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피곤해.
어깨로 둘러맨 가방을 소파에 내팽겨쳤다. 설이라고 뭐 특별한게 있는지. 평소처럼, 아니 평소보다 더하게 사무실에서 잔업을 처리하고 왔더니 온 몸이 뻐근했다.
앉아서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자니 어깨가 빠질 것 같았다.
냉장고로 가서 맥주캔 하나를 꺼냈다. 자연스러운 손동작으로 뚜껑을 따고 한모금 들이켰다.
한 눈에 모든 구조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집은 좁았다. 이 좁은 집에, 조그만 나 하나 있자니, 이것도 퍽 외로웠다.
"아...이제 의도적으로 연애를 할 때인가.."
괜히 소리내서 중얼거려봤다. 공허한 울림이 좁은 거실에 약하게 울렸다.
베란다를 내다본다. 아직 완전하게 노을이 내려앉지는 않은 초저녁. 저녁을 해먹기에는 이르고, 밖으로 나돌기에는 시작이 늦은, 그런 시간.
창으로 부딛히는 바람이 꽤 거셌다. 잠시, 고민했다.
차가운 맥주를 크게 들이켰다. 반 정도밖에 마시지 않았지만, 그대로 탁자 위에 두고, 저번에 큰맘먹고 샀던 캐시미어 코트를 꺼낸다.
외로워, 역시 외로워.
경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현관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거리는 꽤 추웠다. 경수는 속에 받쳐입은 목폴라티에 코를 묻었다. 괜히 나왔나. 오늘따라 거리에는 구미가 당기는 음식점들도 없다. 맘만 먹으면야 혼자 가서 먹어도 되지만, 아...나 진짜 무슨 작정으로 나온거야.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문득 앞을 본다. 아까부터 제 앞에서 걷고 있는 늘씬한 남자가 있었다. 누가 보면 내가 저 사람 따라가는 줄 알겠네. 아파트 입구부터였나, 흠...
별 소득없는 생각이 이어진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목적지는 없지만, 혹시 몰라, 스토커 누명을 쓸 지. 혼자 있고 혼자 살다보니 헛망상만 늘었다.
바람이 차다. 경수는 고개를 자꾸만 숙였다. 발끝만 보고 걷는데, 갑자기,
쿵
뭔가에 부딛혔다. 가로등치곤, 좀 무른데..부드럽기도 하고...
설마
경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짙은 갈빛머리가 붉은 석양의 빛을 반사하며 영롱한 금빛을 내는, 눈동자가 지독히도 까만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
"죄...송합니다..."
"...."
"앞을 안보고 걸어서요...죄송합니다.."
쪽팔려 쪽팔려 쪽팔려!!!!
제 앞에 서있는 사내가 어서 '네, 괜찮아요.' 이딴 식의 말을 꺼내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연달아 사과의 말을 꺼냈음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영 대답이 없었다.
경수는 속이 탔다.
"저...죄송한데요.."
"혹시, 같이 밥 먹을 사람 필요해요?"
엥.
"...에?"
머릿속에 울리던 바보같은 효과음이 그대로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그 남자를 처다보았다. 뭐래, 이 새끼...
"아니, 그냥..저녁시간이잖아요. 할 일 없이 돌아다니는 거 아니었어요?"
".....에..."
"그럼 같이 밥이나 먹자구. 부딪힌거 미안하면 그거라도 해줘요."
".....에..."
나는 어느새 히터가 빵빵한 한 인도음식점 안에서, 여유롭게 메뉴판을 들어다보는 놈의 앞에서, 한결같이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뭐 먹을래요. 향신료 싫어하면 탄두리(=인도 닭요리)도 좋고, 아니면 이 집 머튼 레그(=카레소스를 곁들인 양 다리 요리)도 맛있어요."
"...아....예...."
"전 비프 카산다 커리요. 뭐 하실래요."
"....에......전...."
끝까지 에....만 지껄이는 나를 위해 그 놈은 단두리인지 단두대인지 비슷한 그 요리를 주문했다.
그리고 난 깨달았다.
저새끼는 미친놈이야. 미친....
"......"
".....음...."
"......."
"....저, 통성명이라도.."
"제가 왜 여기 와 있는 거죠..."
난 또 멍청하게 지껄였다. 말을 내뱉는 순간부터 병신새끼 아가리 닥쳐!!!!하고 스스로에게 소리지르고 싶었다.
"...음, 둘 다 외로워서요."
".....아."
그 말을 들으니 정신이 번뜩 났다.
그래, 난 외로웠고...내 앞에 있는 당신도, 외롭고.
근데 나는 내 외로움을 참한 여자랑 해결하려고 했지 당신같이, 나보다 키도 크고 새까만 남자랑 해결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
"이미 주문해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인도음식점 데려와서 미안해요. 내가 오늘 먹고 싶어서."
"아니, 아니..괜찮아요. 분위기..뭐...좋네요."
무슨 이게...소개팅 나온 남녀 대화도 아니고..
이윽고 음식이 나왔다. 하....졸라 맛있게 생기긴 했다. 그제서야 코트를 벗고, 포크를 집어들었다.
그렇게 음식만 존나 먹고 있는데,
"야, 김종인!"
"뭐야, 바빠서 안 나올줄 알았는데."
"잠깐 빠져나오는게 뭐가 힘들다고. 너 근데..."
뭐지, 난 닭고기 소스를 입가에 잔뜩 묻힌 줄도 모른채 급전개된 두 남자의 대화를 바라보았다. 요리사복을 입고 있는, 음...심지어 내 입가에 묻은 소스와 매우 유사한 것들이 묻어있는 주걱까지 들고있었다. 빼박 여기 요리사다. 그러면, 둘이 아는사이라는 건가..날 친구 혹은 형제 가게의 매상을 올려주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건가. 지능적이군.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있다가, 갑자기 또렷하게 들려오는 그 놈의 목소리에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아직."
그렇게 말하면서, 흘낏 나를 쳐다보면서, 눈꼬리를 살짝 접으며 미묘하게 웃는데,
뭐지.
나 왜 설레지.
미친.
복잡미묘한 기분을 잔뜩 안고 식사를 마쳤다. 물론 밥은 다 먹었다. 열심히, 꿋꿋하게. 김종인은 자연스럽게 카운터로 다가가 계산을 했다. 나는 걔가 화장실 다녀오는 줄 알았지. 뭐, 모르는 척 했었던 걸 수도 있고. 아무튼 예의상 '아, 제껀 제가 낼게요.' 라고 몇 번 말하긴 했다.
거리는 꽤 깜깜해져 있었다. 가로등의 노란 불빛은 거리에 드문드문하게 번진 것처럼 수채화같은 풍경을 그려내었다.
"...."
"....."
".....저기,"
"..네?"
"제 이름, 들으셨죠? 아니, 못들으셨을라나.."
"김종인."
"..아."
"맞죠?"
"네. 그쪽은..."
"도, 경수."
"도, 경수."
내가 했던 건처럼 성을 똑 떼어내고 발음하는 그 모습이, 또 뭔가 알수없이 간지러워서 나는 그냥 웃었다.
"도, 경수."
한 번 더, 되풀이되는 이름.
그 뒤로 따라붙는, 그의 따뜻한 웃음소리. 푸스스, 부서지는 웃음소리.
"김, 종인."
나도 괜히, 따라불러보았다. 그의 고개가 돌아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옆모습을 멀끔하게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어쩐지 낯부끄러웠다.
아, 아까 음식에 알콜이 들어갔다. 왜 이리 알딸딸하지....아니면 아까 마신 맥주가...
얼토당토않은 핑계를 댄다.
갑자기 나란히 걷던 그가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뭐 하는 건지 싶어 살펴보니, 내 앞으로 와서 걷기 시작한다.
"....."
"....."
"...왜 앞에서 걸어요."
"......"
"......"
"...바람 막아주려고."
"......?"
"아까도, 나란히 걷고 싶었는데..내가 비키면 바람 완전 세게 맞잖아요."
"....."
"...추우니까. 지금도. 코 빨개요."
그 말과 동시에, 뒤돌아선다. 나를 바라본다. 그의 손가락이 내 콧등을 꾹 눌렀다. 얼얼한 느낌이 퍼진다. 반면에 볼은 화끈한 기운이 넓게 번졌다.
아마, 그가 막아준 바람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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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여러분^^
작가가 너무 심심한 나머지....연재를 놓고 이상한걸 써재꼈어요^^
지금 쓰고있는ㄷ 센티넬물은 와우 너무 분위기랑 감정선이 무거워서 저도 쓸때 힘이 쪼큼 들어요 잉잉ㅇ
오늘도 한 편 썼는데...난 나처럼 무기력한 경수가 보고싶고..일반인 카디가 보고싶고......
그래서 나온 똥끌이에영!!!ㅇㅅㅇ 그냥 쉬어가는 차원에서 읽어주시길홓호홓
근데 저 바람막아주는 에피소드 작가 경험담일까요 아닐까요?ㅎㅅ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