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부터 쭉-생각했었다.
내 호원이가 모자란 게 뭐가 있어!
부모님이 안 계시긴 하지만 사람 곧고, 잘생겼고, 키도 크고, 춤도 잘 추고, 손도 크고, 자상하고, 예쁘고, 멋있고, 돈도 잘 벌고,
무엇보다 끝내주게 섹시하다.
그러니까. 귀여운 여자, 예쁜 여자 착한 여자, 섹시한 여자, 아니 하다못해 남자라도 끊일 날이 없었겠지, 하고 생각했었다는 거다.
그래, 예상이 딱 들어맞은 건 좋아, 그래 좋다고, 근데 이건 좀 아니지 않아?
"인사해, 초면이잖아"
"안녕-히힛"
호원이가 지금 '나가'라는, 밥 먹듯이 듣는 말을 드디어 말로 하기가 식상하다는 걸 깨닫고 행동으로 하는 걸까, 생각했다.
그래, 바디랭귀지가 만국의 공용어긴 하지.
뭘 설명하든 비언어적 표현이 없으면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처럼. 그래 나도 알고 있어.
"이쪽은,,,,음....아까 대충 설명했지?"
"응, 당분간 여기 산다면서-"
그래 지금 확실히 알아들었어, 내가 나가야하는걸까,
음, 그렇다고 아주 나가겠다는 얘기는 아니고, 잠깐만, 한...다섯 시간쯤?
어디라도 가 있을 데가 있지 않을까…….
.....응?....어?....내가 나가야겠냐고…….
"응, 그리고 이쪽은 내 여자친구, 예쁘지?"
그렇든 아니든 이건 아니지 않냐고 이 개새끼야!!!
하고 마음속으로만 외쳤다.
물론 나는 웃으며 여자친구라는 여고생과 악수를 나누고 있을 뿐…….
더 어처구니가 없는 건, 여자친구라고 소개시켜준 애가, 민지다.
류민지, 다 기억하시는가? 니가 싫다면서요― 어?
근데 진짜 예쁘게 자라긴 했네…….
한예슬을 후려칠만한 이목구비에 이효리에 버금갈만한 몸매, 피부도 치킨무마냥 하얀 게, 나 같아도 사귀고 싶겠다.
그래, 이호원 너도 어쨌든 외모에 약한 남자였던 거야…….
어쨌든 그래서 나는 얼른 널려있던 도톰한 가디건을 하나 집어 들어 입고,
이따 가면 연락하라고, 잊어버린 척 하지 말고 이사 가지 말고 연락하라고,
뭐 그런 비슷한말을 하려고 했는데,
"어디가? 가는 길에 그거사와, 너 잘하는 거..음...그거...비빔국수, 그거 해줘"
"니가 언제부터 내가 해주는 거 먹었다고..."
"나갈래?"
"사올게요"
이호원, 저 어린것도 남자라고 옆에 여자하나 있으니까 태도를 싹 바꿔먹네,
오늘아침에도 나는 투명인간마냥 싹, 무시하고 나가놓고서는,
근데 도대체 나를 뭐라고 소개했을까?
아는 형? 근데 내가 형인거 모르는 거 같은데…….
아는 동생? 물론 내가 실제로 동생이고 지금도 키는 훨씬 더 작지만, 동생이라고는 안 할 테고..
그냥 좀 아는 사람? 근데 난 쟤를 알아도 쟤는 날 모르잖아..
그냥 나랑 좀 같이 사는 사람? 쟤는 날 같이 사는 걸로 생각을 안 하는데 뭐,
음.......어........그렇구나.
뭐라 말할 수가 없구나, 그냥,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며칠 전까지 여기저기 온갖 일에 손대면서 들떠있었던 기분이 왠지 다시 가라앉아 우울해진다.
이건 뭐 조울증도 아니고, 그런 거 다 알고 있었으면서.
내가 원해서 이 상황에 던져진 것도 아니고…….
한숨을 푹-쉬고 마트로 향했다.
난 어쩌다가 저런 어둡고 까칠한 애한테 빠져가지고…….
아니, 이십대 중반의 호원이는 전혀 안 그렇지만.
사실 쟤 뭐 동명이인이고 그런 거 아니야?
그러고 보면 혼자 사는 학생이 돈도 어디서 나서 그렇게 많고…….
"아, 저기요, 길 한복판에 그러고 서있으면 사람이 어디로 지나가, 어?"
"아,네,죄송.....어?!"
생각에 빠져 길 한복판에 넋 놓고 서 있는 게 되게 거슬렸는지 누가 내 어깨를 치며 톡 쏜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돌아보니, 왠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
".........?"
"남,남,남우현?"
사이즈만 커졌을 뿐, 여전히 귀엽고 순한 외모에 안타깝게도 나만한 키.
아니, 다 치우고 목소리만 들어봐도 남우현같다. 그 부자꼬맹이.
내가 손가락으로 삿대질까지 해가며 이름을 말했는데도 놀라긴 커녕,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던 모습에서 다시 흥미 없는 듯, 내말에 대답도 않고 뒤돌아간다.
아니, 뭔가, 어, 잠깐만,
원래 알던 사이도 아니고, 잠깐, 다해봐야 몇 주도 안 되는 사이지만
내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과거 사람 중 하나라, 일단 잡아 세우려고 했는데 뭐가 발에 밟혔다.
"이건 또 뭐야,"
판판한, 앨범 같은걸 집어 들어서 보니 맨 앞 커버에 남우현 비스무리한 남자애하나가 있다.
까만 영창피아노에 앉아 부드럽게 웃고 있는 우현이.
아니, 중요한건 내가 플라스틱앨범의 앞뒤를 뜯어보는 동안 우현이는 이미 사라진 후.
아 진짜 장동우 이 쪼다야…….
이거 싸인까지 돼있는데...아까 나랑 부딪히면서 떨어뜨린 건가.
이걸 보고 있을게 아니라 잡았어야했어…….이것도 돌려줘야 할 것 같은데,
근데 낙서하듯이 찍찍 그려놓은 게.. 싸인 한번 제대로 귀엽네.
/
꼼꼼히 살펴 국수재료를 사 집에 돌아오니 호원이와 여자친구는 둘이 붙어 깨를 볶고 있다 아주.
그래 뭐 내가 힘이 있나...현관문을 잠그고 봉투를 부엌으로 질질 끌고 들어가 국수를 삶기 시작했다.
아니, 학생이라는 게 일요일오후에 여자친구 집으로 불러다가 부비부나하고, 그래도 되나?
니가 무슨 양아치도 아니고, 어?
"어, 이거 그거 아니야? 그, 남우현……."
"버려"
"버리긴 뭘 버려! 들을 거야!"
앨범을 발견한 민지가 요리조리 보고 있으니 호원이가 정색을 하고 뺐어든다.
이게 진짜 그 남우현 앨범이 맞구나...걔는 진짜 그 남우현이고,
근데 버리긴 뭘 버려, 아직까지도 사이가 안 좋냐, 애도 아니고-
앨범을 뺐어들며 들을 거라 그랬더니 호원이와 민지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본다.
아니....싸인 앨범 주워서 그거한번 들어본다는 게 그렇게 잘못된 거니…….
"그건 어디서 났어"
"어? 주웠는데? 싸인까지 있던데....근데 그럼 이거 진짜 그 우현이야? 남우현? 얘가 음반을 냈다고?"
"냄비 넘친다"
"으어,엄마야!"
/
"그걸 진짜 듣고 있냐"
"노래 좋네"
"우리 집 스테레오가 좋은 거지, 꺼. 시끄러워"
내가 엎드려서 우현이의 피아노연주를 듣던, 너바나를 듣던, 백두산을 듣던, 니가 무슨 상관이야.
정신만 놓으면 너랑 그 민진가 뭐시긴가하는 여자애가 꽁냥거리는게 눈에 아른거리는데 다른 거 뭐라도 해야지 어떡하라고 그럼.
괜히 오디오 볼륨을 더 크게 놓이고 하던 팔찌만들기에 집중했다.
노래도 달달하고 좋구만, 괜히 그래. 자켓사진도 완전 꽃미남이더만, 응?
....예상했던 거라 뭐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솔직히 말해서 여자친구 있는 이호원은 밉다.
그리고 그 여자친구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아 보이는 이호원은 더 더 밉다.
뭐 진짜 좋아한 건 내가 처음이라더니, 다 구라였어. 다 거짓말.
딱, 니가 하는 거보면 보인단말이야.
저게 진짜로 좋아했던 게 아니면, 나는 좋아하는 거냐고.
당장이라도 일어나 눈을 똑바로 보고 따지고 싶은데, 할 수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지금 호원이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니까.
그런 주제에 내가 너 여자친구랑 뽀뽀하라고 여기 처박혀 니 팔찌 좀 만들겠다는데 왜 그렇게 서서 쳐다보고 있는데,
음.......그래도 뽀뽀는 안 되겠다.
"이건, 뭔데"
"너 줄게, 자."
"무슨, 준다는 사람 표정이 그래."
팔찌를 건네는 내 표정이 구렸는지 받으면서 그런다.
지금 내 마음이 이런데 어쩌라고.
너 짜증나서 주기 싫지만, 너 줄려고 만든 거 너 줘야지, 내가하냐.
사실 벌써 내 것도 만들었고…….
"호원아 뭐해- 뭐야? 우와, 예쁘다, 이건 니꺼야?"
"어, 그렇다네"
"와-이건 나할래, 쨘!"
그거 내껀데.....일부러 위안삼기라도 하자고 색깔 적당히 섞어서 나름 티 안나고 비슷해보이게 만든 건데…….
내가 지금 만드는 거 완성해서 줄까, 하려고 올려다보니, 벌써 자기 팔에 끼고 호원이거에 맞춰보며 웃고 있다.
"좀 큰 것 같지, 근데 예쁘다! 음......이거, 줘도 돼....?"
"......응, 너 해."
근데 왜 처음부터 꾸준히 반말인데…….
하지만 팔찌를 신기한 듯 보고 있는 호원이가 보여, 그냥 줘버렸다.
에휴....난 안 되려나 보다, 그치?
만들고 있던 여덟 줄짜리도 마무리 지어서 주니 이때에는 아직 유행하지 않았던 팔찌가 신기한지 매듭을 살펴보며 웃는다.
그래, 예쁘기도 하고 착하기도하고, 오래봤으니까 잘 알거고, 니가 호원이 여자친구라면야....
이건 무슨, 시어머니 마인드도 아니고, 참.
그런데, 참 좋아하는 민지와 다르게, 호원이는 어느새 표정을 굳히고 팔찌를 보고 있다.
한숨을 작게 한번 쉬더니, 왼쪽 손목에 끼는 호원이.
음....마음에 안 들었나...?
그래도 내가 그거 색깔까지 생각해서 만든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마음에 들어? 이거 받았으니까 , 방해하지 말고 나가자, 나가서 과일먹자, 응?"
"응!―"
머리를 쓰다듬고, 손을 잡아끌면서 말하는 게, 표정이, 웃음이, 꼭 나한테 하던 것과 같아서 마음이, 딱 멈추는 것 같다.
어휴 이런 거에 뭘.
별거 아닌데, 별거 아닌데…….
손을 움직이며 숨을 꾹, 참고 있다가 문소리가 들리고 눈을 깜빡이니 손등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씨이……."
손등으로 얼른 눈을 닦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이것저것 참 서러웠는지 잘 멈추지 않는다.
바보장동우, 왜 울어 왜, 왜…….
이 와중에도 문 바깥에서는 즐거운 듯 한 웃음소리.
짜증나, 나빠, 난 너 하나밖에 없는데, 여기서는 진짜 하나도 없는데 너까지 없으면, 난, 난..
"어, 어디가?"
"...어, 나, 아까 슈퍼에 뭘 놓고와서.."
"아-어."
언제부터 지가 나한테 그렇게 신경 썼다고,
아파트를 나와 하늘을 보니 괜히 또 꾸물꾸물, 비가 올 것 같다.
그래, 비나와라, 꼭 날씨가 내 기분같네, 응?
눈을 비벼 문지르고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눈에 띄는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내가 학생처럼 보였는지 천원을 내니 500원을 거슬러주신다.
멀어져가는 아파트..
이제, 어딜 가지..체크카드도 양심 있게 두고 왔고...한숨만 나온다.
그래, 내가 어디 믿을게 이호원밖에 없나, 17년을 이호원없이 얼마나 잘살았는데........
어차피, 날 찾지도 않을 호원이, 계속 거기 있는 것도 민폐야.
아니면 진짜 어디 가서 뛰어내려 죽어볼까? 혹시 알아, 다시 미래로 돌아갈지, 나를 안아주는 호원이에게 돌아갈지..
"..진짜 생각한번 어이없고 쓸데없다-.."
거리를 보여주는 창문을 멍하니 보며 창에 기대 눈을 감았다.
어디든, 먼 곳으로 가야지.
//
안녕하세요!ㅎㅎㅎㅎㅎ
방학했습니다ㅠㅠ물론 다음주부터 학교에 다시 가지만요...ㅎㅎㅎㅎ..
방학에도 심자하는 여고생의 마음이란....
원래 번외를 가져오려고했는데...번외는 아무래도 후에 끼워넣는게 전개상 더 자연스럽고 좋을것같아서
그냥 10편 가져왔어요^~^!ㅋㅋㅋㅋㅋㅋ
괜찮으신가요...ㅠㅠ...이게 호원이의 심리가 어느정도 이해가 되어야 재미있을텐데..
저는 제가 호원이의 마음을 쓰는입장이라..잘 모르겠네요 마음껏 까주세요^^!ㅋㅋㅋㅋㅋㅋ
야동은 이어지려면 한-참 먼듯....^^; 저는 참 삽질을 좋아합니다ㅋㅋㅋㅋㅋㅋㅋ
번외는 못가져왔지만 주말에 11편도 쓰고 수정해서 데려올게요!ㅎㅎㅎㅎ
늘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좋은저녁보내세요 물결하트~
+어휴 저 bgm올리는거 까먹어서 수정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음악 괜찮나요?ㅎㅎㅎ
이게 아련하게들으면 아련하게들리고 슬프게들으면 슬프게들리고 즐겁게들으면 즐겁게들리고....뭐....그렇더라구요....^^;;;ㅋㅋㅋㅋㅋ
별로라그러시면 다음편에는 바꿔오도록하는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