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대학이었고 원하는 과였다. 그러나 사람들까지 원한 건 아니었다.
예술대라는 섬과 같은 곳. 괴짜들과 천재들이 뒤섞인 곳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괴짜도 못 되는 겁쟁이. 천재가 못 되는 노력파.
섬의 미아였다. 나는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수업에 들어갔다.
어울려서 술을 마시거나 팔짱을 끼는 일도 없었다. 미팅도 뭣도.
외로웠냐고?
나는 항상 혼자였어서 무엇이 외로움인지 몰랐다.
막연하게 춥다, 라고 느낀 적은 있었어도 누구와 함께이길 바란 적은 없었다.
그날도 그랬다.
도서관에서 혼자 과제로 받은 시집을 읽고 있었다.
점심시간이었고 사람은 얼마 없었다.
나는 노트를 펴 놓고 마음에 드는 시 구절을 따라 적었다.
큰 책상에 혼자 앉아 있었다. 창가라서 볕이 좋았다.
봄날이었다.
노트에 시 제목을 썼다. 고백.
그리고 내 글씨 위의 여백으로 긴 손가락이 보였다.
길게 늘어진 머리를 쓸어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얼굴이다.
같이 교양을 듣는 남자애였다. 항상 내 옆자리의 앉는 얼굴이라 기억이 났다.
그 애는 내 노트의 윗 부분을 두드리기만 하고 내 눈을 마주하지는 않았다.
나는 다시 시집으로 눈을 돌렸다. 속으로는 왜 이러나 당황스러웠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머리카락이 다시 흘러내렸다.
'그대에게 내 사랑을 고백함은'
이라고 노트에 썼다. 여전히 그 애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찬찬히 글씨를 썼지만 계속 손가락으로 눈이 갔다.
뭉툭한 손 끝. 긴 손가락. 짧은 손톱. 힘줄이 튀어나온 손등. 손목뼈.
내 눈길을 읽었는 지 네가 힘 빠지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무례하다고 생각 했다.
고개를 들자 네가 나를 보고 있었다.
"안녕."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너를 봤다.
"문창과지?"
너는 내가 들고 있던 시집을 빼앗아 들고 내가 읽던 페이지를 읽었다.
괜히 귀끝이 붉어졌다.
"남주혁이야. 연영."
내가 말이 없자 너는 쑥스럽다는 듯이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어제 수업 안 나왔잖아. 우리 과제, 같이 하게 됐어."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어?"
알고 있었다. 수업 때마다 내 쪽으로 펜을 떨어트리거나
내가 교재를 놓고 오면 말 없이 제 책을 밀어준다던가 하는 그 애의 눈은.
그 애는 잘 웃었고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사랑 받고 자란 사람의 몸에 벤 친절이라고 생각 했다.
내 물음에 네가 씩 웃었다.
"과제 하러 가자."
우리는 나란히 걸었다.
나는 너에게 손목이 잡힌 채 걸었고 너는 간간히 나를 보고 웃었다.
잡힌 손목을 틀며 이것 좀, 하면
"안 돼. 선배들이 조별 과제에서 도망가는 사람 많다고 그랬어."
이럴 뿐이었다.
이상했다. 말 한 번 제대로 섞어본 적 없었던 우리였다.
우리는 학교 후문 쪽의 카페로 갔다.
네 몫의 커피와 내 몫의 주스를 시켜놓고 앉아서 하는 건
과제가 아니라 시시콜콜한 대화였다.
주로 묻는 건 너였다.
"현역이야?"
"응."
"문창과 어때? 재밌어? 뭐 배우는데?"
"글 쓰는 거."
"시도 써? 아까 시집 읽던데."
"응."
"그럼 연애하면 남자친구한테 시도 써주고 그래?"
"연애 안 해봤는데."
네가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참을 수 없는 웃음으로 웃었다.
나는 핸드폰을 집어 시계를 봤다. 두 시 반이었다. 다음 수업까지는 삼십 분이 남았다.
"과제 한다며."
너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가방을 뒤지다가 맨손을 꺼내보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과제 같은 거 원래부터 없었다고 하면 나 뺨 맞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