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쿠야] 조직물 같은 달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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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밤은 어둡다.
다시는 어두워지지않을 것만 같던 하늘이 금세 거무죽죽한 색으로 변하는 것을 바라보던 타쿠야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그만 한숨이 휴, 하고 새어져나왔다. 그 소리에 저 멀리서 총구를 다듬던 준재가 고개를 한 번 들었다, 다시 또 푹 수그려뜨렸다. 타쿠야 역시 덩달아 고개를 꼴까닥, 밑으로 숙인 듯 했으나 준재가 땅바닥에다 거세게 총을 내려놓자 금세 놀래선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척 치켜들곤 말했다. 이번엔 안 졸았어요. 혹여나 오해해선 또 저에게 뭐라 한 마디 늘여놓을까봐 타쿠야의 말속도가 빠르다.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던 준재의 입에서 살풋,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오늘은 너, 안 건드렸잖아."
"……말씀 참 이상하게 하십니다, 형. 누가 보면 제가 무슨 포로인 줄 알겠어요."
"거의 포로나 다름없지 뭐. 어쨌든 넌 버려진거고, 그걸 내가 거둔거니까."
"거둔게 아니고 제가 쓸만해보여서 선택해 간거잖아요, 형이. "
말은 똑바로 하셔야죠. 한 마디도 지질않는다. 그런 타쿠야의 모습에 준재가 이번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머쓱한 지 뒷머리를 긁던 타쿠야가 이내 총기 점검을 거의 다 끝내가는 준재의 옆으로 가 바싹 붙어앉으며 물었다.
"이번에 새로 받은 총이 이거예요?"
대답대신 준재가 고개를 대충 끄덕이며 타쿠야를 살짝 옆으로 밀어내었다. 그러자 타쿠야의 입이 비쭉, 앞으로 툭 튀어나온다. 오늘 계속 일부러 멀리 가 있었는데. 혼잣말이라고 치기엔 너무 큰 타쿠야의 말에 준재가 타쿠야를 쳐다보았다. 어쩌다보니 계속하게되는 말대꾸가 자신이 생각해도 좀 열이받겠다, 싶었는지 타쿠야가 조금 더 멀리 준재에게서 떨어졌다. 그래도 여전히 입술은 계속 툭 튀어나와 있어 준재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진짜예요. 굳이 한 마디 더 붙이려 든다.
나도 알아.
아까보다 한층 더 준재의 목소리가 깊어졌다. 타쿠야는 늦은 밤이 되면 피곤에 낮아지는 그런 준재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그래서 고작 한 마디더라도 그런 준재의 목소리를 들으면 자신의 고단한 하루를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는데, 마침 이 말이 딱 그랬다. 타쿠야가 금세 기분이 좋아져선 이번엔 입술을 둥글게 올려 방긋방긋 웃음을 지었다. 준재가 한 발짝, 타쿠야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준재는 자신의 말을 듣곤 웃음을 짓는 타쿠야의 모습을 좋아했다. 타쿠야의 웃음소리는 준재에게 고단한 하루를 보상받는 기분이 들게끔 해주었다. 한참을 웃던 타쿠야가 멀뚱히 서있는 준재에게로 걸어가 그 옆에 팔짱을 끼곤 섰다. 멈칫, 또 다시 준재가 타쿠야에게서 팔을 뺄려 했다. 안되요. 타쿠야가 말한다. 오늘은 봐줘요.
"아까 낮에 영준이 대신 제가 가서 내일 형이 처리해야 하는 곳 살펴보고왔단말이예요."
"…거기 엄청 복잡한데. 그런델 왜 갔어?"
"영준이가 갑자기 배아프다면서 빠졌으니까."
"다시는 그런거 대신 하지마. 넌 그냥 내 밑에서 나만 보살피고 내가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거야. 그래도 돈 다 나와. 돈 액수가 적어?"
"..그런거 아니예요, 준재. 그리고 나 길치도 아니야. 낮에도 다 살피는데 2시간정도밖에 안걸렸어요. 영준이가 자기는 3시간도 더 넘게 걸린댔는데. 왜, 고생했다고 한 마디라도 안해줘요? 힘들었냐고 묻지도 않고. 다짜고짜 그런델 왜 갔냐니. 준재, "
"……내 말은,"
"아니, 형. 사실 저 지금 좀 섭섭해요."
타쿠야가 그렇게 말하는 동시에 끼고있던 팔짱을 뺐다. 순간 준재의 눈빛이 흔들렸지만 타쿠야는 그걸 보지 못했고, 준재는 이번엔 서운함에 촉촉해진 타쿠야의 눈가를 보았다. 순전히 다 준재 자신이 위에 있고 타쿠야가 조금 허리를 굽혔기 때문이리라. 타쿠야가 쿵쿵 발을 굴리며 준재에게서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준재의 왼쪽팔은 아까 타쿠야가 팔짱을 꼈을 때의 구부려진 그 모습 그대로였다. 타쿠야.
"됐어요."
"됐긴 뭐가 되?"
"무슨 말하려는지 알겠는데, 됐다구요. 그리고 사람이 걱정되서 간건데 돈 액수가 적냐는게 말이예요, 소예요? "
그 와중에도 준재는 타쿠야의 말이 너무 귀여워 웃음이 날 뻔했다. 꾸역꾸역 참곤 타쿠야의 얼굴을 보려는데 일순 타쿠야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득히 담아 가리곤 어깨를 들썩거렸다. 우는 게 아니고, 그냥 너무 답답해서 저러는 것일테다. 준재가 한 숨을 푹, 내쉬곤 타쿠야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는거 몰라?"
"모르겠는데요 준재. 난 일본인이라서."
"……손 치워봐."
싫어요. 타쿠야가 계속해서 준재의 손을 이리저리 피하며 대꾸했다. 결국엔 얼마못가 준재에게 어깨가 꾹, 잡혀버리고 말았지만 타쿠야는 그래도 끝까지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을 요량인것같았다.
"내가 말하는게 원래 좀 서툴잖아. 그치? 첫 만남때도 그랬었고."
"그래서 내가 고치라고 몇 번이나 그랬잖아요. 하는 준재는 별 생각없겠지만 듣는 타쿠야는 좀 많이 상처된다고."
"맞아. 그랬어. 그랬는데. 사람 성격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변하냐? 그거 불가능해, 타쿠야. 넌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난."
"…너무 오래 이 일해서 그래요, 형. 자꾸 준재랑 형이랑 왔다갔다해서 미안한데, 오늘은 그냥 저 먼저 가서 자면 안되요?"
"당연히, 안되."
준재가 타쿠야의 손을 억지로 잡아 깍지껴 내리며 말했다. 아아아, 아파요, 준재. 그렇게 내 손 함부로 대하지 마요. 하지만 듣는체도 안하고 준재는 타쿠야의 손가락들을 하나 하나씩 직접 떼어 자신의 손과 깍지끼게하였다. 곧 잔뜩울상인 타쿠야의 얼굴이 보였고, 의도치않게 깍지를 끼게 된 양 손이 어색한지 자꾸만 고개를 돌리는 타쿠야를 준재는 한참이나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얼마 전에 갈색으로 염색시켜줘서 그런지. 전보다 더 귀여워진것같기도 하고. 잘생겨진것같기도 하고. 더 어른스러워진것같기도 하고.
"…아까 내가 하고싶었던 말은,"
"내가 잘못했어요. 괜히 별 일도아닌데 투정부려서."
"그러니까, 네가 그런 델 아무도 없이 혼자 가면 말이지."
"……미안해요. 앞으론 절대 안 그럴게요. 그냥 오늘 괜히 좀 심술나서? 화가나서? 그랬는데. 준재, 왜 이래요 갑자기? 원래 깍지 끼고 이런거 되게 싫어했잖아..."
네가, 위험해질까봐. 그게 싫어서 그랬어.
쪽, 하는 소리가 고요하던 둘 사이를 꽉 채웠다. 동시에 타쿠야의 귀는 걷잡을수 없을 정도로 빨개지고, 준재는 슬며시 손을 놓곤 황급히 그 자리를 도망쳐갔다.
...요.
밤이 저물어간다. 영원히 검을 것만 같던 이 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