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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아침밥까지 걸러가며 읽은 책은 초등학교 저학년이 써놓은 일기 같았다. 글보다 빈칸이 더 많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겪은 복잡한 이해관계, 자잘한 사건들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었다. 그녀가 겪은 커다란 사건만 짤막하게 써있었다.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했다.
오래전부터 천적이었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정략적 동맹을 맺었다. 두 나라는 동맹의 증표가 필요했고, 프랑스 황태자와 오스트리아 공주의 결혼이 그 예였다. 어린 나이
에 타국의 황태자비가 된 그녀는 답답한 궁에서의 삶에 적응하지 못했다. 황태자의 무관심과 귀족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견디지 못 한 그녀는 도박에 빠지고 사치를 부렸다.
(사치를 부린건 사실이지만 그 예산은 프랑스 왕실 재정에서 전부 충당됨. 오히려 역대 왕족에 비해 검소한 삶을 살았음) 결혼 생활 7년 만에 아이를 낳고 과거를 청산한 그녀
는 쁘띠 트리아농에서 소소한 삶을 살았다. 그 곳에서 몇몇의 애인과 은밀한 만남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던 도중 프랑스 혁명이 터지고 그녀의 삶은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종국에는 오스트리아와 공모하여 반혁명을 시도했다는 죄명으로 처형당했다.
"은밀한 삶이라는게 이런거였구나."
나는 손에 든 책을 힘없이 바닥에 떨어뜨렸다. 무관심한 남편, 자신을 감시하는 귀족들의 시선에 괴로웠던 그녀는 자신을 위로해줄 남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남자가 아까 책에서 본 백작일테고. 이름이.. 구준회였나? 소파에 몸을 뉘고 책에서 읽은 내용을 곱씹었다. 그녀의 삶은 화려하지만 아름답지 않았다. 내가 이 책의 주인공이므로 그녀의 삶을 따라야 한다는게 끔찍하게 느껴졌다. 할 수만 있다면 도서관에서 읽은 구절처럼 그녀의 삶을 바꾸고 싶다.
"공주님."
"응."
문을 열고 들어 온 메이드가 소근소근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여왕님이 서재에서 공주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메이드가 말한 여왕님이란 단어에 몸을 굳혔다. 여왕님이라면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일 것이다. 그녀가 이상한 점을 알아채고 나를 의심하면 어쩌지? 나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평범하디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공주님으로서 알아야 할 궁중 예절같은건 하나도 모른다. 더군다나 조선도 아니고, 오스트리아의 예절을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불안함에 식은땀이 흘렀다.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나를 의아한 눈초리로 쳐다보던 메이드가 몸을 돌려 방을 벗어났다.
"가.. 같이 가."
궁의 지리도 모르는 내가 메이드까지 놓치면 길을 잃어버릴게 뻔했다.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메이드를 따라갔다. 자꾸만 멀어지는 메이드 때문에 속이 탔지만 뛸 수는 없었다. 긴 치맛자락에 발이 걸려 넘어질 것 같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배와 가슴을 압박하는 코르셋 때문에 뛰고 싶어도 뛸 수 없었다.
*
겨우 도착한 서재는 특유의 오래된 책 냄새가 났다. 서재까지 안내해준 메이드는 문 앞에서 인사를 하고 가버렸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여왕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책상에서 분주히 글을 쓰고 있었다. 내가 온 걸 모르나?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그녀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동맹은 혼인으로 공고히 다질지니 짐의 막내딸 ㅇㅁㅁ는 프랑스의 국모가 될지어다."
그녀가 아까 쓴 글을 펼쳐 읽었다. 나는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웬 청천벽력 같은 소리야. 물론, 언젠가 프랑스에 갈거란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갈 줄은 몰랐다. 아직 이 곳 생활도 적응하지 못했는데 프랑스에 가라니? 내가 당황한게 다 보였는지 그녀가 젖은 눈으로 나를 꽉 안았다.
"저.. 오늘 바로 가는거예요?"
"일주일 후에 간단다. 그때까지 마음의 준비를 해두렴."
얼떨떨한 정신을 겨우 부여잡고 물었다. 말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던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눈이 흐릿하고 코가 시큰거렸다. 이 곳에 온지 몇 시간도 안됐는데 그새 정이라도 들었는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손에 잡힌 그녀의 옷자락을 쥐고는 울음을 삼켰다. 괜히 서럽게, 그녀의 품은 진짜 내 엄마의 품처럼 따뜻하고 포근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좌우로 계속 흔들려서 멀미를 할거란 내 예상과는 달리 마차는 꽤 편안했다. 왕실 마차 아니랄까봐 마차도 내가 일주일간 지냈던 궁처럼 화려했다. 고개를 돌려 창문 너머 풍경을 구경했다. 건물이 서서히 사라지고 숲이 들어섰다. 나무와 풀, 꽃, 호수. 그 외에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같은 풍경만 이어붙인 것 같아서 점점 흥미가 떨어졌다. 다시 고개를 돌려 의자에 몸을 뉘었다.
"공주님, 이거 좀 드셔보세요."
함께 마차를 탄 수행원이 내게 초콜릿을 건넸다. 초콜릿을 먹으면 멀미를 할 것 같아서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프랑스 황실은 여기와 다르단다. 다들 너만 주목할게야. 김동혁 대사의 말씀을 새겨듣거라.'
눈을 감으니 떠나기 전 여왕이 내게 해준 충고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다들 나만 주목한다, 나만. 그 생각까지 미치자 한숨이 나왔다. 프랑스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잘 알고 있다. 너무 잘 알아서 탈이다. 나는 프랑스에 가서 무관심한 남편에게 치이고, 기 쎈 귀족들에게 치여서 넝마가 될거다. 지긋지긋한 나날이겠지. 마음이 불편해서 몸도 불편해졌는지 앉아있는 자리가 가시방석 같다. 좀 더 편하게 앉기 위해 몸을 뒤척이는데 뭔가가 몸에 부딪혔다. 부딪힌 물건이 있는 쪽으로 손을 뻗어 잡았다. 그 물건은 나와 결혼을 할 황태자의 초상화가 담긴 거울이었다.
...어차피 나한테 관심도 안 줄 거란걸 알기 때문에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었는데.. 황태자.. 잘생겼다. 연예인 하면 덕후몰이 제대로 할 상이다.
"마음에 드세요?"
넋을 놓고 초상화를 보는 내 모습이 웃겼는지 수행원 두 명이 깔깔대며 웃었다. 나는 빠른 속도로 뚜껑을 닫고 눈을 감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열을 식히기 위해 손부채를 해도 얼굴의 열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암호닉♡ |
동구의 집게 뽀로로 파랑짹짹이 |
사담(click) |
진환이를 이번 화에 꼭 등장시키고싶었는데ㅠㅠㅠ 더 이상 쓸 시간이 없어서 급한대로 올립니다! 다음 화에는 진환이 꼭 넣을게요.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