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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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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비가 온 탓에 집 안의 공기는 습하고 눅눅했다. 온 몸을 감싸는 기분 나쁜 공기에 뜨여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떴다.
어제 무리해서 김태형의 몸을 받아낸 탓인지,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처럼 무거웠다.
눈을 뜨니 보이는 것은 언제나 처럼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었다.
..언제쯤 나는 이 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
멍하니 누워 천장만 바라보고 있으니, 똑똑 노크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대하고 싶지 않아 눈을 감아버렸다.
"자?"
"....."
아무 대꾸도 없이 누워있으니, 김태형이 다가왔다.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소름이 돋았다.
침대 머리맡에 앉은 김태형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기분이 좋은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지금 하는 일만 끝나면, 이제 어디 안가고 너랑 천년만년 같이 있을 수 있어."
"....."
"빨리 끝내고 올테니까, 집 잘 지키고 있어."
"....."
"어디 가지 말고."
"....."
"사랑해 여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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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이 없는 하루는 평화롭다, 조용하다. 김태형이 없는 낮시간 동안 나는 거실 바닥에 두 무릎을 웅크리고 앉아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오늘은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열고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손으로 받아 보았다.
무겁게 떨어지는 빗줄기가 내 손끝을 때리곤 밑으로, 더 밑으로 떨어졌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이젠 낯설지 않아 무서웠다. 벌써 한달째다. 내가 이 집에 갇히게 된 건.
오래전부터 나를 따라다니던 스토커는, 정확히 내 생일날 나를 납치했다. 처음 감금을 당한 날, 약에 취해 사태파악이 잘 되지 않았던 날 깨워준 것은,
예전부터 하나씩 없어졌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내 집안에 있던 많은 인형들과 장식품. 그리고 처음보는 내 사진들과
'하나씩 가져오다 보니까 너만 남았더라고. 그래서 데려왔어.'
..해맑게 웃는 김태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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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을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김태형이 없는 틈을 타서 수 없이 밖에 나가 보았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김태형은 귀신같이 나를 찾아내곤 했다.
김태형에겐 경찰도, 다른 그 무엇도 소용이 없었다.
멍하니 창밖만 내다보고 있으니, 다시금 탈출 욕구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아났다. 한번 더 이렇게 귀여운 짓 하면, 그땐 정말 묶어 놓을거야. 라고 말하던 김태형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지만, 이렇게 계속 갇혀 살 바에야 한번 더 탈출을 해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젠 잃을 것도 없었다.
긴장되는 마음을 애써 다스리곤 천천히 현관문 앞으로 걸어 갔다. 아침부터 먹은 것이 없어 텅 빈 속이 매쓰꺼웠다. 신발장엔 내 신발은 커녕 김태형의 신발조차 없었다. 김태형이 모조리 버려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하는 수 없이 맨발로 밖을 나섰다. 아무런 장치도 없이 스르르 열리는 문에, 미치도록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끝까지 긴장을 놓칠 수는 없었다. 지금쯤 김태형도 내가 집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서둘러야 한다. 자꾸 떨려오는 두 손을 한번 가볍게 맞잡은 뒤,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하아..하..."
여기가 어딜까. 아까부터 계속 뛰어다녀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하루종일 먹은 것이 없어 두 다리는 후들거렸고, 머리 속은 빙빙 돌았으며, 맨발로 돌아다닌 탓에 발바닥에서는 피까지 나는 듯 했다. 애써 추스리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 보았다. 여기가 어딘지는 몰라도, 외진 시골인 것은 틀림이 없었다. 주변에는 경찰서라곤 없었고, 그 흔한 슈퍼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점점 더 애가 타는 마음에 눈물이 차올랐다. 이제 정말 조금 있으면 김태형이 올 것이다. 그럼 모든게 끝이다. 제발, 조금만, 조금만 더... 마지막 힘을 내어서 발걸음에 힘을 실었다.
그렇게 또 한참을 뛰었을까. 눈 앞에 보이는 것은 파출소였다. ..아, 살았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기쁨으로 차오르는 눈물 떄문에 눈 앞이 뿌애졌다. 안도감에 터진 눈물은 쉽사리 멈춰지지 않았다. 두 손으로 거칠게 떨어지는 눈물을 닦으며 파출소의 문을 열었다.
"흐으...흑.."
"아-"
"....."
"찾았네요. 이렇게 제 발로 찾아 올 줄이야."
파출소의 문을 열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파출소 간의의자에 앉아 나를 쳐다보며 웃고 있는 사람은,
김태형이었다.
"니가 없어져서,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
"조금만 더 늦었어도 실종신고 할 뻔 했잖아.'
"....."
"다행이다 그래도."
"....."
"그럼 찾았으니까 이만 제가 데려가 보겠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아 예, 찾아서 다행이네요."
꾸벅- 경찰에게 인사를 건낸 김태형이 나에게 다가왔다. 팔이 다시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김태형이 한 발자국 다가 올 때마다, 내 발은 한 발자국 뒷걸음질을 쳤다. 왜 그래 여주야, 오빠랑 집에 가야지. 다정하게 말하는 김태형의 목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오, 오지마!!! 가까이 오지마!!!"
"..여주야."
"아,아저씨, 경찰아저씨, 저 좀 살려주세요, 네?"
"..네?"
극도의 두려움에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김태형을 피해 계속 뒷걸음질 치다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무조건 경찰에게 빌기 시작했다.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저기, 일단 진정하시고 일어나 보-"
"제가 할게요."
나를 부축해 일으키려는 경찰을 김태형이 막아섰다. 내 팔을 잡아 일으키는 손길이 거칠어서 아, 저절로 한숨 섞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죄송해요. 보다시피 제 동생이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
김태형은 그 말을 하며 흘끗 내 발을 쳐다보있다. 신발을 신지 않아 피범벅이 된 발이었다. 경찰의 눈도 내 발을 스치더니, 알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애가 정신이 없어서, 신발도 안 신고 이렇게.."
"....."
"요양차 여기까지 온건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네요. 빨리 들어가 봐야겠어요."
"..아니, 아, 아니야-"
"네, 들어가보세요."
경찰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고개를 돌렸다. 말도 안돼. 이럴 순 없어. 절망감에 몸이 축 늘어진 나를 안아올리며 김태형이 말했다.
"가자,"
"..흐으.."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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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내가"
짜악-
"어디 가지말고, 집 잘 지키고 있으랬지."
"...흐으.."
"어차피 안 될거 알면서, 또 이렇게 도망을 가?"
"아악!!"
씩씩대며 내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 올린 김태형이, 한 손으로 내 턱을 붙잡아 억지로 나와 눈을 맞췄다.
광기에 젖어 반쯤 돌아버린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춰보였다. 무섭도록 투명한 눈동자였다.
"하.."
"...흐.."
"너 씨발 내가, 한번 더 이런 짓 하면 어떻게 한다고 했어.'
"흐윽...흐.."
"..너 사실 내가 이러기를 바라고 있었구나? 아, 그런거였어."
"..흐으..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
"원하는 대로, 해줄게."
쿵- 나를 침대 끝으로 내던져버린 김태형이 몸을 돌려 거실로 나갔다. 아까부터 계속 구타당한 몸이 쉴새없이 떨려왔다. 부스럭 부스럭, 밖에서 무엇을 찾는지 분주하게 움직이던 김태형은 곧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양 손에 무언갈 가득 든 채로, 노끈과 자물쇠였다.
"..시..싫어, 하지마!!!"
"나도 이렇게까지 하기 싫었어."
거칠게 저항하는 내 몸짓에도 김태형은 아랑곳 하지 않고 내 손목에 노끈을 둘러맸다. 그리고 그 노끈을 침대에 연결했다. 풀어줘, 풀어달라고-!! 엉엉 우는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김태형이 나를 안아왔다. 두 손목이 묶인 채 그런 김태형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밀어내는 나를, 가만히 안고만 있었다.
"왜 그랬어?"
"..이거,놔, 흐으.. 빨리 풀어달란 말야!! ..흐윽.."
"..왜 그랬어 여주야. 내가 얼마나..얼마나..놀랐는데.. 왜 자꾸 나를 밀어내는 거야."
"몰라서 물어? 니가 싫어. 미치게 싫으니까, 이제 나 좀 풀어달라고. 제발, 응? 김태형 제발..."
"..아니. 그렇겐 못 해. 그럼 내가 죽어."
"..흐으.."
"미안해."
"....."
"그러니까 죽어도, 내 옆에서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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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잔 건지 모르겠다. 김태형의 품 안에서 계속 울며 몸부림 치던 나는, 결국 김태형의 품 안에서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힘겹게 고개를 돌리니 볼 쪽에서 차가운 느낌이 감돌았다. 뭐지? 손을 올려 만져보니 얼음주머니였다. 피식- 실소가 흘러나왔다.
병 주고 약 주는 꼴이라니. 어느새 묶여있던 두 손도 풀려 있었고, 노끈 때문에 잔뜩 상처가 나있던 내 손목도 노끈 대신 붕대가 감겨 있었다.
살짝 몸을 일으켜 이불을 걷어내니 피범벅이었던 두 발 또한 말끔하게 치료가 되어 있었다. 아이러니한 이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저벅 저벅
문 밖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김태형일 것이다. 얼른 다시 누워 아직 깨어나지 않은 척을 했다.
눈을 감고 있으면서,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말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김태형이 탁자에 무언가를 올려 두곤 나에게 다가왔다. 탁자 쪽에서 들려지는 소리가 접시소리인 것으로 보아 죽인 것 같았다.
"자네.."
"....."
"잘 때가 제일 예쁘다."
"....."
"..많이 아팠지.."
떨리는 목소리로 내 볼을 쓰다듬어 오는 김태형의 손 끝 또한 옅게 떨림을 머금고 있었다. 미안해. 한참 중얼거리던 김태형은 이번엔 내 손목을 쓰다듬었다. 갓 태어난 애기를 만지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 다음 뱉어지는 말들이, 내 마음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김여주"
"....."
"미안해.. 미안해 여주야.. 진짜 미안.."
"....."
"나 용서하지마.. 평생 증오해도 좋고, 경멸해도 좋아."
"....."
"..그냥 나, 내 곁에서 떠나지만 말아줘. 응? 난 너 없으면 내 스스로가 제어가 안돼.."
"....."
"다 좋으니까, 오늘처럼 사라지지만 마.."
"....."
"사랑해"
말을 마친 김태형은 그대로 내 손목을 잡은 채, 내 옆에 엎드려 누웠다.
곧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것이, 잠에 든 것 같았다. 간신히 진정되었던 머리가 다시 아파왔다.
정말 난,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젠 나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