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에게 한송이의 프리지아. 만지면 너의 그 순수함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울까봐, 손 댈수도 없고 그저 바라만 본 너는 나의 프리지아. 어느 날, 프리지아 옆에 피어난
물망초. 햇빛을 머금고 피어난 물망초는 프리지아 곁에서 온전하게 제 모습을 드러냈고, 프리지아는 제 밑으로 한 떨기의 잎을 떨어트렸다. 물망초에 떨어진 물방울이
곧 그 잎을 타고내려가 프리지아에게 떨어지나니 곧 그 물방울을 머금은 프리지아는 안개꽃이 되었다고 나는 믿었으나 그게 아니었다.
프리지아는 어느새 아이리스로 피어 있으려니, 수줍은 웃음 한번 톡하고 떨어트리니 그것은 곧 희망이 되었다. 널 만날 수 있다는 희망.
[인피니트/현성] 달팽이의 달((After that, you go find a long journey)
"어디 가시는겁니까."
"재밌는 곳."
여인이 우현을 끌고 온 곳은 이 동네에서 제법 큰 집이었다. 아버지는 이 곳에 일본인이 산다고 하셨다.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우현이 이사 오기 전 먼저 이사를 와
길거리에서 동네사람들이 던지는 돌과 음식을 모두 다 맞아낸 그, 한국이름 김길남. 일본이름 사토 히츠마치. 우현은 여인의 손아귀에 어쩔 수 없이 그의 집 앞까지 끌려온
것이다. 우현이 들어가지 않으려고 버티자 여인은 우현을 그 옆 주막집으로 억지로 데려왔다. 주모! 여기 너비아니 구이 하나! 여인은 익숙하게 주모에게 주문을 하는 것으로
보아 이 근방 사람들과 친분이 있는 것 같았다.
"먹어ㅡ"
"안 먹습니다."
"너 안 죽여, 선생님이 널 좀 보고싶다고 해서 데려온 것 뿐이야."
"한국말은 아와 어가 다르죠, 데려오신게 아니라 끌고 오신거죠. 억지로."
"아무튼, 먹어. 밤이 늦으면 상황이 이상해지니까."
여인은 어느새 우현의 앞에 있는 너비아니 구이에 간장을 찍어 우현의 입에 우겨 넣었다. 우현의 입에 너비아니 구이가 두어개쯤 들어갔을 때, 여인은 계산을 하고 우현을
다시 그 집 앞으로 데려갔다. 아까 얻어먹은 것도 있으니 너도 이제 뭐라고 부인할 수는 없겠지? 들어가자. 여인의 말에 우현이 하는 수 없이 여인을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전형적인 서양식 집이었다. 화려한 서양식 전등, 서양식 협탁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쇼파(쇼우파)에는 익히 듣기만 한 중년의 남성이 앉아 있었다.
"어서 오게, 일단 앉아서 이야기 하지."
"..안녕하세요, 전 새로 이사온 남우현이라고 합니다."
"역시 남선생님의 아드님이셔서 그런지 예의가 아주 바르군."
"왜 부르셨습니까."
"…여기 아이들을 위해 한글 읽는 법, 가창 하는 법을 가르쳐줬으면 하네."
"그건 아버지께 부탁 하셔도.."
그가 우현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아버지께서도 잘 아시는 문제일세. 알다시피 여기 아이들은 강과 함께, 자연과 함께 노는 것 밖에 모르는 천진난만한 까막눈이라서
아직까지도 글을 깨우치지 못한 아이들이 많다네. 믿지 못하겠지만 사실일세. 그러니 당장 내일이 아니더라도 여기 아이들을 위해 수고 좀 해주었으면 한다네.
그의 눈빛은 여느 일본 조무래기들과는 달랐다. 선하고 힘 있는 눈빛이었다. 그의 눈빛에 믿음을 가진 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현의 수긍에 그의 입가에 미소가 띄워졌다.
그럼, 쿠우키와 수정과라도 먹고 가지 않을텐가? 그의 물음에 우현이 옆에 세워진 뻐꾸기 시계를 쳐다보았다. 8시, 살짝 불안한 시간이었지만 우선은 알았다고 하니
곧 그의 부인이 잣을 얹은 수정과와 쿠우키를 가져온다.
"그런데 능력 있는 가정이 어떻게 이 섬마을까지 내려오게 되었나?"
"..어머니께 들은 바로는 아버지가 고위 공무원이 준 돈을 받지 않고 버티셔서 좌천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만약에..그 고위 공무원이 일본인이라면 어떻게 할텐가..?"
수정과를 내려놓는 그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본 우현이 하려던 말을 삼키고 다른 말을 꺼냈다. 일본인들은 싫지만, 왠지 당신은 믿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우현이 곧 쿠우키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우현이 그와 그의 부인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집을 나왔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성규네 집 창문에서
환한 빛이 새어나온다. 문득 성규는 뭘하나 궁금해진 우현이 작은 돌을 주워 성규네 집 창문으로 던졌다. 한 두어번 던지려는 찰나, 성규가 창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민다.
"밤 늦게 어디 다녀와..?"
"그냥..동네 좀 구경하고 왔어."
"그렇구나.."
"동생은 괜찮아?"
"응, 아까 전보다는 확실히 괜찮아졌어."
성규에게 아까 그의 집에서 챙긴 쿠우키를 건네니 성규는 곧 그것을 제 동생들에게 줘버린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우현이 이번엔 동생들 몰래 성규의 입에 쿠우키를 넣어준다
동생들 그만 챙기고 너나 좀 먹어. 우현의 말에 성규가 멋쩍은듯 웃는다. 곧 통금시간이 다가온다고 일러준 성규에 우현이 제 집으로 들어간다. 오물오물, 쿠우키를 먹던
성규의 눈에 앞집 지붕에 걸려있는 환한 달이 보인다. 저 달이 꼭 큰형을 닮은 것 같았다. 몇년 째 소식도 없더니 결국 달로 환생한건가 싶다.
"우현아, 아버지가 부르신단다."
어머니의 말에 제 방에서 나온 우현이 쇼파에 앉아 계신 아버지 옆에 앉는다. 오늘부터 저 학교 아이들에게 가창과 국어를 가르쳐주었으면 싶다. 운동은 네 형이 가르쳐 줄 것
이니 넌 가창과 국어를 가르쳐 주어라. 아버지의 말에 우현이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읽고 있던 신문을 접은 우현의 아버지가 일어나려던 우현을 잡는다.
정말..여기로 내려온거…아버지가 서울에서 짐을 쌀때부터 하신 말씀이었다. 섬마을로 내려온거 후회는 안하냐고. 하지만 우현은 절대 후회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현은 아버지의 투박한 손을 잡고 말했다. 절대 아버지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고.
"오빠!"
"이른 아침부터 밖에 나와서 뭐해."
"둘째오빠 기다리고 있어. 아침에 서울 올라간다고 올라갔거든."
"서울? 서울은 왜?"
"아빠랑 엄마 만나러! 오늘 내려오시거든."
새연의 말에 우현은 슬며시 성규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일본 순사들한테 독립군이라고 잡히면 큰일인데..쓸데 없는 걱정이었다.우현은 새연의 손을 잡고 보통학교로 내려왔다
우현보다 한 두살 어린 학생들은 우현이 들어오자 마치 교련선생이라도 들어온 듯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살풋 웃음이 난 우현이 학생들을 풀어주었다.
난 교련선생이 아니라..앞으로 너희를 가르쳐줄..선생님…이야. 아이들을 쓱 훑어본 우현이 빈 자리를 가르켰다. 저기 빈자리는 누구니? 우현이 묻자 우현 앞에 앉은 까까머리
학생이 대답을 한다. 저기는..거지골에 사는 안디 얼마 전부터 한번도 안 나옵니도. 까까머리 소년이 말을 하면서 코를 막는다. 저 아 냄시도 심하고..우현이 소년의 말을
끊고 칠판에 제 이름을 쓴다.
"난..남우현이라고 해, 선생님 할정도의 나이는 아닌데..어쩌다 보니 너희를 가르치게 됐네."
"그럼 선생님은 몇살이신디요?"
"선생님은..17살이야. 여기에 분명히 동갑 나이도 있겠지? 그러니까 편하게 대해줬으면 한다."
첫날 수업은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우현도 부러 딱딱하게 수업을 하고싶지는 않았고 아이들도 그다지 책을 읽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였다.수업을 끝내고 우현은 집으로 가려던
까까머리 소년을 불러세웠다. 오늘 결석한 학생 집이 어디라고? 우현이 묻자 소년의 표정을 찡그리다 다시 바꿨다. 가보시려구요? 소년의 물음에 우현은 응, 이라고 답했다.
소년은 어쩔 수 없이 우현을 거지골로 데려다주었다. 조심하세요. 제가 가면 거지들이 달려들테니. 소년이 사뭇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거지골을 나간다.
우현은 학교장이 적어준 주소를 들고 연석의 집을 찾아간다. 허름한 초가집, 갈비뼈가 다 보이는 개, 갈아준지 한참이 지난 것 같은 파리가 꼬이는 개밥. 그 밥을 누군가
먹고있다.
"누구세요..?"
"..네가 연석이니..?"
"..새로 오신 선생님이네요.."
"가창시간에 창문으로 훔쳐보던 아이..너 맞지..?"
우현의 물음에 소년의 먹던 개밥그릇을 내려놓는다. 우현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소년의 입에 묻은 음식물 찌꺼기를 닦아준다. 소년은 세수를 닦지 못한 듯 때구정물로
보기에 무척이나 더러워 보였고 소년의 얼굴을 기어다니는 날파리를 소년은 쫒지 못했다. 쫒을 힘도 없는 것이다. 우현은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아파서
앓아 누워있는 소년의 어머니와 그 옆에서 제 목숨을 부지하려는 듯 나오지않는 엄마의 젖을 빠는 소년의 어린 동생이 있었다. 소년의 방은 쌓여있는 헌 이불, 그게 다였다.
"어머니는.."
"…돌아가실거에요."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왜.."
"돌아가실거에요..병원 갈 돈이 없어서 병원에서 치료도 못 받고 거지골에서 제일 가난한 이 집에서 돌아가실거에요..치료? 치료도 못 받아요..냄새 나서 의사들이 옷을
벗기다 헛구역질이 나와 결국 내쫒아버려요."
"선생님이 도와줄게."
안되요..이미 의사들도 손을 못 쓰는 상황인데 선생님이 어떻게 도와주세요? 소년의 말에 우현은 답하지 못했다. 소년은 제 엄마의 손을 움켜쥐었다. 제 손을 잡는 누군가에
소년의 엄마는 제 손가락을 움직이다 결국 소년의 손을 놓아버렸다. 봤죠? 결국 제 손을 잡지 못하시고 놓아버리시는거..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우현은 그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고 방관할 수 밖에 없었다. 우현은 그제서야 알았다. 소년의 엄마가 결국 자식 둘을 남겨두고 살기를 포기했다는 것을. 소년은 무엇때문인지는 몰라도 엄마를
묻지 못하고 제 집에 두고 있는 이유를 왠지 알 것 같았다.
"그럼 우리..연석이 형네 집 갈까..?"
"여기 나가면..사람들이 놀려요. 냄새 난다고, 거지라고.."
"연석이만 그렇게 생각하는거야, 나가면 아무도 안 놀려. 여기 나가면 미꾸라지로 만든 탕도 먹을 수 있고, 튀긴 떡도 먹을 수 있고, 너비아니 구이도 먹을 수 있어!"
"…정 그렇다면..우리 연지만 데리고 나가세요..전 엄마 두고 여기 못 나가요.."
우현은 순간 콧등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우현은 여전히 제 엄마의 젖을 쪽쪽 빨고 있는-갈그락 갈그락거리는 소리가 여기서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현은 연석의 동생을 안았다. 못 먹어서인지, 얻어먹지 못해서 인지 아이의 등에서 마른 척추뼈가 느껴진다. 우현은 연석의 손을 잡았지만 연석이 그 손을 놓고 말았다.
연석은 제 어머니 옆에 앉아 동생 연지에게 손을 흔들어준다. 왠지 그 모습이 측은하다.
"선생님 거기서 나오신거에요?"
"걱정 되서 와봤더니 결국.."
"가자, 선생님이 맛있는 빵 사줄게!"
"근데..얘는 누구에요?"
연석이 동생, 연지. 우현이 아이의 이름을 말하자 두 소년은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한다. 못 봤어? 우현이 묻자 진호가 답한다. 그 새끼가 한번도 데리고 나오지 않아서..
진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얼버무린다. 우현은 연지를 고쳐안고 두 아이의 손을 힘차게 잡았다. 선생님 우리 저기 가요! 진호의 웃음이 오늘따라 더 말갛다.
거지골, 그 거지골에서 우현을 따라 나온 연석이 우현에게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작게 말한다. 선생님도..똑같아요..우현에게는 절대 들리지 않을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