. 왔느냐, 아버님은 나를 힐끗 훑으시고는 별말씀이 없으시다. 뭐지? 난 레이를 바라보았고, 그는 작게 웃으며 오라버니들께 차를 권했다. 나는 아버님 옆에 앉으며 눈치를 살폈다. 오라버니들은 레이 옆으로 앉으며 레이가 건네주는 차를 받았고, 대니 오라버니가 아버님께 물었다.






“폐하,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꿀꺽. 아버님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왜 이렇게 긴장되냐... 못들으셨나? 대답없이 차만 마시는 아버님을 흘끗 바라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공주.”

“네... 네?”







갑자기 받은 질문에 움찔했다. 내 생각을 물어볼 줄은 몰랐는데.. 어느새 아버님이 지그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님이 물으셨지만 나는 레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유롭게 웃고있었다. 뭐라고 해? 입모양으로 물었더니 그 역시 똑같이 입모양으로 대답한다. 뜻대로 하세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날 믿어? 문득 전에 레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 역할이 중요하다고? 그래, 지금 내 선택이 중요하다 이 말이지? 그렇다면...







“저 남자 데리고 성으로 갈래요. 가능하면 제 옆에 두고싶어요.”







그래야 여신이 뭔 생각인지 알 수 있을테니까. 내 대답에 레이와 아버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에? 뭐야, 이미 예상했어? 모처럼 기발했다고 생각했는데 난 역시 두사람 손바닥 안에 있었나보다. 쩝, 입맛을 다시며 볼을 긁적이자 반대는 예상외의 곳에서 터져나왔다. 위험하면 어쩌려고! 벌떡 일어나며 내게 소리치는 대니 오라버니때문에 깜짝 놀라 딸꾹질까지 나온다. 내 등을 쓸어내리는 아버님의 손길에 딸꾹질은 금세 멈췄지만 뾰로통한 표정으로 대니 오라버니를 흘겨보았다. 평소에 얌전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나 몰라.






아무래도 대니 오라버니는 그 남자가 미덥지 못한 모양이다. 아직 깨어나지도 않아 말한마디 해보지 못했다면서. 이리 성급하게 결정하는 것보다 좀 더 파악한 후 성에 들이자는 오라버니의 말에 심술궂게 날 못 믿는거예요? 하고 물었더니 그토록 진지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져버린다. 그런게 아니라고 쩔쩔매며 변명을 하는 오라버니의 모습에 푸흡, 웃음을 떠뜨리니 아버님이 옆에서 태자는 여전히 공주에게 약하구나, 하시며 함께 허허, 웃으신다. 그래도 오라버니의 생각도 괜찮다고 여기셨는지 아버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놀라운 얘기를 꺼내셨다.






“공주와 태자는 한동안 이곳에 있으면서 이계인을 살피거라. 태자는 매일 보고를 올리고, 태자의 보고에 따라 입성을 결정하겠노라.”







오오, 아버님께서 처음으로 성 밖에서의 잠을 허락하셨다. 비록 대니 오라버니와 함께라는 조건이었지만 그마저도 파격적인 결정이다. 더군다나 닉 오라버니에게 대답 못했던 남자에 대한 정의까지 내려주셨다. 이계인. 그래, 이거가 아니라 이계인이라고! 이 자리에 닉 오라버니가 없는게 아쉽다.







“어? 아버님. 저는, 저는요?”

“존은 닉과 함께 성으로 돌아가라.”

“에에에?! 저도 여기 남을래요!!!”

“존. 폐하의 명령이시다.”

“...”






존 오라버니, 아까부터 이계인한테 관심이 많아 보이더니 성으로 돌아가란 명령에 잔뜩 풀이 죽었다. 나를 한껏 부러워하던 오라버니의 눈빛이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애써 모른척 눈길을 돌렸다. 사실 오라버니까지 감당하긴 내가 벅찼거든... 오라버니들 중 막내라서 그런지 애교도 많고 눈물도 많고 덜렁이에 허당인 존 오라버니는 오히려 내가 챙겨야할 때가 많았다. 난 이계인 커버하기도 바쁠 것 같으니 이번에는 미안하지만 존 오라버니는 잠시 빠이빠이 해야겠다.






“그럼 짐은 아직 처리할 일이 많으니 이제 그만 성으로 돌아가야겠구나. 레이 교황은 잠시나마 공주와 태자를 잘 부탁하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야지요.”

“아까 그 말은 명심하고 있겠소.”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레이가 고개를 숙이자 아버님은 곧장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다. 아까 그 말이 뭘까 궁금하지만 일단 아버님의 배웅이 먼저였다. 따라나서려던 나는 자신이 다녀오겠다는 오라버니 말에 아버님의 볼에 키스를 하며 일찍 배웅의 인사를 건넸다. 시무룩한 모습으로 아버님의 뒤를 따라나서는 존 오라버니께도 위로의 말을 전했다. 아버님과 오라버니들이 나가고 응접실에 남은 레이와 나는 서둘러 침실을 향했다. 가는 중에 아버님이 말했던 아까 그 말이 뭐냐고 레이에게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그는 훗날 얘기라며 자세히 얘기해주지 않는다. 이제는 그래, 너는 그런 애지...하고 쉽게 단념하고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텅 빈 침대를 보자마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게 어떻게 된거야?! 아까까지 침대 위에 누워있던 이계인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뒷목잡고 쓰러질 뻔 한 것을 겨우 버티고 서서 레이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역시나 당황한 기색을 비추던 레이는 나를 진정시키려고 애썼지만 지금 이 상황에 어떻게 진정을 해?! 나는 오히려 더 흥분하고 말았다. 도대체 어디간거야?! 애꿎은 레이만 쥐고 흔들며 이계인을 찾는데 갑자기 레이가 뒷쪽을 가리키며 미소를 짓는다.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 레이를 나무라려던 나는 바람쐬고 있었나본데? 라는 레이의 말에 손을 우뚝 멈추고 고개를 획 돌렸다. 테라스 쪽에서 보이는 얼굴은 분명 이계인의 얼굴이었다.






나는 곧장 레이를 놔주고 테라스로 걸어갔다. 감히 쓸데없는 걱정을 시켜? 내 기세에 당황한 듯 뒷걸음치는 이계인의 앞에 서자마자 거칠게 멱살을 쥐려고 했다. 근데 왜 이렇게 커... 여태 봐온 남자들과 비교하면 거인같은 키였다. 까치발을 들고 팔을 뻗어 겨우 쥔 멱살에 순간 휘청거릴 뻔 했다. 한쪽 눈을 질끈 감으며 나를 내려다보기에 손에 힘을 주고 상체를 획 끌어당겼다. 키만 컸지 전혀 맥아리가 없는 모습에 끌끌 혀를 찼다. 이계인의 허리가 굽혀지자 이제야 얼굴이 좀 가까워져 말하기가 편해졌다.






“깼으면 곱게 앉아있을 것이지 왜 사람을 놀래키느냐!”

“?”

“도대체 여긴 왜 나온거야? 혹, 도망가려고 그랬던 것이냐?!”

“..?”

“어서 대답하지 못하겠느냐?!”






아무리 이계인이라지만 겁대가리를 상실해도 유분수지. 대놓고 대답도 않고 무시하는 이계인의 행동에 열불이 나기 시작했다.






“œø?ß???? c????ªĦ???ð?”

“뭐, 뭐라고?”

“ƪĦij! œø?Ŀßŧŧ?”

“...”

“c??ijĿß?????.”






뭐라는거야, 지금... 설마 이그조어를 모른단 말이야?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감에 멍청히 바라보고 있으니 이계인이 제 멱살을 잡고있던 내 손을 강하게 내쳤다. 얼얼한 손을 부여잡고서 벙찐 채 레이를 돌아보았다. 레이는 한숨을 쉬며 우리 쪽으로 다가와 내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마저도 그의 추측일 뿐이었지만 꽤 그럴싸해보였다.







“아마 다른 차원에서는 우리와 전혀 다른 언어를 쓰는 것 같아.”

“이그조어를 모른단 말이야?”

“그래. 그것뿐아니라. 우리의 상식이 그에게는 전혀 안 통할지도 모르지.”

“그게 말이 돼?”

“이계인이 나타난 것부터가 말이 안되는 거였잖아.”







아.. 그건 그렇지. 근데 말이 안통하면 어떡하라고? 언어를 배우는게 간단히 되는 것도 아니고... 여전히 뜻 모를 말만 늘어놓는 이계인을 바라보는데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건 완전히 갓난쟁이를 가르쳐야하는 수준이잖아. 레이도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하는 수 없지. 하고 이계인의 손을 잡고 신력을 불어넣었다. 이런 광경은 처음 보는지 화들짝 놀라 큰 소리를 내는 이계인의 모습에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완전 미개인이잖아. 레이는 다음으로 내 손을 잡고 똑같이 신력을 불어넣었다. 뭐 한거야? 하고 묻자 지식을 교환한거라며 이제 간단한 대화는 통할 거라는 말에 의심을 하면서도 슬쩍 말을 걸어보았다.







“이름이 무엇이냐.”

“아, 진짜. 아까부터 뭐라는... 어? 이번엔 알아들을 수 있어.”

“흥, 알아들었으면 대답을 해라.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 말투가 뭐이리 건방져?”

“뭐야?!”







레이의 힘으로 정말 이계인과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졌으나 이계인이 건방지고 무례한 것은 사실이었다. 발끈한 내가 죽일듯이 노려보아도 이계인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잇!! 당장 시선을 낮추지 못할까?! 하지만 이계인은 오히려 이상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무슨 공주라도 되냐며. 알고있잖아! 그럼 어서 예를 갖추란 말이다. 하지만 돌아오는건 콧방귀 뿐이었다. 결국 중간에 레이가 껴들었다. 나를 진정시키고 레이는 나한테 하는 것보다 더 예의를 갖추며 이계인에게 물었다.







“저는 레이입니다. 이곳, 대신전의 교황이지요. 당신의 성함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레이를 빤히 바라보던 이계인은 나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르게 대답을 한다.







“박찬열이라고 하는데요.”

“야! 너, 이놈 내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자고로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고운 법이지.”






이계인은 쯧쯧 혀를 차더니 처음 듣는 문장을 꺼내들었다. 건방진 그의 태도에 하, 헛웃음을 터뜨린 나와 달리 레이는 그 문장에 큰 감동이라도 받았는지 턱을 감싸며 참 좋은 말이군요. 하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레이!!!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치자 이계인은 제 귀를  후비며 인상을 찡그린다.






“거참, 기차화통이라도 삶아먹었나. 되게 떽떽거리네.”

“기,기차? 그게 뭔데?! 난 공주다! 예의를 갖추라고!!!”

“뭐야, 기차도 몰라? 아무리 꿈이라지만 너무 옛날로 온 거 아닌가..”

“꿈이라니?”






이계인이 지껄이는 소리에 눈썹을 씰룩거리며 물었다. 이계인은 나를 바라보더니 피식 웃으며 그래, 꿈에서 나오는 인물이 꿈이라고 인정할 리는 없으니까. 하고 중얼거리는데 분명 저 이계인은 이 상황을 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어쭈, 지금 고작 꿈이라는 생각에 나를 이렇게 하찮은 것 대하듯 한다는거지.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그를 비웃었다.






“바그 차뇨르라고 했나?”

“박찬열이다.”

“그래, 바그 차뇨르.”

“차뇨르가 아니라 찬열이라고!”

“알겠다니까, 차뇨르!”

“씨발. 네네. 맘대로 부르세요. 한낱 꿈 주제에 되게 열받네.”

“아까부터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착각?”

“그래. 착각하지마. 차뇨르, 이건 꿈이 아니다.”

“뭐?”

“꿈이 아니야!”






잠깐의 정적이 찾아왔다. 내 말에 잔뜩 굳어진 표정이 아주 볼 만하다. 묘한 승리감에 빠져 입꼬리를 씰룩거리는 나를 보는 레이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나도 알아, 내가 유치하단거. 하지만 저게 얄미워 죽겠잖아. 새삼 저 인간을 아버님 앞에서 내 옆에 두고싶다고 한 내 입을 찰싹 때리고 싶었다. 그런데 차뇨르라는 이계인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그는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저게 미쳤나... 레이도 조금 놀란 표정으로 차뇨르를 바라본다. 우리들의 눈에는 차뇨르가 진짜 미쳐보였다.






“크큭. 그래, 너희들은 지금이 현실이겠지. 근데 나는 아니거든. 눈 뜨면 다 사라질 꿈이라고. 아, 너희 꿈이 뭔지는 알고있나?”

“... 미련하긴..”






너무 충격을 받아서 현실도피를 하는 것이냐? 조금은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긴 갑자기 살던 곳을 벗어나 생판 모르는 세상에 떨어졌으니 어찌 멀쩡하겠는가. 조금은 건방진 이계인을 봐주기로 했다. 그런데.. 이 망할 자식이... 지가 멀대같이 큰 것이면서 잘도 나를 꼬맹이라고 부르는 그의 입술을 당장이라도 베어버리고 싶었다. 내 너에게 똑똑히 느끼게 해주지, 여기가 현실이라는 것을.







“손을 들어보거라.”

“손? 손은 갑자기 왜?”

“잔말말고 들어봐.”

“꼬맹이, 내 손 잡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을 해.”

“...”

“자, 인심썼다. 죽은 귀신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맘껏 잡아라.”







참아야 하느니라... 죽어서도 입은 둥둥 떠서 떠다닐 것같은 입을 노려보며 그가 손을 들어올리자마자 나는 다리춤에서 단도를 꺼내 그의 가운데 손가락 끝을 살짝 벴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차뇨르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손가락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으니 나도 칼을 거두었다.







“어때? 뜨겁지?”

“뭔 개소리야. 꿈이니까 하나도 안 아픈게...”

“정말 안 아프냐? 약간 베었다곤 하나 아플텐데. 쓰라릴텐데.”

“뭐,뭐야.. 진짜 따끔거리잖아, 이거...”

“당연하지. 여긴 현실이니까!”






차뇨르의 안색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레이를 바라보았고, 레이는 그에게 다가가 손가락을 치유해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레이가 상처를 치료하자 멀쩡하게 돌아온 손가락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이게 어떻게 꿈이 아니냐고 중얼거리는 차뇨르의 모습에 나는 다시 단도를 꺼내보였다. 다시 한 번 베어주리? 그리고 그 순간 방문을 열고 들어선 대니 오라버니는 내가 칼을 들고 있는 모습에 기겁하며 내 앞을 막아섰다. 이게 무슨 짓이냐며 오히려 차뇨르를 향해 낮게 으르렁거리는 대니 오라버니의 뒷모습에 난 조용히 단도를 집어넣었다. 뭐, 내가 다시 안베줘도 차뇨르는 이미 이 세계가 현실이라는 것을 눈치챘을테니까. 마구 떨리는 그의 동공에 나는 당당히 비웃음을 지으며 팔짱을 껴고 다시 그를 향해 쐐기를 박았다. 







“정신차려. 여긴 현실이고, 넌 지금 심장에 칼 맞으면 바로 저 세상가는 몸이야.”

“...”

“지금 여긴 만만한 꿈 속 세상이 아니란 말이다.”

“...”

“그러니까 무사히 돌아가고 싶으면 목숨 관리 잘 해. 아무때나 지금처럼 덤비지말고.”

“...”

“그리고 다 알아들었으면... 이제 공주님이라고 불러라, 이계인!!!”







*









그 후로 차뇨르가 정신을 차렸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단칼에 No다.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서는 오히려 더 내 앞에서 미쳐 날뛰기 시작하는데 뭐 이런 놈이 다있나싶다. 정녕 이계의 존재는 죄다 이런 성정을 지니고 있는건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차뇨르의 입에서 공주님 소리 한번 듣는 것은 이젠 아버님께 외출허락 받는 것보다 어려우니 이 놈, 정말 독한거다.






벌써 이계인이 이그조 대륙에 출현한지 보름이 지났다. 그 사이 찾아온 변화는 나와 차뇨르의 배틀무대가 대신전에서 포티아성으로 옮겨진 것 뿐이었다. 솔직히 나는 마음같아선 대신전에 이 싹퉁없는 놈을 쳐박아두고 싶었다. 아버님 앞에서 한 선택? 이미 잔뜩 후회했다. 성에서 오고가며 마주칠 때마다 진이 빠질 생각만 하면 눈 앞이 아른해진다. 그렇다고 자존심이 있으니 한번 정한 선택을 뒤집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마지막 남은 희망은 대니 오라버니 뿐이었는데 신중하던 오라버니는 어디가고 단 사흘만에 나를 좌절시켰다.






차뇨르는 영악하기 짝이 없었다. 꿈을 운운하던 그는 대니 오라버니가 나타난 순간 태도를 180도 바꿨다. 직전에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서 그랬을까? 오라버니를 향해 먼저 수그리고 저를 소개하는 행동에 나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제 자리를 알고 내게도 머리를 조아리겠구나. 분명 그랬어야만 했다. 근데 그건 내 부푼 소망일 뿐이었다. 차뇨르, 그는 나한테만 여전히 싸가지가 없었다. 하다못해 자신을 완전 깔보는 닉 오라버니도 깍듯이 모시는 주제에 나에겐, 나에게만은!!! 죽어도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 그것도 아주 교묘하게...






오라버니가 함께 있을 때면 나를 높여주는 듯 행동하면서도 절대 나를 부르지 않는다. 오라버니와의 대화에 집중할 뿐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오라버니가 자리를 비우는 순간 그는 나를 부른다. 바로 이렇게...






“야, 꼬맹이.”






아오, 환청이 왜 이렇게 쓸데없이 생생하게 들려? 저 소리를 보름동안 몇 백번을 들었는지 모른다. 단 둘이 있을 때 뿐이었다. 아버님과 오라버니들이 들었다면 차뇨르에게 주의를 줬겠지만, 그는 말했던 것처럼 그들 앞에서는 나를 부르지 않았다. 나 혼자 끙끙 앓으면서 노이로제에 걸려 이제는 비슷한 단어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다. 덕분에 한껏 수척해진 내 몰골에 아버님과 오라버니들은 하루에도 몇번씩 몸에 좋다는 것들을 잔뜩 보내오지만, 내 처방약은 이런게 아니다. 아주 단순하다. 차뇨르 좀 없애버려!!! 하지만 절대 실현불가능한 처방에 매리만이 내 옆에서 어깨를 토닥여줄 뿐이다.






“꼬맹이.”






아놔... 나 이러다 진짜 화병으로 죽는거 아니야? 또다시 선명하게 들려오는 환청에 울먹거리면서 테라스에서 후읍, 후읍, 소리까지 내며 맑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얼른 머릿속을 정화시켜야 해! 코를 벌렁거리면서 숨을 들이마셨다내셨다 하고 정신 좀 차리겠다는데 자꾸만 들려오는 소리는 선명해지고 커지기만 하니 진심으로 미치고 팔짝 뛰겠다.







“야!!!”

“꺄아악!”







분명 방에는 나와 매리뿐이었고 매리는 차를 끓이겠다며 방안에 있던 상태였다. 즉 테리스에 나 혼자 나와 난간을 붙잡고 서있었는데 난데없이 엉덩이가 툭 걷어차였다. 갑작스러운 공격과 귀가 찢어지는 듯한 외침에 깜짝 놀라 그대로 몸이 앞으로 쏠려 떨어질 뻔 했는데 이번엔 또 뒷목이 잡혀 간신히 밑으로 추락하는 신세는 면했다. 아마 여기서 떨어졌으면 두개골이 산산조각 났을텐데... 순간 눈 앞이 아찔해 심장이 벌렁벌렁하면서 너덜해진 느낌이다.







“누,누구냐?!”






뒷목이 잡혀 직접 고개를 돌려 누군지 확인을 할 수 없으니 분하지만 이렇게 묻는 수 밖에. 감히 포티아 제국의 공주 뒤를 노리다니! 누군지 몰라도 보통내기가 아닌 자일터. 떨리지만 그래도 카랑카랑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물었는데 뒤에서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와 말투가 들려온다. 






... 차뇨르? 





내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짐작하자마자 몸이 반사적으로 부르르 떨린다.






“꼬맹이, 내가 몇번이나 불렀는지 아냐?”

“...”

“또 대답 안하지.”

“... 너,너..”

“와, 여기 꽤 높네. 야, 너 나 아니었으면 죽었겠다.”

“... 미친 놈.....”

“생명의 은인한테 뭐라고?”

“진짜 미쳤냐, 너?!”







네가 내 엉덩이 걷어차지 않았으면 떨어질 일도 없었어!!!!! 차뇨르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얼굴이 시뻘게져 목이 터져라 외쳤다. 나보다 더 놀란 가슴을 움켜쥔 매리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내 외침에 그제야 출동한 근위병들은 방안의 상황에 눈에 띄게 당황해섰다. 때아닌 소동에 주동자는 제일 순진한 얼굴로 나를 탓한다. 






“네가 내 말 계속 씹으니까 그렇잖아.”






진짜 죽어버려!!! 그의 손아귀에서 발버둥치며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이거 놔! 당장 내려 놓으란 말이다!!! 차뇨르는 발버둥치자 버거웠는지 나를 내려놓고는 짜증을 냈다. 기껏 살려줬더니 승질을 부린다는 그의 말에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른다. 죽일듯이 노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도 아까 생각만 하면 심장이 벌렁거리는데 저 놈은 태연하기 짝이 없다. 거기다 처음으로 엉덩이를 걷어차인 수치심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무리 다른 차원의 계급없는 나라에서 왔다한들 이 대륙에는 한 나라의, 그것도 제국의 공주를 이렇게 대하란 법은 없다. 분해죽겠어... 금세라도 엉엉 울음소리가 비집고 튀어나올 듯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지만 눈이 충혈되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다. 또 저놈 앞에서 눈 가리자고 고개 숙이기는 싫었다. 내 눈을 본 차뇨르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어? 꼬맹이, 너 지금 우냐?”

“울긴 누가 울어?!”

“...”

“씨. 네 이놈. 내가 기필코 널 죽이고 말테다!!!”






소리치다가 찔끔 고여버린 눈물을 벅벅 문지르며 그를 향해 외쳤다. 그는 아까와는 다르게 무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씩씩거리며 그를 노려보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손이 위에서 내려와 눈을 질끈 감았다. 젠장! 눈을 감아버렸어?! 얼른 질끈 감은 눈을 부릅 뜨려고 했는데 그보다 먼저 놀라 떠졌다. 이,이건 또 뭐야? 차뇨르의 큰 손이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고 있었다. 무슨 꿍꿍이지..? 그의 나라에서는 이 행동이 욕보이는 뜻이기라도 한걸까? 머릿속에서 별별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울지마, 꼬맹이.”

“...”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어울리지 않게 갑자기 건네는 위로는 훈훈함보다는 싸늘한 한기를 몰고와 오돌토돌, 소름을 돋게 만든다. 그리고 그 효과는 대단하다. 단숨에 마른 눈물에 나는 경악스런 표정으로 그를 마주했다. 내 표정에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했나 깨달았던지 헛기침을 하며 손을 거둔 그는 금세 미운 소리를 해댔지만, 그가 남긴 여운이 길어 한동안 이상한 눈초리로 그를 대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방에는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텐데.”






매리를 침대에 눕혀놓고 그녀가 끓이다만 차를 대신해 테이블 위에 두 세트의 찻잔을 올렸다. 고고한 자세로 찻잔을 들어올리며 말했지만 차뇨르는 자신은 분명 매리의 목소리를 듣고 들어왔다며 반박했다. 그녀가 쓰러져있어 확인은 하지못했지만 그가 거짓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라 무안함에 눈을 흘기며 차를 들이켰다. 켁, 켁... 황급히 찻잔을 내려놓자 차뇨르가 빤히 바라보더니 차 하나도 제대로 못 끓이냐면서 핀잔을 준다. 나는 발끈하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맛있거든?! 그러자 그럼 계속 마셔보라는 그의 말에 식은 땀을 흘렸다. 그래, 사실 내가 끓인 차는 맛이 없었다... 매리가 끓여놓은 차를 잔에 따르기만 했을 뿐인데 맛이 없다... 시무룩하게 찻잔에 든 차를 노려보는데 차뇨르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다른 찻잔에 차를 따라 내 앞에 놓는다. 나는 콧방귀를 꼈다. 너가 하면 맛있을 것 같냐면서 비웃으니까 일단 마셔보란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어 한모금 홀짝였다.







“... 맛있어!”







씨익 웃는 차뇨르의 얼굴에 아차, 하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어째서지?! 차뇨르도 나처럼 그냥 따르기만 했는데 왜 맛이 다른거야? 전혀 모르겠단 표정으로 내가 따른 찻잔과 그가 따른 찻잔을 번갈아보았다. 그러자 차뇨르가 혀를 끌끌 찬다. 애써 궁금하지 않은 척 찻잔을 멀리 밀어내며 화제를 돌렸다. 흥, 이런거 못해도 난 사는데 지장없다고.







“이번엔 또 왜 온 것이냐?”

“...”

“아직도 여기가 꿈같다는 소릴 하러 온건가?”

“아니, 이젠 믿어. 그 때 피가 꽤 뜨거웠거든.”

“그럼 왜 왔냐니까?”

“알아야겠어. 여기가 정말 지구가 아닌 다른 차원이라면... 내가 다시 지구로 돌아갈 방법이 있는거겠지?”

“...”

“설마 나더러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라는 건 아닐거잖아. 그치?”

“... 몰라.”

“뭐?”

“나도 모른다고.”






무책임한 대답에 차뇨르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난 최선의 대답을 해준거다. 나는 진짜 아는게 없으니까. 슬쩍 다시 찻잔을 가져와 홀짝인 나는 무미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혹시 모르지, 레이라면 알고있을지. 차뇨르는 재빠르게 반응하며 다시 묻기 시작했다.






“레이? 저번에 대신전 교황이라던 그 남자?”

“그래. 신녀나 성자가 없는 지금 여신의 대리인은 교황이야. 널 여기 보낸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세르니이그쥬 여신이 한 짓 같아서 말이야. 그러니까 레이는 알지도 몰라. 네가 왜 여기 왔는지, 언제까지 있어야 하는지, 어떻게 다시 돌아갈 수 있는지.”

“!”

“근데 레이가 여신을 닮아서 생긴 것과 다르게 꽤 짖굳거든. 아마 찾아가도 알려주지는 않을거야.”

“...”






차뇨르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말고 이어지는 내 말에 멈칫하고 앉았다. 한숨을 쉬는 그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보름동안 티는 안냈어도 속으로는 꽤나 마음고생을 했겠지. 하루아침에 바뀐 삶이 벅찼을거다. 솔직히 안타까운 생각에 처음에는 잘 대해주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하게 만든건 다 차뇨르, 그 자신이었다.






“분명한건 넌 여기서 무언가를 해야한다는거야. 그리고 그걸 이루고나면 레이는 그때야 너에게 알려주겠지. 그 다음에 계속 여기에 남아야할지,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도 될 지를.”

“내가 할 일은 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

“솔직히 난 네가 나중에 돌아갈거라고 봐.”

“어째서?”

“넌 여기서 살아야 할 운명이 아니야. 애초에 왜 다른 차원에서 태어났겠어. 즉, 네가 여기 온 건 이치에 어긋난 일이고 이치는 언젠가 바르게 될거야. 그렇게 되면 너는 더이상 이 세상에 있으면 안되는 존재가 되는거지. 그럼 둘 중 하나야.”

“?”

“네가 다시 돌아가거나, 네가 여기서 죽어버리거나.”






내가 펼친 두개의 손가락에 차뇨르는 내가 처음에 펼친 손가락만 뚫어져라 노려본다. 죽는다는 건 생각도 안한다는건가?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거두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침묵했다. 나도 별다른 말없이 차만 마셨다. 오늘따라 차가 맛있네. 아, 차뇨르가 끓여서 그런건 절대 아니다. 이 차는 거의 매리가 끓인거니까! 쟤는 그냥 따르기만 했을 뿐이잖아? 생각을 끝낸 듯한 차뇨르가 단호히 말했다.






“난 반드시 돌아가겠어.”

“...”

“일단 해야할 일이 뭔지 알아야 해.”

“그렇지.”

“꼬맹이, 네가 도와줘야겠다.”

“하, 내가 왜?”

“다 알고있어. 너 여신 싫어한다면서.”

“...”

“여신의 계획, 내가 박살내주지. 그러니까 잠깐 휴전하고 동맹을 맺자는 소리야.”






누구한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제안은 꽤 솔깃했다. 아마 여신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면 웃음을 터뜨리며 비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상상만으로도 열받네... 나는 잔에 남은 마지막 한모금을 입에 털어내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를 향해 내밀어진 그의 주먹에 살포시 내 주먹을 대었다. 


차뇨르가 이그조 대륙에 온 지 보름날. 나와 그 사이에는 묘한 연결고리가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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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역시 재밌어여 ㅎㅎㅎ
9년 전
독자2
재미있어요!!ㅋㅋㅋ완전 재미있어요!!설정도 정말 좋고 완전 재미있어요!!앞으로도 이글 꼭 써주세요!!
9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작품을 읽은 후 댓글을 꼭 남겨주세요,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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