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시간 제 처소에서까지 수북이 쌓인 업무를 보던 용국이 피로해진 눈을 감고 고개를 젖혔다. 황제, 머릿 속에 떠오르는 단어에 미간을 좁히고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즉위식이 끝난 직후 저를 보는 유생들이나 일부 대신들의 눈빛이 달라짐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공주가 즉위식을 마치고 여황제로 추앙되면 그로부터 1년 뒤 여황제와 함께 나라를 이끌어 갈 황제를 선출한다. 많은 조정 대신들과 황실의 구성원들은 당연히 용국이 황제의 관을 받으리라 생각했다. 내로라하는 양반집 출신이라는 탄탄한 뒷배경, 바르고 올곧기로 유명한 그런 품행 따위의 자잘한 이유가 아닌 가장 큰 이유는 용국의 부인, 여제였다.
폐하께서 납시셨습니다.
그 말에 용국이 감았던 눈을 뜨고 작게 한숨을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드시라 하라. 그에 기다렸다는 듯 창호지 발린 미닫이문이 열리고 고운 비단 위 황금실로 수를 놓은 용포를 입은 여제가 사뿐히 걸어들어왔다. 잔뜩 긴장했으면서도 예쁘게 웃는 얼굴이 용국 앞에 서니 붉게 물드는 뺨을 하고 슬쩍 그를 올려본다. 사랑스럽다, 울컥 밀려드는 감정에 그것을 삼켜내듯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고는 다시 냉한 표정을 지었다. 굳어가는 용국의 얼굴을 바라보는 여제의 얼굴 역시 굳어갔다. 시무룩해지는 얼굴이 미처 용국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기에 용국은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여제를 담은 눈 만큼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수많은 말들을 담고 있다는 것을 여제는 미처 알지 못했기에 용국은 그것을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문득문득 느껴지는 쓴 맛에 그저 아무 말 없이 입만 다물 뿐이었다.
"…부군,"
"예, 폐하."
"저를 언제 쯤에나 따뜻한 얼굴로 대하실 수 있겠습니까."
답 없는 용국의 몸이 작게 떨렸다.
"더이상 부군의 가르침을 받는 부군의 어린 제자도 아니고, 이제는 이 나라를 이끌 황제입니다. 어린 애가 부리는 투정이 아니예요."
"…그렇기에 더욱 자제하셔야 하는 겁니다."
"…."
"저만의 부인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다른 다섯의 부군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대하셔야지요. 이럴수록 제 입장만 난처해짐을 왜 모르십니까. 아직도 폐하는 제게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또 모진 말을 뱉으니 여제의 얼굴이 울듯이 찡그려졌다. 초를 두어 개 정도만 켜놓은지라 어둑어둑한 방이었으나 맑은 눈이 서운함에 일렁이는 것은 굳이 눈을 맞추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하던 치맛자락이 꽉 쥐었던 주먹에 의해 흉한 잔주름이 졌다.
갈곳을 잃은 듯 이리저리 굴려지는 눈이 안쓰럽고 죄스러워 입술을 물다 제 앞의 작은 여제에게 한 발짝 다가설 무렵, 여제가 급히 몸을 틀었다. 곧 떨려오는 작은 어깨가 제 고집을 보여주는 것 마냥 매몰차게도 발걸음을 옮겼다. 온기를 품은 손이 허공에서 맴돌며 그 온기를 잃어갔다. 씁쓸한 얼굴로 그 손을 거둔 용국이 다시 자리로 가 앉았다.
유난히도 추운 밤이었다.
"어제 정 부군의 처소에서 폐하가 하룻밤을 보내셨다는 소릴 들었습니다만."
난데없이 뱉어진 영재의 말에 차를 마시던 힘찬과 준홍이 사레가 들린 듯 컥컥거렸다. 용국의 책장 넘기는 소리가 멎었고, 대현도 당황한 듯 커진 눈으로 멍하니 의연한 영재를 바라보았다. 준홍이 대현의 옷깃을 잡아끌며 금방이라도 죽일 듯 정신없이 물어댔다. 안았어? 그녀를 안았어? 무섭도록 눈을 번뜩이며 물어오는 준홍에 지레 겁을 먹은 대현이 사색이 되어서는 급히 고개를 가로저어댔다.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어요.
"그렇담 오늘 아침 그대의 침소에서 나오시는 폐하를 마주친 저는, 헛것이라도 보았단 말입니까."
여전히 담담한 투로 물어오는 영재에게 대현은 잠시 원망스럽고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슬쩍 준홍의 손에서 제 옷깃을 빼낸 뒤 잔뜩 긴장한 얼굴로 운을 떼었다. 그것이, 어젯밤 폐하께서 급히 납시어 오랜 동무인 저와 밤새 이야기를 나눈 것이 전부입니다. 슬슬 용국의 눈치를 살피며 이어가는 말에 대현을 주시하던 용국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눈을 하더니 그대로 시선을 돌렸다. 입술을 잘근대던 힘찬이 잠시 음, 하고 머뭇대는데 준홍이 다시금 그 옷깃을 쥐어채며 으르렁댔다. 정말 그게 다야? 밤새 아무 일도 없었어? 어린 맹수가 토끼를 잡는 모양새로 한참을 그렇게 캐묻던 준홍이 곧 울리는 여제의 냉한 목소리에 꽉 쥐었던 멱살을 놓았다. 반듯했던 대현의 옷깃은 이미 흉한 구김이 잡힌지 오래였다.
그리고 준홍의 미간에도 흉한 주름이 잡혀있었다.
침소로 돌아가는 길, 준홍은 입이 잔뜩 나와서는 끊임없이 툴툴거렸다.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어. 제 칭얼거림 섞인 투정에 호위무사는 그저 고개를 숙였다. 아까의 대현의 말이 계속해서 거슬렸다. 아니, 그냥 대현의 존재부터가 거슬렸다. 착하고 유한 성격으로, 그래 흔히 말해 지랄맞은 제 성격을 받아주는 모습은 좋다지만 그것이 전부일 뿐 다른 부군들에 비해 신분도 세력도 뭣도 아닌 그를 직접 고집스레 데려다 부군으로 앉힌 것부터가 준홍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질투가 났다.
아까 그의 멱살을 쥐다 그를 제지시키는 차갑게 식은 여제의 얼굴을 보았다. 잔뜩 실망이라는 눈으로 저를 바라봄에 창피함과 억울함으로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죽을 뻔 한 고비를 한 차례 넘겼다지만 그것은 별개로, 오랜 동무 사이라고 칭하는 것에 준홍은 더욱이 빈정이 상했다. 오랜 동무로 치면 반평생을 함께 자라온 제 자신도 오랜 동무가 아닌가. 본래 욱하는 성향이 강하기는 했지만 그 말에, 또 동시에 준홍 자신만 질책하는듯한 눈으로 바라보던 여제는 더욱 잔인했다. 준홍은 처음으로 여제가 나쁘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뭐가 예쁘다고."
얼굴만 희고, 까만 머리칼에 까만 눈에. 늘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술을 떠올렸다.
"내가 이 곳에 있는 이유가 무엇인데."
왕자의 신분까지 버려가며 따분하고 꽉 막히는 이 곳에 살기로 한 이유가 무엇인데.
괜히 더욱 울컥이는 서러움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제가 부군의 자격으로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여제는 당황스러운 낯빛을 띄웠다. 그러다 웃었다. 웃는 낯으로 그렇게 말했었다. 이런 건 장난치는 게 아니야.
장난이 아니었다.
준홍이 겨울의 찬 바람을 들이마셨다. 코 끝이 시렸다.
"준홍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눈을 뜨자 하얀 눈 밭에 반사된 빛과 함께 제 눈에 들어차는 여제가 있었다. 슬쩍 미간을 좁혔다. 빛이 찬란히도 부서져 눈 안으로 쏟아들어왔다. 시려오는 기분에 눈가를 작게 비볐다. 여제가 한 발짝 한 발짝 가볍게 다가가 준홍 가까이에 서더니 그대로 빙긋 웃음지으며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화과자 꾸러미를 내밀었다. 어…, 놀란 듯 그것을 받아들면서도 고개를 갸웃하는 준홍에게 여제가 뿌듯하게 웃음지었다.
"네가 어릴 적부터 이것만 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지. 아까 모여있을 때 많이 먹던 것 같지도 않길래."
달디 단 화과자는 어릴적 사레가 들려 토악질을 한 이후 입에도 대지 않던 것이었다.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부디 오늘처럼 다른 부군들과 마찰을 일으키지 말라며 덧붙여오는 여제의 말에 준홍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폐하.
준홍의 답에 또 환하게 웃음지으며 손을 높이 들어올리더니 뒷 머리를 쓰담아주는 손길이 익숙해 가만 눈을 감았다. 여전히 코 끝이 시렸다.
오늘이 찬 겨울 날씨임에 감사했다.
티거티거티거 |
독자 여러분 안녕 :D
티거가 오늘도 사고를 치고 갑니다... ㅇ<-<
에피소드 형식이라는 게 사실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지라 조금 낯설어서 요즘 헤매고 있어요... 이렇게 쓰는 게 맞나, 하면서 그렇게 혼란을 겪으니 글도 제대로 써질리가 만무하구요
아 변명 그만하라구요?
넹^^*
오늘은 용국이와 준홍이의 이야기를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분명 사랑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밀어내야하는 '책임감'을 그리고 싶었구요 엇갈린 감정 속에서 그것 만으로 감사해야하는지 아니면 욕심을 내야하는지에 대한 '혼란'을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새벽을 뜨겁게 달궜던 이야기에 저는 더이상 아무런 가치를 못 느끼고 있어요. 다만 우리 용국이에게 더이상의 피해가 가지 않기만을 바랄 뿐 여러분 우리는 그저 우리의 사람들만 챙기면 되는 거니까요 그렇죠? 사과양이든 그 지인이라는 남자든 우리는 그냥 무시하면 돼요 그런 사람들에게 에너지 낭비하지 맙시당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구요 항상 사랑해요 :)
♥ 워더 / 코난 / 지야 / 메리미 / 열대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