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년째, 매일 고백하는 여자 *
같은 중학교 출신이던 세훈은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한 잡지 표지모델을 장식했다.
높은 판매부수를 올리던 잡지는 아니였지만 세훈은 버스조차 타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동네 여학생들의 스타가 되어가고 있었다.
같은 아파트 동에 살았던 터라 나는 원치 않게도 세훈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다.
난 세훈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였다. 아니 오히려 싫어하는 편이였지.
내가 본 세훈은 안하무인에 겉멋만 잔뜩 들어서는 자기 잘난 맛에 취한 어리광쟁이, 딱 그 정도였다.
그래서 난 세훈에 열광하며 일거수일투족 쫓아다니는 여자 애들을 보며 하루에도 몇 번씩 혀를 끌끌 찼다.
그냥 그저 이 모든 게 스쳐지가는 바람과도 같은 일이 되길 기도할 뿐이였다.
세훈을 보러 온 여고생들 때문에 토요일이면 버스 만원사태가 계속 됬고 덕분에 난 제 시간에 하교 하지 못했으니까.
"오세훈 때문에 버스도 못 타고 이게 뭐야."
하지만 나의 열 일곱번째 생일날 마주한 세훈으로 인해 내 인생을 아주 급한 커브길에 들어서버렸다.
내 열 여덟번째 생일날은 치매가 있으셨던 우리 할머니를 찾느라 눈물을 오지게도 뺐던 날이였다.
엄마가 슈퍼에 갔다오는 사이 집에서 사라진 할머니는 그 날 저녁이 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고 온 가족이 할머니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혹시 집으로 돌아올 지 모르는 할머니를 기다리며 경비실 앞에 앉아 아파트 동으로 들어올 수 있는 골목길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을 뿐 이였다.
제발, 할머니가 아무 일 없이 우리 가족 곁으로 돌아와주길 믿지도 않는 신께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자주 가시는 공원에 갔는데도 안 계시네."
"경찰서에 방금 실종신고 했어.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집에 들어가 있어."
"할머니 곧 찾을테니까 걱정하지 마."
아빠, 엄마, 삼촌에게 차례로 걸려오는 좋지 않은 소식에 울음이 터지고 터져 말라붙을 시간도 없이 계속 흘러내렸고 숨이 턱 하고 막힐 때 쯤 들린 할머니의 목소리.
"ㅇㅇ아~ 할미가 우리 손녀 선물 사왔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붙들어 달려간 곳에는 세훈의 등에 업힌 할머니가 손에 학용품 세트를 들고는 환하게 웃고 계셨다.
손녀 선물 사느라 밖에 나가신 거예요?
할머니를 다그치고 싶었지만 갑자기 풀어진 긴장에 제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고, 세훈의 등에서 내려온 할머니가 조용히 날 안아주셨다.
결국 난 할머니 따뜻한 품에서 동네가 떠나가라 큰 소리로 울고 말았다.
할머니의 품 속에서 힐끔 보이던, 아무 말 없이 날 기다려주던 세훈의 큰 발을 난 5년이 흐른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다.
좀 잊혀지면 이 마음 앓이가 좀 덜하련만.
"……저기 고마워……"
그렇게 한참을 울고서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세훈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치지 않는 내 울음에 지쳐 가족들은 벌써 할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간 후 였다.
새삼스레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도 웃겼지만 나는 바보처럼 엉망인 얼굴이 부끄러워 숙인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됐어. 그만 울고."
땀에 흠뻑 젖은 머리칼로 돌아서는 세훈의 등을 보며 나는 결국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못했다.
그 날 밤, 세훈이 나오는 꿈을 꾸었고 꿈에서 깨며 깨달았다.
사랑에 빠진거야.
"좋아해."
"어."
바로 그 다음날 이였다.
툭하고, 고백을 한 내가 나도 놀라웠다.
빵을 먹던 세훈에게 난 무심히 고백했고 세훈도 무심하게 대답했다.
딱히 상처를 받지도 않았다.
내 마음을 고백한다고 해서 세훈과의 연애가 시작되기를 바라던가 세훈의 마음을 얻는다던가 등의 기대 따윈 없었다.
난 그저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고 그 뿐이였다.
그렇게 세훈과 같은 대학교에 진학했고, 세훈과 같은 동아리를 가입했고, 세훈의 전역일을 손꼽아 기다렸고 그렇게 4년 270일이 흘렀다.
스물 둘 봄이 시작됐고 평행선 같던 세훈과의 관계가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세훈아, 좋아해."
"어."
오늘도 세훈을 향한 고백으로 나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우리의 이런 모습을 몇몇 고학번들은 적응한 상태였지만 처음 본 동아리 신입생들은 눈이 동그래져 그저 땀만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 날도 그저 여느 날과 같은 날들일 줄 알았다.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신입생의 난데없는 질문 세례만 받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여느 날과 같았을 지도.
"세훈 선배님은 왜 별 말씀이 없으세요?"
"뭘."
"ㅇㅇ선배님이 고백하셨으면 어, 가 아니라 사귀자, 난 너 싫다 이런 대답 해야하는 거 아니예요?"
"신입생이면 신입생 답게 굴어."
"세훈 선배님 혹시 다른 좋아하는 여자 있으세요?"
"어. 있어."
"어???????"
세훈의 대답에 놀라 쥐고 있던 볼펜을 떨어뜨리긴 했지만 빽, 하고 소리를 지른 건 동아리 동기인 백현이였다.
백현의 심상치 않은 반응에 질문 융단 폭격을 날리던 신입생도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침묵을 지켰고 고학번 선배들은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4년 271일째에 오세훈의 짝사랑을 알게 되다니 나도 참 둔하다 싶어 자꾸만 헛웃음이 나오려 했다.
"아, 변백현. 귀 아파."
"너 좋아하는 사람 있었어?"
"어."
"와, 오세훈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나쁜 놈이였네."
"내가?"
"그래. 니가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ㅇㅇ 마음 받아주고 그렇게 질질 끌면 안되는 거지."
"그런가."
"그런가? 그런가 같은 소리하네. 오세훈 너 진짜."
백현은 자신의 일인라도 되는 냥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세훈을 몰아부쳤고 그런 백현의 모습에도 세훈은 옅은 미소를 띄울 뿐이였다.
세훈을 마음에 품은 사람들은 많았다.
몇 년간 세훈 곁을 맴돌며 사랑을 받는 세훈의 모습은 익숙했지만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세훈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세훈이 떨리는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좋아해, 라고 고백한다면 난 울까.
고민에 빠진 내 앞으로 세훈의 얼굴이 조금 더 가까워져 있었다.
"넌 어쩔거야."
"응?"
"니가 좋아하는 내가, 다른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쩔거냐고."
"세훈아."
"어."
"좋아해."
무엇이 그리 흡족스러운 건지 보기 드물게 입꼬리를 올린 세훈이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세훈아, 어디 가."
"오늘 우리 과 개강집회 있대서 거기."
"아, 언제쯤 끝나? 술집 앞에서 기다릴게."
"까불지 말고 집에 먼저 가."
"아냐, 기다릴게."
"끝나면 새벽 1시 넘어."
"그래도………."
"가."
"…………."
"세 번 말 안해."
"응."
* 불알친구 김민석
"지금 애들 같이 개강 집회 한다는데 가자."
"15학번들이나 있을텐데 나같은 늙은이가 가면 민폐야. 그건 박찬열 너한테도 해당사항 있는 얘기고. 늙어서 그런건지 술도 별로 안 땡긴다 이제.“
"넌 몰라도 난 15학번한테 안 꿇리지. 그리고 술고래가 뭔 바람이 들어서 술자리를 거절하냐. 가자. 어? 가자, 갈꺼지?"
"진짜 별로 안 가고 싶어."
"ㅇㅇㅇ, 너 요 근래 기분 안 좋아서 다운 된 거 내가 모른 척 해줬는데 너 계속 그러면 나 재미없어서 너랑 같이 안 다닌다? 기분이 안 좋을 때일수록 재미나게! 놀아줘야 하는거야. 나 힘써서 너 끌고 가고 싶지 않다? 빨리 와."
학기가 개강한 지도 꽤 시간이 흘렀고 개강집회가 열린다는 안내문을 언뜻 게시판에서 보기는 했지만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럴 기분도 아니였고 이젠 술을 마실 수 없는 내가 술도 마시지 않고 그런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들의 흥을 깨는 처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안 갈 생각이였다.
분명 그럴 생각이였는데 싫다는 나를 붙들고 사정사정하는 찬열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술집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내 의사가 아닌 타의로 온 술자리는 성인이 되고 처음이네.
찬열은 이미 분위기를 타고 이 쪽 저 쪽 테이블을 옮겨 다니느라 정신이 없고 뻘쭘함에 앞에 놓인 안주만 깨작깨작 젓가락으로 집었다 내렸다를 반복하는데 어느새 온 건지 앞에 왠 남자가 꾸벅 인사를 한다.
처음 보는 얼굴인 걸 보니 신입생인 것 같은데 쳐다봐도 눈 하나 꿈쩍 않고 턱까지 괸 건방진 포즈가 날 헷갈리게 한다.
내가 복학생인 걸 모르고 신입생으로 착각하는 건가 싶어 신입생들만 다는 명찰이 없음을 보여줘도 여전한 자세인 남자가 당황스러워 남자의 가슴팍 쪽을 보니 나처럼 명찰이 없다.
신입생도 아니고, 복학한 선배인가.
"ㅇㅇ누나?"
누나라고 부르는 걸 보니 복학한 선배는 아닌 것 같고.
초면에 대뜸 반말에 어떻게 내 이름을 안 건지 툭하고 내 이름을 까놓는 남자의 태도가 시비처럼 느껴져 눈썹을 살짝 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입을 떼서 대답을 해주고 싶지 않았지만 이런 곳에서 다툼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아 그냥 고개 정도만 끄덕였더니 남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누나, 나 세훈이."
오세훈? 아!
익숙한 이름에 머리를 굴리다 기억해낸 내가 아는 세훈이는 초등학교 무렵 우리 아파트 밑 층으로 이사 온 뚱뚱한 남자 아이였다.
뚱뚱한 겉모습 때문에 친구들에게 괴롬힘을 꽤 당하던 아이였다.
자전거를 타고 있던 세훈이를 동네 꼬마들이 짖궃게 괴롭혔고 결국 세훈이 타고 있던 자전거는 내리막길에 쳐 박혀 심하게 까진 무릎을 부둥켜 안고 울고 있는 세훈이를 김민석이 업고 뛰었었다.
그런 세훈을 의사인 우리 아빠가 치료해 준게 인연이 되어 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몇 년간을 붙어 다녔었다.
붙어 다녔다기보다는 김민석과 나를 졸졸 쫓아다니며 형, 누나를 입에 달고 살던 아이였다.
세훈이가 갑작스럽게 이사를 가게 된 이후로 연락이 끊겼고 그 뒤로 잊고 살고 있었는데…….
"세훈이? 완전 오랜만이다. 너 못 알아보겠어. 살도 빠지고 키도 크고 얼굴도 좀 달라진 것 같다?"
"크면서 자연스럽게 살이 빠졌어."
"보기 좋다.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네."
"누나는 더 예뻐진 것 같은데."
"빈 말이라도 고맙다 야. 근데 여긴 어쩐 일이야?"
"나 ㅁㅁ대학교 다녀. 오늘 여기 전자과도 개강 집회 하거든."
"전자과?"
김민석의 과였다.
오랜만에 본 세훈과의 반가움 속에서 또 김민석의 잔상이 밟히고 있었다.
어떻게 너와의 인연은 지우면 지울수록 자꾸 눈에 치이는 거니.
"응, 전자과. 누나도 알겠네 그럼."
"응?"
"나도 이번에 막 제대해서 알았는데 민석이 형이 우리과 선배더라고. 누나랑 민석이 형은 대학교도 같은 데 온 거야?"
"그렇게 됬지 뭐. 어쩌다보니."
"둘은 여전하네."
"여튼 반갑다 이렇게 다시 보고."
"응. 우리 과 테이블 저 쪽인데 민석이 형 여자친구있던데. 곧 민석이 형도 올 것 같더라."
아차, 세훈이 말에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김민석은 과CC였다. 물론 현재 진행형인 상태였다.
김민석과 23년 친구로 지내면서 김민석의 연애상담을 내가 해주었고 내 연애상담도 김민석이 해주었지만 김민석이 가장 애를 태우며 나에게 SOS를 보냈던 여자친구가 현재 김민석이 사귀고 있는 여자친구 지원씨였다.
김민석은 복학한 뒤 지원씨와 재결합 했고 그 소식을 전하는 들뜬 표정의 김민석에게 나는 진심으로 축하해주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뱃속에 김민석의 아이를 품고 여자친구가 생긴 김민석에게 축하를 건넨 꼴이다.
여자친구 있는 남자랑 사고쳐서 임신한 여자.
막장 드라마가 판을 치는 요즘 시대지만 아직 이런 막장물은 안 나왔는데 3류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기분은 참 더럽다.
아찔한 현실에 머리가 핑 돌아 손으로 머리를 감싸는데 세훈이가 씩 웃더니 소주병을 두어번 흔든다.
"누나, 한 잔 할래?"
"나 술 못 마셔. 그리고 너희 과 사람들이랑 놀아야지."
"난 누나랑 마시려고."
내 기억 속에 세훈이는 초등학생 모습인데 언제 이만치 커져서는 어디서 그런 걸 배운건지 능숙하게 소주 밑바닥을 팔꿈치로 때리고 소주 뚜껑을 연 세훈이 억지를 부리며 소주잔을 내 손에 쥐어준다.
난 진짜 마시면 안되는데…… 곤란해져서 연신 세훈이 내미는 소주병을 미는데 옆에 있던 복학생 오빠가 세훈이를 더 부추긴다.
ㅇㅇㅇ 얘 완전 술고래야 고래.
오빠의 말에 탄력을 받은 건지 세훈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소주병을 들이밀었다.
"걘 안돼."
어디서 나타난건지 내 소주잔을 막은 누군가의 손 때문에 내 소주잔에 따라지던 술이 그 사람의 손등을 타고 테이블 위로 쏟아졌고 놀란 세훈이 급하게 휴지를 뽑아 들었고 난 쏟아진 술에 옷이 젖어 황급히 일어났다.
옷에 스며든 소주 냄새가 역겨워 세훈이 뽑아 주는 휴지를 건네받아 옷을 닦느라 정신 없는데 세훈의 형.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설마…… 하는 생각으로 고개를 드는데 오묘한 표정의 김민석이 축축한 손을 털고 있었다.
반갑다는 세훈의 인사에는 반응조차 않고 올곧은 눈빛으로 날 보던 김민석의 이마에는 상처가 나있었다.
일주일 전에 상처인데 아직 남을 걸 보니 당시에는 꽤 컸을 상처에 들어서는 안되는 미안한 마음이 조금씩 비집고 고개를 내밀었다.
상처 났구나.
어느새 이마에 검붉은 딱지가 앉은 김민석 옆에는 사진에서만 보았던, 김민석의 입에서만 들었던 김민석의 여자친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