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지났다고 제법 풀린 날씨였으나 밤공기는 여전히 싸늘했다. 언제 오실지 모를 님을 기다리며 늦은 시각까지 여제를 기다리던 종업에게로 다가온 무거운 발걸음의 주인은 힘찬이었다. 별을 보며 얼굴빛을 환히 밝히는 여제를 보낸 것으로 오늘 밤은 힘찬과의 합방인 줄 알았는데. 대현에게도 그렇게 말해두고, 또 내일 아침은 목욕물을 더 따뜻히 데워 놓으라 지시한 뒤 그를 기다리던 종업에게는 꽤나 당황스러운 전개였을테다. 그것을 대놓고 드러내듯 놀란 얼굴을 한 종업에게 힘찬은 어색한 웃음을 걸치며 제 등에 업힌 여제를 내보였다. 제법 독한 술 냄새에 종업이 슬쩍 미간을 좁히며 그를 안아들자 잠든 여제의 달빛 받은 얼굴을 바라보던 힘찬이 가볍게 목례했다. 아무래도 누추한 제 침소보다야 폐하의 본 침소가 나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 말에 종업 역시 제 말을 끝내고 돌아서는 그에게 작게 목례했다.
따뜻하게 불을 올린 방 안 가장 뜨거운 아랫목에 요를 두고 또 그 위로 잠든 여제를 눕히니 여제가 짧게 뒤척이며 잠꼬대라도 하듯 입술을 오물댔다. 종업이 그 모습에 작게 웃음을 흘렸다. 평소엔 술이라면 입에도 안 대시는 분이. 용국의 그 모습이, 오죽 속상한 일이었으면 그랬을까 싶어, 동시에 여제를 쫓아 나왔을 용국을 알기에 또 괜히 제가 다 속상해져 한숨을 뱉었다. 힘찬에게 가 술만 연거푸 들이키다 취해서 잠들었음이 틀림 없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종업이 문득 떠오른 힘찬의 얼굴에 잠시 여제의 곱게 다물린 눈꺼풀을 내려보았다. 연각에서의 그는 제법 기대에 찬 얼굴이었는데, 아까의 여제를 바라보던 힘찬은 그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음을 종업은 눈치챌 수 있었다.
"…여러 사람 속 썩이는데 재주 있으십니다."
안아들었을 때의 느낌이 생생했다. 남들에 비해 아담한 키였으나 왜소하지 않았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늘 당당하게 걷던 여제에게서 작다, 라는 표현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음인데 아까의 그는 생각보다 더 작고, 더 약한 사람이었다. 술 몇 잔에 그리 눈물바람을 했다고 광고라도 하듯 붉힌 눈가와 금세 곯아떨어진 작은 몸이 늘 당당하고 올곧던 그 여제와는 꽤나 거리가 있다고, 종업은 그리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요를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
"요즘 고뿔이 그리 독합니다."
"…."
"…폐하가 편찮으시면 그 고뿔놈으로부터 폐하를 지키지 못한 저는 죽어요."
그러니 앓지 마세요.
화려한 용포를 벗고 평범한 양갓집의 며느리마냥 옥색 계열의 비단옷과 비녀를 정갈하게 맞춰 입은 모습이 단아했다. 침전 상궁, 나인들과 대현 그리고 종업만이 아는 밀회를 떠날 때면 언제나처럼 여제의 옆자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대현의 것이었기에 호위무사의 신분으로 멀찍이서 바라보아야 했으나 그냥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여겼다. 화려하지 않았지만 그 나름대로 정갈하고 단아한 모습이 또 잘 어울려 종업은 잠시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 평범하게 태어났다면 평범한 부부처럼 살지 않았을까, 하는. 곧 이것에 대해 스스로 헛생각이라며 일단락 지었으나 항상 멀리서 지켜보면 거리낌 없이 대화하고 나란히 걷는 대현이 언제나 부러웠던 것 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작은 가게 안으로 몸을 들인 두 사람을 따라 종업도 그 근처로 몸을 숨겼다. 여제는 좌판에 널린 노리개 두 개를 가지고 고민하듯 미간을 좁혔고, 대현은 무슨 생각에 빠진 건지 멍하니 서있는 모습이 영 위태로워보였다. 곧 여제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듯 했으나 잠시 뒤 여주인과 무어라 대화를 나누더니 다시 반쯤 정신을 놓은 모습에 종업이 무언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대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분명하건대 본인은 어떤 일에도 나설 수 없음이 불편하기만 했다.
그러다 맞잡은 두 손에 그만 발걸음을 멈추었다. 용국의 이야기를 하며 얼굴을 붉히던 어린 소녀의 얼굴과는 또 다르게 꽃봉오리를 틔우는 봄꽃마냥 환하게 퍼지는 웃음이 대현을 향했다. 종업의 모습은 발견조차 하지 못한 채 따뜻한 봄을 불러오는 두 사람의 모습에 종업은 무언지 모를 기분 나쁜 뜨거움이 가슴 언저리에 무겁게 얹힘을 느낄 수 있었다. 대현을 향한 미움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모른 채 웃는 여제를 향한 야속함이나 서운함도 분명 아닌데, 종업 스스로도 정의내릴 수 없는 감정에 그것을 이해하고 가라앉히려 잠시 멈춰서 숨을 고를 뿐이었다.
더이상의 호위는 필요치 않을 것 같다 결론을 내린 종업이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그 때까지도 마음을 짓누르는 무언가는 없어질 생각을 않았다.
새로이 엮어진 끈이 대현의 손목을 감싸고 있었다. 때묻지 않은 새 천조각들에 팔찌 조각들도 기분 좋다는 듯 경쾌하게 흔들렸다. 대현 역시 여제와 함께하는 길이 좋지 않을리 만무했으나 아까의 여주인의 말이 끝끝내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혹 휘월국의 사람을 보게 되신다면 이 곳을 알려주셨으면 한다고. 끝에 가서 갈라지던 목소리가 묘하게 소름이 돋았다. 휘월국이라 함은 오래 전 멸망한 나라, 정도가 대현이 아는 것의 전부였다. 제 어머니의 팔찌를 보고 그리 물은 것으로 보아. 어머니가 휘월국의 사람이었나 등등의 끝없는 생각의 고리를 걸고 늘어지니 결국 먼저 지친 것은 그런 대현을 바라보던 여제 쪽이었다.
해도 기울어가니 이만 들어가자는 여제의 말에 또 고개를 끄덕이며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로 여제를 안내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해, 평소 너답지 않게. 별 생각 없이 물어오는 말에 대현이 여제를 내려보았다. 저보다 배운 것도 많고 똑똑한 여제라면 무언가 알 수도 있지 않을까. 대현이 떠보듯 물었다.
"휘월국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갑자기 휘월국은 왜?"
"그것이…, 이번에 희락전에 새로이 들어온 아이의 부모가 휘월국 출신이라지 뭡니까, 그래서인지 북쪽의 사투리가 심하더라고요."
괜히 이상하게 보일까 더 붕 뜬 목소리로 주절대는 대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제는 순간 굳어졌던 표정을 좀처럼 풀지 않았다. 휘월국…. 작게 중얼거리는 여제의 눈빛이 오늘 처음으로 차게 식어감에 대현은 스스로 무언가 잘못했구나 싶어 울상을 지으며 소리 없이 자신을 자책했다. 하루 종일 잘 지내다가 이게 웬 봉변인지. 대현의 자책에도 불구하고 결국 여제는 황궁에 도착해서도 별다른 말 없이 딱딱하게 식은 어투로 대현을 등떠밀어 보낼 뿐이었다.
악몽과도 같던 밤이었다.
그렇게 여제를 보낸 뒤에도 한참을 그리 서있다가 비틀비틀 걸어 다시 침소로 도착하니 아까의 그 나인 아이는 안절부절 못하는 눈치로 용국의 눈치만 살피다 그만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대제학께서 베푸시는 친절에 그만 이년이 방자하게도…. 울음 섞인 목소리에 용국이 작게 한숨을 뱉은 뒤 그를 지나쳐 걸었다. 꼭 여제의 또래인 아이의 울음에 여제가 또 울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음이라, 눈밭에 젖은 버선 덕에 발끝이 시렸다. 늘 깨끗하고 정갈하던 옷매무새가 용국의 심정이라도 대변하듯 바람에 맞아 구김이 졌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버선은 제 모습을 잊은 것마냥 지저분하기만 했다. 문득 고개를 돌린 시선의 끝에 가득 피어있던 동백나무의 동백이 오늘따라 유난히 뚝뚝 많이도 떨어진 것이 또 서러운 마음이 일었다. 손에 들린 짓물린 동백이 흉하게도 망가져있었다. 그것이 꼭 용국 자신과 닮았다, 그리 생각했다. 모순이었다. 분명 상처를 준 것도 자신인데 상처를 받는 것 역시 용국 자신의 몫이었다. 그렇게 이어지는 생각의 연결고리에 그날도 용국의 침소는 불이 꺼질 줄을 몰랐다.
여제가 다시금 용국의 침소를 찾은 것은 그렇게 하룻밤이 지나고서였다. 사사로운 감정 아래 찾은 것이 아님을 종업의 동행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무언가 긴장이라도 한 듯 딱딱히 굳은 얼굴의 여제는 종업과 함께 용국의 침소로 들었는데 종업은 아무래도 둘 사이에 끼어 눈치가 보이는 모양새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는 용국에게 그럴 필요 없다 딱 잘라 말한 여제는 용국의 별채에 딸린 서재로 향해 넓은 탁상을 사이로 두고 두 부군을 마주했다. 두 사람 모두 영 어리둥절한 얼굴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여제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맑은 목소리가 서재를 울렸다.
"휘월국의 세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폐하,"
"그 왕실의 족속들은 전부 멸했다고 하나, 그들 사이 전설처럼 내려오는 '구원자'에 대한 이야기는 좀처럼 쉽게 사그라들지 못하는 눈치인듯 합니다."
조정에서도 이와 같은 소문이 파다해요. 이들을, 휘월국의 백성들이었던 이들을 내가 다스리지 못하면 곧 황권도, 곧이어 나라도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여제의 얼굴은 무언지 모를 긴장과 두려움, 불확실성으로 가득차있었다. 용국이 얼굴을 굳힌 채 그 이야기에 집중했다. 종업 역시 그들을 따라 집중하듯 상체를 기울였다. 잠시 고민에 빠진 듯 시선을 아래로 둔 채 아무런 말도 않던 용국이 곧 느릿하게 입을 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스승님, 허나…."
"폐하보다 더 오래 살아온 이 나라의 백성으로서, 조정에 도는 흉흉한 이야기들도 전부 들어온 그대의 스승으로서 장담합니다. 본디 소문이라는 것은 눈덩이마냥 불어나기 쉽고 그만큼 부서지기도 쉬운 것이 아닙니까."
너무 속앓이하지 마세요.
그 말을 끝으로 설핏 웃어오는 용국에 여제도 어색하게 따라 웃어보였다. 종업이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다 눈 녹듯 풀리는 여제의 얼굴을 응시하더니 곧 저도 슬쩍 따라 웃음지었다. 여제의 무거웠던 마음이 풀린 것이 분명하거니와 그것이라면 종업 역시 만족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스승님.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서재를 나서는 여제를 따라 종업이 몸을 일으키다 문득 마주친 용국의 시선에 허리 숙여 인사하자 용국은 그런 종업에게 웃음으로 답했다. 그리고 덧붙이듯 작게 중얼거렸다.
"잘 부탁합니다."
그 말에 잠시 용국을 바라보던 종업이 이내 고개를 끄덕인 뒤 서재를 나서자 그들이 나선 서재의 작은 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용국이 곧 서재 깊숙한 곳에서 장검을 꺼내들었다. 스승님이라 부르던 목소리가 귀에 선명했다. 질리도록 잡던 서책을 내려두고 칼자루에서 긴 장검을 빼드는 손길이 마냥 서툴지 않았다. 새것마냥 서슬퍼런 칼이 영 서재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다. 다시금 칼자루 속에 그것을 닫은 용국이 본래의 자리에 그것을 놓고 제 침소로 돌아오니 창 밖으로 저 멀리 걷고 있는 여제가 보였다.
"…폐하의 스승으로서 장담드린다 했지요."
그대의 부군으로서 지키겠습니다.
헐 너무 오랜만이예요 |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여러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티거가 돌아왔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진짜 빨리 오고싶었는데 컴퓨터 고장에 사촌동생들 테러에... 고등학교 준비로 요즘 인티 들어올 일도 잘 없었던 것 같아요. 다들 정말정말 예쁜 댓글 남겨줬는데 답글도 못 남겨주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너무 미안해요 정말 오늘은 전 부치고 와서 다 달아줘야징 @''@
아무튼 할머니 댁 와서 이렇게 겨우 쓰네요 원래 어제 도착해서 어제 밤까지 버티다 용국이 파트에서 미처 다 못 쓰고 강제 취침을 당했다는 슬픈 전설이...
아무래도 정신없는 상태에서 쓰다보니 좀... 그렇죠..? 예아 그렇습니다 저도 알아요 (운다)
항상 좋은 글로 독자분들이 보여주시는 싸랑!!!!!!!!!!!!! 으리!!!!!!!!!!!!!!!!에 보답하고 싶은데 마냥 쉽지가 않더라는...☆
지금쯤 몇몇 독자분들은 저처럼 이미 설날 준비에 들어가신 분들도 계실테고 아직 고속도로 위에서 방황하고 계실 분들도 계실거고 사촌동생/조카들 습격에 긴장 상태이실 분들도 계실텐데
다들 행복하고 즐거운 설날이 되셨으면 좋겠어요!
(큰절을 올린다)
늘 사랑하고 고맙고 미안합니다 우리 독자들 ♥
♥♥ 워더 / 코난 / 지야 / 메리미 / 마토끼 / 열대야 / 영재꺼 / 리나 / 텐샤 / 토순이 / 밥이 보고싶다 / 화난 새 / 으갸갹 / 소조 / 호빵맨 / 폐하 / 솜사탕 / 막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