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소년단] 막장 로맨스는 처음이라 4
8. 처음
빗물이 후두둑 떨어진다. 오후 내내 내리던 빗줄기가 사그라드는 듯 하더니 다시 축축한 땅을 적시기 시작했다.
정국이 주고 간 우산을 집어들었다. 오늘도 나를 데려다주겠다는 그를 야근 핑계로 떠밀자, 전해주고 간 것이었다. 밤에는 비가 다시 올지 혹시 모른다며.
'1층입니다.'
1층에 도착했다는 엘리베이터 알림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캄캄한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텅 빈 로비를 걸어나갔다. 집에 갈 생각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겨울밤에 내리는 비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시린 밤공기로도 고단할 퇴근길이 비에 젖는 건 더욱 싫었다.
손목에 달랑거리는 접이식 우산을 고쳐들고 입구를 향해 걸었다. 유리문 바깥에 서 있는 한 인영이 왠지 모르게 시선을 끌었다. 우산이 없는 건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미동이 없었다.
우산을 펼치며, 가만히 비내리는 하늘만 올려다보고 선 인영을 힐끔 쳐다봤다.
"...민윤기?"
"어,"
익숙한 옆태. 탁한 회색 머리칼. 검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지만 보자마자 알아챌 수 있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두 눈이 나를 돌아보더니 살짝 놀란 눈치였다.
"네가 왜 여기 있어?"
"곡작업 때문에 미팅이 있었어요."
"아아, 난 이 회사 다녀. 이제 퇴근."
내 말에 고갤 끄덕인 그가 점점 더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를 올려다봤다. 서류가방 말고는 손에 든 게 없는 그였다.
"집 가는 거면 같이 쓰고 갈래?"
우산을 든 채 그에게 다가갔다. 곳곳에 찰박하게 차오른 웅덩이 위로 계속해서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가 우산 아래 나를 응시했다.
뜸들이는 그의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괜찮,"
"비그칠 때까지 계속 그렇게 서있게?"
나 불편해하는 건 알겠는데,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정곡을 찔린 듯 동공이 확장된 그가 제 머리칼을 털며 민망함을 드러냈다.
터벅터벅 내게 다가온 그가 결국 우산 손잡이를 제손에 옮겨쥐었다. 그럼, 실례할게요.
역으로 걸어가 지하철을 타고 내릴 때까지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착 가라앉은 눈가가 피곤으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 만날 때마다 무표정이던 그 얼굴이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던 건가. 오늘 아침까진 안그랬던 것 같은데.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나조차도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엄청 친한친구 사이였다며 호기롭게 말하긴 했지만, 불편한 티를 내는 그에게 말을 걸자니 괜한 거짓말을 했단 후회가 들 때가 많았다. 지금 이순간은 특히나 그랬다.
둘 사이의 정적이 꽤나 숨막히게 느껴졌다.
민윤기와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걷는 것조차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그와 너무 딱 붙어 걷는 것이 불편해 살짝씩 간격을 넓혔다. 빗물이 어깨에 고스란히 스미는 것도 모르고.
"더 가까이 붙어요."
그런 내게 몇 번의 시선이 오가더니, 차분한 음성이 정적을 깼다. 축축해진 어깨로 다가온 손이 고민없이 그 위를 감싸듯 그러쥐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나를 끌어당겼다. 그 덕에 서로의 어깨가 완전히 맞닿았다.
"비 다 맞잖아."
내 어깨 위에 와 닿았던 그의 손은 제 임무를 다하고 다시 밑으로 떨구어졌다. 무심한 어투는 내게 직접 닿는 대신 정면으로 튀어나갔다.
그의 행동에 괜스레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싸가지없이 굴더니, 내가 알던 민윤기가 잠깐 뿅 하고 나타난 느낌이라고나 할까. 츤츤거리면서 다정한 민윤기.
갑작스런 내 웃음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이 느껴졌다. 아니, 아니야. 손사래치자 이내 그가 앞을 보며 걷는다. 이번엔 내 시선이 그의 반대쪽 어깨 위로 가 닿았다.
"근데, 그러는 넌 왜 다 맞고 있냐?"
우산 아래 딱 붙어 걷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코트가 빗물에 짙게 물들었다. 손잡이를 잡은 민윤기의 손이 미세하게 기울어져있는 게 이제야 눈에 띄었다.
그의 손 위로 내 손을 겹쳐 올리며 손잡이를 똑바로 세웠다. 갑작스런 스킨십에 놀란 그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 큼큼, 헛기침을 해댔다. 뭘 이런 거에 놀라고 그래.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런 거 아닌데."
민망함에 괜스레 딱딱하게 답한 그가 걸음을 빨리했다. 그 뒤로도 계속된 의미없는 투닥거림은 오피스텔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멎었다.
꽤나 익숙한 인영이 줄곧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야 알았다. 정리가 되지 않아, 무의식 중에 자꾸만 부르던 그 이름.
"...김태형?"
"여주야."
눈에 띄게 수척해진 얼굴이 나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입구를 눈 앞에 두고 빗속에 우두커니 멈춰섰다.
"왜 왔어."
"옆은 누구야?"
내가 서 있는 방향으로 한발짝 다가오던 태형이 다시 뒤로 걸음을 물렸다.
내게 온전히 꽂히던 시선이 옆으로 틀어졌다. 민윤기와 나를 번갈아보는 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물기 어린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 왜 왔냐고, 연락도 없이."
재차 물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없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거센 악력이 내 손목을 붙잡아 올렸다.
피할 새도 없이 덮쳐온 고통에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지만 손목을 옥죄는 힘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잠깐 얘기 좀 하자."
"여기서 하세요, 얘기."
이렇게 손목 붙잡지 말고. 갑작스레 다가와 김태형의 손을 내친 민윤기가 내 손목을 감쌌다. 나를 제 뒤로 물린 윤기가 태형 앞을 막듯이 섰다.
예상치 못한 민윤기의 개입에 눈앞에 선 그의 뒷모습만 올려다봤다. 아릿아릿하게 고통이 퍼지는 느낌에 아, 하고 작게 신음을 흘리자 내 손목을 약하게 붙잡고 있던 손길이 떨어졌다.
벙찐 표정을 지은 태형이 실성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험악하게 물든 눈이 민윤기 뒤로 숨은 나를 응시했다.
"얼마됐다고 벌써 다른 사람 만나는 거야."
"..."
"아니면, 헤어지는 것보다 이새끼 만나는 게 먼저였어? 그래서 그만하자고 했던 거구나."
거칠게 추궁해오는 태형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한 번도 감정적이던 적이 없던 김태형이 잔뜩 성난 얼굴을 하고서 나를 바라봤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표정은 낯선 공기를 자아냈다.
"아니. 너랑 헤어진 이유에 너말고 다른 이유는 없어."
"그럼 뭔데. 이 사람."
"순전히 네 변한 모습 때문이라고 말했잖아. 이런식으로 찾아오지마."
"..."
"앞으로 너 더이상 마주치기 싫으니까."
그렇게 헤어지고도 생각나던 태형을 마주하고 있으면서, 또 매정한 말이 나갔다. 낯선 태형을 보며 생각했다. 한 발 물러나봤자, 서로에게 독이 될 더러운 관계 밖에 못 될 거라고.
태형이 다시 붙잡을 새도 없이 뒤돌았다. 내 뒤로 따라붙는 민윤기의 걸음소리가 금방 가까워졌다.
태형에게서 보이지 않을 엘리베이터 앞까지 다다르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괜찮아요."
주저앉을 뻔한 내 뒤에서 등어깨 언저리를 받쳐올린 그의 손이 나를 지탱했다. 차갑다고만 생각했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오자 왠지 마음이 안정되었다.
"미안해요. 오해받을 상황 만들어버려서."
"그게 왜 네 잘못이야. 고마워, 도와줘서."
어지럽게 내려앉은 앞머리를 정리하며 그를 올려다봤다. 항상 내눈을 잘 마주치지 않던 그가 처음으로 흔들림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올곧은 시선이 괜찮다고 말했다. 나를 달래주는 것만 같이.
9. 맞물린 퍼즐
휴대폰 벨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분명, 김태형일 게 뻔했다. 화면을 보지도 않고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엎어놓았다.
"힘들다."
소파에 앉아 힘이 쭉 빠진 몸을 기대었다. 갑작스런 김태형의 등장으로 놀란 마음이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손목의 통증이 아직까지 뚜렷해서 자꾸만 아까의 상황이 떠올랐다.
김태형의 등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례 그 자체였다. 연락없이 집앞까지 찾아온 것부터 저혼자만의 오해로 인한 폭력적인 행동까지.
무엇보다 낯설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의 모습이. 긴장이 풀려서인지 코끝이 찡하도록 뜨거운 것이 속에서 치고 올라왔다.
"아, 왜 눈물이 나냐."
고개를 뒤로 젖히며 손등을 눈두덩이 위에 얹었다. 축축함이 손등을 적신다.
한참을 그러고 있을 때,
'띵동-'
뭐지. 택밴가. 울리는 벨소리에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대충 닦고서 인터폰 앞으로 다가갔다. 화면을 채우는 얼굴을 보자마자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비 다 맞잖아."
내 어깨 위에 와 닿았던 그의 손은 제 임무를 다하고 다시 밑으로 떨구어졌다. 무심한 어투는 내게 직접 닿는 대신 정면으로 튀어나갔다.
그의 행동에 괜스레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싸가지없이 굴더니, 내가 알던 민윤기가 잠깐 뿅 하고 나타난 느낌이라고나 할까. 츤츤거리면서 다정한 민윤기.
갑작스런 내 웃음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이 느껴졌다. 아니, 아니야. 손사래치자 이내 그가 앞을 보며 걷는다. 이번엔 내 시선이 그의 반대쪽 어깨 위로 가 닿았다.
"근데, 그러는 넌 왜 다 맞고 있냐?"
우산 아래 딱 붙어 걷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코트가 빗물에 짙게 물들었다. 손잡이를 잡은 민윤기의 손이 미세하게 기울어져있는 게 이제야 눈에 띄었다.
그의 손 위로 내 손을 겹쳐 올리며 손잡이를 똑바로 세웠다. 갑작스런 스킨십에 놀란 그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 큼큼, 헛기침을 해댔다. 뭘 이런 거에 놀라고 그래.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런 거 아닌데."
민망함에 괜스레 딱딱하게 답한 그가 걸음을 빨리했다. 그 뒤로도 계속된 의미없는 투닥거림은 오피스텔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멎었다.
꽤나 익숙한 인영이 줄곧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야 알았다. 정리가 되지 않아, 무의식 중에 자꾸만 부르던 그 이름.
"...김태형?"
"여주야."
눈에 띄게 수척해진 얼굴이 나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입구를 눈 앞에 두고 빗속에 우두커니 멈춰섰다.
"왜 왔어."
"옆은 누구야?"
내가 서 있는 방향으로 한발짝 다가오던 태형이 다시 뒤로 걸음을 물렸다.
내게 온전히 꽂히던 시선이 옆으로 틀어졌다. 민윤기와 나를 번갈아보는 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물기 어린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 왜 왔냐고, 연락도 없이."
재차 물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없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거센 악력이 내 손목을 붙잡아 올렸다.
피할 새도 없이 덮쳐온 고통에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지만 손목을 옥죄는 힘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잠깐 얘기 좀 하자."
"여기서 하세요, 얘기."
이렇게 손목 붙잡지 말고. 갑작스레 다가와 김태형의 손을 내친 민윤기가 내 손목을 감쌌다. 나를 제 뒤로 물린 윤기가 태형 앞을 막듯이 섰다.
예상치 못한 민윤기의 개입에 눈앞에 선 그의 뒷모습만 올려다봤다. 아릿아릿하게 고통이 퍼지는 느낌에 아, 하고 작게 신음을 흘리자 내 손목을 약하게 붙잡고 있던 손길이 떨어졌다.
벙찐 표정을 지은 태형이 실성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험악하게 물든 눈이 민윤기 뒤로 숨은 나를 응시했다.
"얼마됐다고 벌써 다른 사람 만나는 거야."
"..."
"아니면, 헤어지는 것보다 이새끼 만나는 게 먼저였어? 그래서 그만하자고 했던 거구나."
거칠게 추궁해오는 태형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한 번도 감정적이던 적이 없던 김태형이 잔뜩 성난 얼굴을 하고서 나를 바라봤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표정은 낯선 공기를 자아냈다.
"아니. 너랑 헤어진 이유에 너말고 다른 이유는 없어."
"그럼 뭔데. 이 사람."
"순전히 네 변한 모습 때문이라고 말했잖아. 이런식으로 찾아오지마."
"..."
"앞으로 너 더이상 마주치기 싫으니까."
그렇게 헤어지고도 생각나던 태형을 마주하고 있으면서, 또 매정한 말이 나갔다. 낯선 태형을 보며 생각했다. 한 발 물러나봤자, 서로에게 독이 될 더러운 관계 밖에 못 될 거라고.
태형이 다시 붙잡을 새도 없이 뒤돌았다. 내 뒤로 따라붙는 민윤기의 걸음소리가 금방 가까워졌다.
태형에게서 보이지 않을 엘리베이터 앞까지 다다르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괜찮아요."
주저앉을 뻔한 내 뒤에서 등어깨 언저리를 받쳐올린 그의 손이 나를 지탱했다. 차갑다고만 생각했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오자 왠지 마음이 안정되었다.
"미안해요. 오해받을 상황 만들어버려서."
"그게 왜 네 잘못이야. 고마워, 도와줘서."
어지럽게 내려앉은 앞머리를 정리하며 그를 올려다봤다. 항상 내눈을 잘 마주치지 않던 그가 처음으로 흔들림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올곧은 시선이 괜찮다고 말했다. 나를 달래주는 것만 같이.
9. 맞물린 퍼즐
휴대폰 벨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분명, 김태형일 게 뻔했다. 화면을 보지도 않고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엎어놓았다.
"힘들다."
소파에 앉아 힘이 쭉 빠진 몸을 기대었다. 갑작스런 김태형의 등장으로 놀란 마음이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손목의 통증이 아직까지 뚜렷해서 자꾸만 아까의 상황이 떠올랐다.
김태형의 등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례 그 자체였다. 연락없이 집앞까지 찾아온 것부터 저혼자만의 오해로 인한 폭력적인 행동까지.
무엇보다 낯설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의 모습이. 긴장이 풀려서인지 코끝이 찡하도록 뜨거운 것이 속에서 치고 올라왔다.
"아, 왜 눈물이 나냐."
고개를 뒤로 젖히며 손등을 눈두덩이 위에 얹었다. 축축함이 손등을 적신다.
한참을 그러고 있을 때,
'띵동-'
뭐지. 택밴가. 울리는 벨소리에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대충 닦고서 인터폰 앞으로 다가갔다. 화면을 채우는 얼굴을 보자마자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비 다 맞잖아."
내 어깨 위에 와 닿았던 그의 손은 제 임무를 다하고 다시 밑으로 떨구어졌다. 무심한 어투는 내게 직접 닿는 대신 정면으로 튀어나갔다.
그의 행동에 괜스레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싸가지없이 굴더니, 내가 알던 민윤기가 잠깐 뿅 하고 나타난 느낌이라고나 할까. 츤츤거리면서 다정한 민윤기.
갑작스런 내 웃음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이 느껴졌다. 아니, 아니야. 손사래치자 이내 그가 앞을 보며 걷는다. 이번엔 내 시선이 그의 반대쪽 어깨 위로 가 닿았다.
"근데, 그러는 넌 왜 다 맞고 있냐?"
우산 아래 딱 붙어 걷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코트가 빗물에 짙게 물들었다. 손잡이를 잡은 민윤기의 손이 미세하게 기울어져있는 게 이제야 눈에 띄었다.
그의 손 위로 내 손을 겹쳐 올리며 손잡이를 똑바로 세웠다. 갑작스런 스킨십에 놀란 그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 큼큼, 헛기침을 해댔다. 뭘 이런 거에 놀라고 그래.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런 거 아닌데."
민망함에 괜스레 딱딱하게 답한 그가 걸음을 빨리했다. 그 뒤로도 계속된 의미없는 투닥거림은 오피스텔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멎었다.
꽤나 익숙한 인영이 줄곧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야 알았다. 정리가 되지 않아, 무의식 중에 자꾸만 부르던 그 이름.
"...김태형?"
"여주야."
눈에 띄게 수척해진 얼굴이 나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입구를 눈 앞에 두고 빗속에 우두커니 멈춰섰다.
"왜 왔어."
"옆은 누구야?"
내가 서 있는 방향으로 한발짝 다가오던 태형이 다시 뒤로 걸음을 물렸다.
내게 온전히 꽂히던 시선이 옆으로 틀어졌다. 민윤기와 나를 번갈아보는 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물기 어린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 왜 왔냐고, 연락도 없이."
재차 물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없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거센 악력이 내 손목을 붙잡아 올렸다.
피할 새도 없이 덮쳐온 고통에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지만 손목을 옥죄는 힘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잠깐 얘기 좀 하자."
"여기서 하세요, 얘기."
이렇게 손목 붙잡지 말고. 갑작스레 다가와 김태형의 손을 내친 민윤기가 내 손목을 감쌌다. 나를 제 뒤로 물린 윤기가 태형 앞을 막듯이 섰다.
예상치 못한 민윤기의 개입에 눈앞에 선 그의 뒷모습만 올려다봤다. 아릿아릿하게 고통이 퍼지는 느낌에 아, 하고 작게 신음을 흘리자 내 손목을 약하게 붙잡고 있던 손길이 떨어졌다.
벙찐 표정을 지은 태형이 실성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험악하게 물든 눈이 민윤기 뒤로 숨은 나를 응시했다.
"얼마됐다고 벌써 다른 사람 만나는 거야."
"..."
"아니면, 헤어지는 것보다 이새끼 만나는 게 먼저였어? 그래서 그만하자고 했던 거구나."
거칠게 추궁해오는 태형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한 번도 감정적이던 적이 없던 김태형이 잔뜩 성난 얼굴을 하고서 나를 바라봤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표정은 낯선 공기를 자아냈다.
"아니. 너랑 헤어진 이유에 너말고 다른 이유는 없어."
"그럼 뭔데. 이 사람."
"순전히 네 변한 모습 때문이라고 말했잖아. 이런식으로 찾아오지마."
"..."
"앞으로 너 더이상 마주치기 싫으니까."
그렇게 헤어지고도 생각나던 태형을 마주하고 있으면서, 또 매정한 말이 나갔다. 낯선 태형을 보며 생각했다. 한 발 물러나봤자, 서로에게 독이 될 더러운 관계 밖에 못 될 거라고.
태형이 다시 붙잡을 새도 없이 뒤돌았다. 내 뒤로 따라붙는 민윤기의 걸음소리가 금방 가까워졌다.
태형에게서 보이지 않을 엘리베이터 앞까지 다다르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괜찮아요."
주저앉을 뻔한 내 뒤에서 등어깨 언저리를 받쳐올린 그의 손이 나를 지탱했다. 차갑다고만 생각했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오자 왠지 마음이 안정되었다.
"미안해요. 오해받을 상황 만들어버려서."
"그게 왜 네 잘못이야. 고마워, 도와줘서."
어지럽게 내려앉은 앞머리를 정리하며 그를 올려다봤다. 항상 내눈을 잘 마주치지 않던 그가 처음으로 흔들림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올곧은 시선이 괜찮다고 말했다. 나를 달래주는 것만 같이.
9. 맞물린 퍼즐
휴대폰 벨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분명, 김태형일 게 뻔했다. 화면을 보지도 않고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엎어놓았다.
"힘들다."
소파에 앉아 힘이 쭉 빠진 몸을 기대었다. 갑작스런 김태형의 등장으로 놀란 마음이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손목의 통증이 아직까지 뚜렷해서 자꾸만 아까의 상황이 떠올랐다.
김태형의 등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례 그 자체였다. 연락없이 집앞까지 찾아온 것부터 저혼자만의 오해로 인한 폭력적인 행동까지.
무엇보다 낯설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의 모습이. 긴장이 풀려서인지 코끝이 찡하도록 뜨거운 것이 속에서 치고 올라왔다.
"아, 왜 눈물이 나냐."
고개를 뒤로 젖히며 손등을 눈두덩이 위에 얹었다. 축축함이 손등을 적신다.
한참을 그러고 있을 때,
'띵동-'
뭐지. 택밴가. 울리는 벨소리에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대충 닦고서 인터폰 앞으로 다가갔다. 화면을 채우는 얼굴을 보자마자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비디오 태그를 지원하지 않는 브라우저입니다
"괜찮다면서."
"..."
흘러내린 머리를 귀 뒤로 꽂다가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푹 가렸다.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어... 울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아. 왜 또 눈물이 나지. 손부채질을 하며 눈물을 말리려 애썼다.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고는 당황한 그를 올려다봤다.
"미안. 긴장 풀려서 그런가봐."
"..."
"온 김에 맥주 한 잔 할래?"
별 의미는 없었다. 그냥 마음이 복잡했고, 그래서 갑자기 술이 당겼고, 마침 집에 미처 먹지 못한 맥주들이 왕창 있던 게 떠올랐을 뿐.
그의 손에 들린 우산을 한 손에 옮겨 들고 현관문을 더 열어젖혔다.
저때문에 다시 눈물이 터진 날 보고 차마 거절은 못하겠는지 민윤기가 엉거주춤 들어왔다.
코를 훌쩍이면서도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거실 한가운데서 어쩔줄 몰라하던 그가 내 손짓에 겨우 테이블 앞에 앉았다.
"울어서 그런지 술 땡긴다."
아직 따지도 않은 민윤기의 캔에 짠, 하고 치고는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고나서야 그가 나를 따라 한 입 들이켰다.
사방으로 데구르르 굴러다니는 눈동자가 이 상황을 불편해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너 진짜로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어?"
"네. 갑자기 그건 왜,"
"그냥ㅡ. 서로 집에 죽치고 살던 때도 있었는데, 이렇게 불편해하는 네가 웃겨서."
그제야 제 모습을 깨달은 윤기가 굳은 몸에 힘을 뺐다. 아, 미안해요. 친구였다고 하지만 전 기억이 하나도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아, 그만그만. 알겠으니까 미안하면 그냥 마셔."
"아."
"그냥 암말 안해도 돼. 술 친구가 필요한 거니까."
그제야 윤기가 얌전히 맥주를 홀짝였다. 다시금 정적이 찾아왔지만, 아까처럼 그리 불편한 정적은 아니었다.
혼자 먹긴 서럽고, 누군가와 함께 떠들며 먹는 술자리는 싫을 때 내가 딱 바라던 술자리였다. 같이 마시긴 하지만 억지로 대화를 이끌어가지 않는, 적당히 외로움이 채워지는 그런.
" 여주씨. 그만 마셔야 될 거 같은데."
맥주 한 캔으로 끝내려했던 술자리가 어느 새 맥주캔 무덤을 이루고 있었다. 벌써 혼자 여섯 캔 째인 거 알아요? 옆에서 민윤기가 무어라 말하든 말든, 남은 한 방울까지 입에 털어넣었다.
"끅, 왜 이렇게 취하는 거 같지."
"...그야 많이 마셨으니까요. 이제 진짜 그만,"
그 순간 다시 벨소리가 울렸다. 익숙한 피아노 전주에 반사적으로 폰을 집어들었지만 이내 다시 뒤집어엎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진짜 김태형이었다. 다시금 맥주를 들이키며 울리는 벨소리가 멎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한계였는지 고작 한 모금 더 마셨다고 취기가 확 올라오며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때문에 윤기가 갑자기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도 뒤늦게서야 알아차렸다. 이 노래..., 놀란 듯한 눈빛이 나를 계속해서 응시했다.
"아아, 이 노래? 내가 만든 노래야."
"..."
"내가 지금은 회사 직원 나부랭이지만,"
원래 작곡과였다구. 넌 기억 없어서 모르겠지만. 아무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두 눈이 별안간 붉어졌다.
아. 길게 내뱉는 숨결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렇게 찾았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찾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더욱 깊게 스며오는 취기가 머리를 댕 울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내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시선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테이블 위로 무거운 머리를 툭 떨구었다.
벨소리 하나가 무슨 파장을 불러일으켰는지 꿈에도 모른 채.
생각없이 막 써서 뭘 쓰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욥... 중구난방 이상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