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한 넌 내 인생 최고의 못된 여우
04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오후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퍼붓는 수준에 이르는 비에 소나기니 곧 그치겠지, 하던 비는 9시 야자가 끝나서도 흩날리고 있었다. 11시 야자까지 남은 쉬는 시간 동안 김여주는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여주."
"응."
“...집에 갈까?”
내 제안에 창 밖만 바라보던 김여주가 날 돌아보았다. 푸흐, 하고 웃는 김여주의 웃음소리는 빗소리만큼 청량했다.
경수야, 우산 있어? 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 우산이 없구나.
“나도 없는데.”
“...”
“그래도 우리 갈까?”
김여주의 뒤로 창밖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처럼은 아니지만 많이 젖을 텐데. 걱정이 깃든 내 눈을 알아차린 건지 김여주는 웃으며 먼저 일어섰다. 괜찮아, 가끔 시원하게 비 맞는 것도.
“...어..”
“..이거라도 쓰고 가자.”
현관 앞에 선 우리는 잠시 멈춰 서 비 내리는 하늘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그냥 가는 건 안 될 것 같아 입고 있던 마이를 벗었다. 김여주가 의외라는 듯 놀란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그런 김여주와 눈이 마주치자 그냥 웃음이 나왔다. 슬금슬금 올라오는 광대를 애써 숨기며 마이를 내밀었다.
“내일 마이 못 입을 텐데..”
“괜찮아. 가자.”
내 위로 마이를 두르고 그 안으로 김여주가 들어왔다. 훅 끼치는 김여주의 샴푸냄새가 아찔했다. 이러니까 우리 그거 같아, 조인성이랑 손예진. 영화를 좋아하는 김여주는 지금 우리의 모습에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고 있다. 그만큼 지금 우리가 예쁜 순간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거겠지?
“근데 넌 조인성보다 많이 작아서 안 되겠다.”
“...넌 뭐 손예진만큼 예쁘게?”
“그래서 안 예쁘다고?”
“아니. 예뻐.”
“너도 잘생겼어.”
부끄러운 칭찬을 뻔뻔하게 주고받은 우리는 킥킥 웃었다. 남이 들으면 욕하겠다 경수야. 김여주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앞으로 이렇게 비를 맞고 가야 할 때 김여주의 머릿속에 조인성이 아닌 내가 떠올랐으면 좋겠다. 김여주가 하나 둘 셋 하면 뛰는 거야, 하고 조용히 속삭였다. 하나, 둘, 셋!
“푸, 경수야! 저기!”
마이를 머리 위로 올렸어도 이미 푹 젖은 김여주와 나는 뭐가 그리도 즐거웠는지 웃으며 달렸다. 한 건물을 가리킨 김여주의 말을 따라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건물 입구에들어가 둘 다 무릎을 짚고 숨을 몰아쉬다 김여주가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나도 따라 웃었다. 비에 젖은 김여주의 얼굴은 맺혀있는 물방울 때문인지 투명하다는 느낌을 안겨 주었다. 투명한 눈망울이 맞부딪혔다.
눈을 활짝 휘며 미소지은 김여주는 푹 젖은 제 머리의 물기를 짜면서 내게 다가왔다. 내게 다가온 김여주의 차가운 손이 내 머리칼에 닿았다. 너도 많이 젖었다 경수야. 하얀 손이 머리칼을 따라 내 앞머리로, 구렛나루로, 귀로, 움직였다.
"..."
“너 지금 입술이 파르르 떨려.”
내 귀에 와 닿은 손은 곧 내 볼을 감쌌다. 그 손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서 곧 사라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김여주의 말에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날 그대로 비추는 김여주의 눈은 일렁이는 내 눈을 고요히 바라봤다.
“있잖아 경수야, 내가 아직 키스는 안 해봤거든?”
“...”
“첫키스를 너랑 하면 어떨까 상상 중이었어.”
김여주는 내 볼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맑게 웃었다. 곧 손을 뗀 김여주는 내 앞머리를 몇 번 더 넘겨주었다. 이마 까도 잘생겼네, 경수야. 김여주의 손길을 그대로 받아들이던 나는 손을 들어올려 김여주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멈칫하던 김여주는 예쁘게 웃어준다. 나는 왠지 모르게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서둘러 김여주를 밀어내고 비 내리는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가자. 김여주는 말없이 내 마이 안으로 들어왔다.
“집에, 들어왔다 가.”
먼저 도착한 김여주의 집에 나는 얼떨결에 발을 들였다. 늦은 시간인데도 집은 비어있었다. 부모님은? 안 계셔. 아늑한 집 분위기가 이제야 막 들어왔음에도 따뜻했다. 머리카락과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에 들어가지 않고 현관에 가만히 서있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간 김여주가 날 돌아봤다.
“씻고 갈래?”
“어? 아니, 우산만.. 빌려줘”
“..그래.”
김여주는 노란 우산을 내밀었다. 고마워, 내일 돌려줄게. 내 말에 김여주는 고개를 저었다. 가져, 선물이야.
“...갈게.”
“잘 가.”
김여주의 집에서 나와 샛노란 우산을 펼쳤다. 난 못 붙잡으면서 김여주가 날 붙잡았으면 하는 내 형편없는 모습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김여주가 준 첫 선물인 우산 아래 한참을 서 빗소리만 듣다가, 집으로 향했다.
며칠 동안 미열을 동반한 옅은 감기에 시달렸다. 김여주와 나란히 감기에 걸린 나를 보고 박찬열은 둘이 뽀뽀라도 했냐며 놀려댔다. 그런 박찬열을 얄밉지 않게 째려본 후 교실 앞에 앉아있는 김여주를 바라봤다. 여자애들 사이에 앉아있는 김여주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재잘재잘, 작은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아. 쟤 또 끼부리네.”
"..."
"아무데서나 사람 홀리면 혼낸다고 했는데."
내 옆의 박찬열이 툴툴대는 소리는 한 귀로 흘리며 한 여자애의 볼을 감싼 채 활짝 웃고 있는 김여주를 멍하니 바라봤다. 문득 비 오던 날 밤이 생각나 얼굴이 화끈했다. 괜히 눈을 어디 둬야할지 몰라 이리저리 굴리다 내 옆에서 필통을 베고 옆으로 누워 자고 있는 김종인을 힐긋 바라봤다. 볼을 만지는 건 무슨 심정일까. 나도 모르게 김종인의 볼에 손을 갖다 댔다.
“경수야, 너.. 종인이 좋아해?”
언제 와있던 건지, 내 귀에 대고 말하는 김여주에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어? 아니! 내 반응이 웃겼는지 깔깔 웃는 김여주다. 얼굴이 더 화끈거려왔다.
“와, 찬열아. 경수가...”
“아니! 오해라니깐!”
“그럼 왜 한 건데?”
“아...”
니 생각이 나서 나도 모르게 볼에 손을 올려보고 싶었어. 라고 대답할 순 없었다. 내가 어벙하게 입을 벙긋거리자 실실 웃는 김여주다. 그래, 비밀로 해줄게 경수야. 이미 날 놀리는 방법은 세상에서 제일 잘 아는 김여주를 내가 어떻게 이길까.
“아, 김여주. 너 변백현한테 번호 줬다며.”
“어? 어떻게 알았어?”
“변백현이 번호 땄다면서 아주 난리치던데.”
김여주는 웃으며 박찬열의 옆에 가 앉았다. 애가 귀엽던데. 그 말에 질색하는 건 박찬열이다.
“그래서, 설마 사귀려고?”
“글쎄?”
“걔랑 사귈 바에 나랑-”
“나 잔다.”
박찬열의 말을 뚝 끊고 푹 책상에 엎드리는 김여주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 눈 코 입 모두 커진 박찬열이 나와 눈이 마주쳤다. 경수야 내가 그렇게 별로야? 그렇게 묻고 있는 박찬열의 얼굴을 무시하고 나도 엎드렸다. 김여주는 왜 남자가 이렇게 많은 거야. 나도 남자지만. 짜증났다.
#미운 당신을 아직도 나는
“경수야, 나 오늘 먼저 가.”
“...왜?”
“준면오빠랑 공부하기로 해서.”
“아.”
그 학생회장 후보인 김준면?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다. 넌 왜 그렇게 공부를 다른 사람이랑 같이 해. 나랑은 안하면서. 입안에서 맴도는 말들 끝에 겨우 물었다.
“...어디서?”
“그냥, 우리 집.”
카페도 아니고 집에서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고 있었는지 김여주가 손을 들어 올려 내 입술을 쓸었다. 김여주의 복숭아향 핸드크림냄새가, 가득 몰려온다.
“무슨.. 공부하려고 그렇게까지 해?”
“수학. 오빠가 모르는 거 알려주겠대서. 아, 종인아!”
너무 캐묻는 건 아닐까 용기내서 물은 내 질문에 대답하던 김여주는 마침 교실을 나서는 김종인에게 뛰어갔다. 나 갈게 경수야, 열공! 짜증 반, 답답함 반에 한숨이 나왔다. 너와 함께 하는 하굣길만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였는데. 김종인과 팔짱을 낀 채 대화 나누며 멀어지는 김여주를 바라봤다. 기지배가 뒷모습도 예쁘다.
11시 야자가 끝나고 걸어가는 길. 오랜만에 혼자 걷는 길은 생각보다 더 쓸쓸했다. 이어폰을 양쪽 귀에 꽂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빵빵하게 들어도, 한 쪽씩 나눠듣던 쑥스러운 그 노래가 더 좋다. 애들이랑 같이 가던 버블티 가게, 김여주가 좋아하는 분식집, 자주 쉬다가던 놀이터, 익숙하던 하굣길은 그래도 나름 색다르게 다가와 심심하진 않았다.
김여주 집에 있겠지? 문득 드는 궁금함에 큰 길을 두고 일부러 김여주의 집을 지나쳐가는 길로 들어섰다. 불이 켜진 창문만 보고 집에 갈 생각이었다. 몇 개의 은은한 가로등을 지나면 김여주의 집이 보이는데.
“아, 버스 다 끊겼겠다 오빠. 괜찮겠어?”
“괜찮아, 내가 너도 아니고.”
김여주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코너를 돌려던 것을 멈추고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아, 내가 왜 숨었지. 밀려오는 후회감에 머리카락을 쥐었다. 이 늦은 시간까지 집에 함께 있던 건지, 김준면과 김여주가 집 앞에 놓인 작은 골목에서 나오고 있었다.
“히, 조심히 가요, 오빠.”
김준면의 어깨에 손을 올린 김여주는 뒤꿈치를 들어 올렸다 내렸다. 차마 그 모습을 봐선 안 될 것 같아, 시선을 내려 둘의 신발만 바라봤다. 짧게 올라갔다 내려온 김여주의 스니커즈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난 다시 시선을 들어 가로등 빛 아래의 김여주를 바라봤다. 김준면이라던 선배는 물러난 김여주에게 더 다가갔다. 김여주의 허리에 김준면의 팔이 둘러졌다. 나는 더 이상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설렘을 안고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 나갔다. 큰 길로 갈걸, 큰 길로 갈 걸. 내가 멍청이다.
“...키스 안 해봤다면서..”
큰 길을 걷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김여주가 지금 날 본다면 얼마나 찌질하고 한심하게 생각할까. 그래도 눈물이 나는 건 멈출 수 없었다. 김여주가, 조금은 밉다. 아니. 김준면이 더 밉다.
#어느새 혼잣말
나는 다음날 김여주를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어 고개를 자꾸 돌렸다. 김여주는 몇 번 날 이상하게 보는가 싶더니 이내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자 더 편할 줄 알았던 기분은 더 처참해졌다. 딱, 너와 내가 이정도인 것 같아서, 나는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경수야, 나 지금 가.”
9시 야자가 끝난 시간, 김여주는 날 툭툭 건드리더니 저렇게 말했다. 갑작스러운 대화에 내가 아무런 대답을 못한 채 빤히 바라만 보자 김여주는 가만히 서있었다. ...그래. 늦게 들려온 내 대답에 김여주가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11시 야자끝나고 니가 나랑 같이 안가겠다고 할 것 같아서 겁나서 지금 가는 거야.”
“...”
“내일은 이러지 마. 계속 이러면 너랑 안 놀래. 안녕.”
김여주는 정말 저답게 예쁘게 웃으며 정곡을 찌르고는 떠났다. 나랑 안 논다니. 말이 너무했다. 근데 여주야. 하나 틀린 게 있는데.
“같이 안가겠다 할 리가.. 없잖아.”
좀만 더 기다려주지. 아쉽게 내뱉어진 말은 주인 없이 허공에만 맴돌았다.
늦게 와서 죄송해요! 집에 매일 열한시 넘어서 오다보니.. 앞으로도 매일은 못 올 것 같네요ㅠㅠ
♥♥「오윈」,「초두」♥♥
암호닉 감사해요! 제 인생 첫 암호닉 분들ㅜ^ㅜ 하트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