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3. 5. 목
악몽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되는 꿈을 꾸었다.
머리를 박박 민 남자들이 아빠의 가게에 와서 횡포를 부렸다.
저마다 각목과 쇠파이프를 하나씩 들고 가게의 모든 물건을 부수기 시작했고,
가게에서 남자들에게 하지말라고 팔을 붙잡고 말리던 엄마는 어떤 남자에게 뒷통수를 맞고 쓰러 졌다.
아빠는 남자들에게 너무 많이 맞아서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 하고 신체 포기 각서를 쓰고
지문을 찍었다. 아빠의 지문은 인주도 안 찍었는데 피가 뚝뚝 흐르는 빨간 색이었다.
나는 가게 안에 숨어서 그 장면을 숨도 내쉬지 못 하고 모든 걸 지켜 보았다.
" 괜찮아? "
얼굴을 감싸며 자다가 벌떡 일어 났을 때, 방 구석에서 걱정스런 목소리가 불쑥 들려 왔다.
가만히 서서 묵묵히 나를 내려다 보던 남자애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게 컵을 내밀었다.
" 대체 무슨 꿈을 꿨는지 모르겠는데, 소리를 세 번이나 지르더라고. 이것 좀 마셔. "
헝클어진 머리와 투박한 체육복과는 다르게 가까이서 본 남자애의 얼굴은 퍽 맑아 보였다.
경수라고 했었지. 나는 남자애의 이름을 되내이며 내민 컵을 입에 가져갔다.
남자애는 어색한지 흠, 헛기침하는 소리를 내며 시선을 내 옆에서 곤히 자는 아줌마에게 두고 있었다.
" 더 자. 아직 아침 될려면 멀었어. "
컵을 쟁반위에 올리며 나즈막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남자애는 딱히 별 표정을 짓지 않았다.
웃지도, 화난 것 같지도, 심드렁한 표정도 아니었다.
남자애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 나는 등을 벽에 기대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당겼다.
오늘은 잠을 다시 못 이룰 것 같아서 다시 눕고 눈만 깜빡였을 때,
남자애가 나간 자리에는, [수면 유도제]라고 적힌 약통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새 것이다.
15. 3. 17. 화
남자애가 아팠다.
남자애는 아픈 것도 딱히 티내지 않아서 사실 아침까지도 몰랐는데, 여자 애들 때문에 알 게 됐다.
" 경수야, 양호실에 가서 누워 있어. 내가 선생님한테 말 해 볼 게. "
" 괜찮아. "
" 이거 마셔 볼래? 속 안 좋을 때 이게 제일 좋다고 하던데... "
" 아까 마셨어. 고마워. "
" 너 진짜 어디 크게 아픈 거 아니야? 얼굴 색이 안 좋아서. "
" 나 괜찮으니깐 자리에 가 줄래? 말 할 때 마다 쏠려서 그래. "
남자애는 그 아픈 와중에도 모두에게 상냥했다.
전교 1등의 이미지 메이킹인지, 아니면 천성적으로 친절한 건지 모르겠다.
남자애가 아프다는 소식에 1교시가 지나기도 전에 옆 반까지 퍼진 것 같았다.
여자애들이 사놓은 온 갖 약들이 남자애의 책상에 쌓였고,
수업에 들어오는 선생님은 제일 먼저 남자애의 안색을 살폈다.
남자애는 쇄골쪽을 계속 두드리며 수업을 꾸준히 들었지만,
선생님은 남자애의 상태를 살핀 다고 수업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분교라 학생이 많지 않아 학생에게 관심이 쏠리는 건 이해하지만,
이건 좀 심한 것 같다.
" 으윽... "
남자애는 진짜 어디가 잘 못된 모양이다.
아픈 와중에도 뿔테 안경을 쓰고 수업을 들으며 미친 듯이 필기하다가,
결국 낮은 신음 소리와 함께 책상위로 엎어 졌다.
" 경수야, 괜찮아?! "
남자애가 책상에 쓰러지자마자 수업이 중단 되었고, 선생님이 직접 남자애를 흔들어 깨웠다.
이건 무슨...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사실 고3중에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을 까.
다들 소화 불량에다 두통은 베이스로 달고 다닌다.
수업 중에 코피를 쏟는 애도 있고, 남자애처럼 장염에 소화불량에 온 갖 속병 앓는 애도 있지만 그 누구도 저렇게까지 걱정을 안 해준다.
시골 학교여서 그런 걸까, 아니면 모두가 아픈 시기에, 남자애만은 예외인 걸 까.
" 조퇴 할 게요. "
아직 선생님의 대답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남자애는 가방을 이미 챙기고 있다.
뭐,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겠지.
학교 뿐만 아니라 이 시골의 미래를 책임질 유망주님이 아프시다는데 그 누가 쉬라고 허락해주지 않을까.
남자애가 교실을 나가는 순간까지 교실 안은 '괜찮아?' 라는 말이 끊이지 않았다.
도대체 별 일 아닌데 왜 이렇게 오버하는 건 지 모르겠다.
수업이 끝나고 수학 선생님은 나를 불렀다.
꼬장꼬장해 보이는 시골 이장님같은 스타일의 선생님은 내게 두꺼운 종이를 내밀었다.
" 경수랑 같은 집에서 살고 있지? "
" 아....네. "
" 그럼 이것 좀 경수한테 전해 줄래? 수학 경시 대회에 출제된 문제들을 토대로
문제를 뽑아 봤거든. 아까 줬어야 하는데 경수가 없는 바람에... "
" 아프다고 조퇴했는데요? "
" 그래, 뭐... 아픈 게 하루 이틀 가겠니? 경수는 워낙 자기 관리 잘 하는 학생이니 금방 나을 거다.
절반 이상 풀어서 내일까지 나한테 갖고 오라고 전해 주렴. "
" ...... "
" 네가 잘 좀 돌 봐주고. 학교뿐만 아니라 마을에서도 경수한테 거는 기대가 커. "
내 손에 묵직하게 들린 종이를 내려다 보았다.
남자애는 새벽부터 아파서 화장실과 방을 왔다갔다 하며 구토를 했다.
그때는 단순히 속만 안 좋은 줄 알았지, 아픈 지는 몰랐다.
대청 마루의 발자국 소리때문에 나도 잠을 몇 번 깼다가 잠들었다를 반복했다.
그렇게 아파서 조퇴한 애한테 이 엄청난 걸 반이나 풀어 오라고?
반 아이들이 '괜찮아?'라고 말하던 게 귓가에 이명처럼 울리다 나한테 까지 전이 됬다.
정말 괜찮을까, 그 남자애는.
집으로 돌아가니 남자애는 연탄도 때지 않은 차가운 방에서 끙끙 거리고 있었다.
아빠나 아줌마는 집에 없는 건지, 남자애는 차오르는 눈물만 삼키며 계속 뭐라고 중얼거렸다.
" 아빠. "
하고. 그 뒤에 뭐라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연탄을 때자, 따뜻해져서 금방 잠들어버린 남자애때문에.
그리고 나는 수학 선생이 준 문제를 남자애에게 건네주지 않았다. 다음 날 된통 혼날 것 같다.
별 생각은 없었는데. 그냥, 전해주기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