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연 시간이었다. 조정 대신들이 웅성이는 가운데 평소보다 좀 더 늦게 자리에 앉은 용국이 비어있는 황좌를 올려보았다. 그 주위로 무어라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에 용국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경연의 시작 시간이 이미 훌쩍 지났음에도 여제의 모습은 보이질 않음에 다른 대신들도 의아한 눈치였다. 워낙 시간 개념에 있어 칼과 같은 인물이었던 여제가 아무런 예고 없이 이렇게 자리를 비운 것은 처음 일이었던만큼 당황스러운 빛을 띄우던 대신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불만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용국을 흘깃거리면서도 어린 여제가 사내들에 취해 벌써 초심을 잃었다느니 하며, 뭐같지도 않은 소리에 용국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 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폐하께서는 분명 아무런 연유도 없이 자리를 비우실 분이 아님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또한 폐하의 부군으로서, 이리 제 옆에서 떠드시니,"
슬쩍 제 옆의 늙은 대신 둘을 내려보던 용국이 슬쩍 웃음을 띄우더니 말을 이었다. 주경전에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부인의 험담을 듣는 저의 기분 또한 썩 좋지는 않군요."
그 말에 허허 웃음을 터뜨리는 몇몇 대신들과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다 여황 폐하 납시오, 하는 상궁의 목소리에 모두가 열리는 문과 함께 홍문관 안으로 들어서는 여제를 바라보았다. 반가운 마음에 웃음짓던 용국의 얼굴이 굳었다. 누가 보아도 아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애써 웃음짓는 여제가 황좌에 앉아 꾸벅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제가 늦었지요."
"…폐하,"
"예문관 대제학께서는 이만 자리에 앉아 주세요."
용국이 여제의 목소리에 그만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면서도 걱정 섞인 눈을 하고 여제의 얼굴을 쫓았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화장이 짙다. 아픈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함인지 따로 화장은 하지 않아도 예쁜 얼굴이었는데 웬 일로 입술도 전보다 붉게 칠한데다 핏기가 없을 뺨에도 분칠을 한 것이 영 어색했다. 워낙 철저한 사람이라 자주 아프지도 않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십수명의 대신들을 상대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을 하고 겨우 버티는 모습에 용국은 애가 닳았다. 며칠 전 매몰차게 내친 탓에 괜히 눈발을 맞게 한 제 탓인가 싶어 또 죄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여제는 그런 용국의 시선을 무시하듯 경전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평소답지 않았으나 평소다운 척 하려 노력하던 여제는 평소답지 못했던 용국을 뒤로하고 경연이 끝남과 동시에 홍문관을 나섰다. 그를 따라 용국도 서둘러 홍문관을 빠져나와 여제를 쫓았다. 곧바로 침소로 향하는 황제만의 길을 알고 있었다. 멀리서 그를 발견하고 급히 발걸음을 옮길 무렵 여제가 비틀거렸다. 용국의 마음도 그와 함께 철렁였고 곧 여제를 안듯 기대게 품을 내어주는 종업의 뒷모습과 자연스레 기대어오는 여제의 모습에 그만 발걸음을 멈추었다.
침소에 와서도 종이를 펴놓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썼다 지웠다만 반복했다. 어릴 적 명필이라 이름을 날리던 제 과거가 부끄러우리만큼 서툴고 어색한 문장들이 종이 위를 나돌아다니듯 했다. 앞에 쌓인 종이 뭉치들만 한가득이었다. 머릿 속에 오늘 나눈 경연의 내용은 잊은지 오래였고 종업과 여제, 그 모습만 선명하게 기억이 나기에 미간을 구겼다. 분명 자신이 밀어내며 평등하게 굴라 그렇게 말해왔음인데 그것을, 자신의 가르침을 착실하게도 따르는 제 옛 제자를 떠올리니 괜히 마음 한 구석이 저려왔다.
고개를 틀어 바라본 창밖은 또 금세 눈이 멎고 따뜻한 햇살이 비추어왔다. 용국이 앉은 책상까지는 무리라는 듯 그 모퉁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햇볕으로 손을 뻗자 따뜻하게 감싸오는 느낌에 잠시 눈을 감으니 햇살마냥 해사한 그 얼굴이 눈에 아련했다. 언제나 이 햇살을 닮아 따뜻한 눈을 하고 바라보던 여제의 온유한 표정을 떠올리다 다시 눈을 뜨고 붓을 잡았다.
손에 쥐어진 염주를 주물거리던 영재가 작게 한숨을 뱉었다. 무슨 수로 그의 마음을 얻어내지. 언젠가 불란서에서 들여왔다던 동화책의 내용이 생각났다. 곧 염주를 놓고 책장으로 손을 뻗어 낡디 낡아 바래진 동화책을 꺼내어 들추어보았다. 한 장 한 장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아슬아슬한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치면 낯선 이국의 언어가 영재를 반겼다. 외교에 관심이 많던 제 어머니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읽어주었던 동화책이라, 미쳐버린 왕이 중전의 물건을 죄다 불태울 때 영재가 손찌검을 당해가면서까지 제 품 속에 숨겨놓아서인지 부분부분이 흉하게 일그러져있었다. 낯선 이국의 언어로 쓰여진 걸 어머니는 어떻게, 제 나라 언어로 술술 읽었던건지. 어린 저로서는 길고 어려운 내용이라 언제나 앞 부분에서만 겨우 듣다 곧 잠이 들곤 했다.
그걸 보면 날 싫어하신 건 아닌게지.
그렇게 위안하며 어머니의 맑은 목소리를 더듬어 혼자 그 낯선 글자들을 앞에 두고 여러 의미를 유추해보려 애썼다만 아무래도 어려웠다. 그렇게 몇 년을 책장에 처박아두던 어린 날의 동화책이었는데.
불란서의 책이 아닙니까?
어머니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끼어든 것은 여제의 목소리였다. 부군으로 최종 선발된 직후 천설국에서 며칠간을 보내었을 적에 밤동무로 찾아온 공주가 책장 구석에서 그것을 꺼내들며 건넨 말이었다. 순식간에 표정이 굳으며 그것을 빼앗아들려 손을 뻗다, 그 말에 멈칫하고는 공주를 바라보며 전에 없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것이 어디의 것인지 알고 계십니까?
공주는 저 멀리 불란서라는 나라의 책이라며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혹 이곳에 불란서의 말을 하는 역관이 있습니까?
중전의 죽음 이후 개화적이던 천설국이 다시금 척화의 바람이 불었다.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 영재를 바라보던 공주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그를 올려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제가 비강국에 가져가 우리 말로 옮겨와도 되겠습니까? 그에 따라 굳어가는 영재의 표정에 슬쩍 눈치를 보던 공주가 책을 제 손에서 내려놓을 무렵 덥석 그 손을 감싸쥔 영재가 놀란 공주의 눈을 맞추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그리하여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흘림 가득한 낯선 글자 아래 익숙한 필체로 직접 옮겨적은 듯 성의껏 쓴 글씨가 눈에 들어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언제나 냉한 표정으로 정사를 보고 스스로를 옥죄면서또 자잘한 일에는 열과 성을 다했다. 잔정이 많다, 여제의 성품은 그러했다. 이제는 읽고 또 읽어 외울 듯한 그 책을 곱씹고 곱씹다 문득 한 대목에서 멈추었다.
세상 가장 어려운 일이 뭔지 아니? 글쎄요, 돈버는 일? 밥먹는 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영재가 허, 웃음을 흘린 뒤 곧 책을 덮었다. 누굴 놀리기라도 하는 듯한 대화에 잠시 눈을 감고 한숨을 뱉어낸 뒤 그대로 비단 침구 위로 누웠다. 폐하의 침전에서 온 나인이옵니다, 하며 영재를 찾는 이의 등장에 간만에 찾는 마음의 안정은 곧 무참이 깨어졌지만.
폐하께서 편찮으십니다. 그 말에 처음 감정은 놀람, 그 다음은 그런 자잘한 것까지 보고하는 나인을 향한 짜증, 끝으로는 걱정이 앞서는 것이 이상했다. 되었다, 나가보라 지시한 뒤 영재는 다시금 이마를 짚고 앉았다. 제가 알아온 지난 시간 속 여제는 언제나 완벽함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그런 여제가 감기 몸살로 앓아누웠다는 것이 그저 낯선 소식이라 혼란스러운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댔다. 마음을 얻는 것이 이 세상 가장 어렵다 했다. 영재는 결론을 내렸다. 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함이라도 여제를 찾아가야겠다고.
해가 기울고 수라가 내어질 시간인데도 여제의 방은 그저 말끔하기만 했다. 난데없는 영재의 등장에 놀란 기색을 띄우던 여제도 잠시, 곧 다시금 아픈 빛을 내보이면서도 꾸역꾸역 앉아있는 모습에 영재가 그 맞은편에 나란히 앉아 조용히 물음을 건넸다.
"많이 편찮으신 겁니까. 수라도 마다하시고."
많이 드셔야 얼른 나으실 것 아닙니까.
평소에는 사랑스럽게 뽀얗던 얼굴이 핏기도 없게 허약하기에 붉던 입술도 생기를 잃어있었다. 저도 모르게 또 날을 세우며 말을 잇다 아차 하며 작게 한숨을 뱉더니 곧 손을 뻗어 여제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생각보다 더 열이 올라있는 몸에 영재가 눈을 잠시 크게 떴다 감은 뒤 솜을 꼭꼭 채운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려 덮어주니 되었다며 손사래를 치는 여제에게 씁, 하는 소리와 함께 어린아이 어르듯 그를 다그쳤다. 그에 놀란 듯 눈만 깜빡거리는 여제가 의외로 귀여웠던 것은 영재만이 알고 있을테다.
품에서 그 동화책을 꺼낸 영재에게 또 화색을 띄우는 여제의 옆에 나란히 앉아, 그럼 밤동무라도 해 드리지요. 하는 말과 함께 영재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렇게 읽었을까, 또 그 대목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그와 동시에 여제의 시선이 저를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영재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또 마주치는 눈이 잠시 혼란스러운 빛을 띄우듯 작게 떨림에 영재가 슬쩍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여제의 눈이 말했다. 그대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같은 곳을 보는 동료일 뿐이라고. 그렇게 외치는데 그것에 대해 긍정하면서도, 영재가 속삭이듯 달래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영재의 목소리가 넓은 침소를 울렸다.
"그것은 아무도 모를 일이지요."
그 후로 천천히 맞물려진 입술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우왕 |
티거예요! 오늘 독방에서 무슨 주제를 원하는지 물었더니 불마크를 원하시는 분들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생각보다 많으시더라구요? 이런 욕망덩어리들 (본인소개) @''@ 오늘은 영재와 용국이의 이야기를 담았네요 용국이는 언제쯤... 언제쯤에나 제대로... 짠내가 아니라 단내가(?) 날까요... (아련아련) 또 영재의 마음은 정확히 어떤건지 저조차도 모르겠네요, 영재도 잘 모를 거예요 그 후의 후폭풍은 또 어떻게 감당하게 될지... 다음은 불마크겠군요 (웃음) 비회원 분들께는 미리 애도의 말씀을 드리며 또 항상 부족한 글 아끼고 칭찬해주시고 더불어 부족한 저까지 예뻐해주시는 우리 천사같은 독자들에게도 사랑한다는 말 전해요..♡ 이만 티거는 물러갑니다 총총총 ♥ 워더 / 코난 / 지야 / 메리미 / 마토끼 / 열대야 / 영재꺼 / 리나 ♥ 암호닉 꼭꼭 기억할게요 영단어는 안 외워도 암호닉은 꼭꼭 외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