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유심조
一 切 唯 心 造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쏘크라테스
4
새벽에 납치극이라니, 이해가 안 돼
대장은 내게 아무런 눈빛조차 주지 않고 떠나버리고 말았다. 대장을 뒤따라 가던 종인이가 내 분위기를 읽었는지 몰래 대열을 빠져나와 내게 찾아왔다.
"어제 대장이랑 싸웠어?"
"그런거 아냐, 빨리 가. 혼나지 말고."
"그런거 아니긴, 입이 대빨 나왔구만. 야, 신경쓰지 마. 한 두번이냐."
"응. 그렇지."
"얼른 갔다올게, 기분 풀고 있어. 무슨 일 생기면 뭐, 생길 일도 없겠지만. 하여튼 몸 조심해."
"응. 너도 조심해."
종인이는 이미 멀어진 대열에 합류하려 뜀박질을 해댔다. 뛰어가면서도 나를 쳐다보며 손을 흔드는 종인이에게 나름의 눈 인사와 함께 미소를 지어주었다. 종인이도 하루종일 신경쓸지 모른다. 저 성격에, 저 행동이면 아마 대장 눈치만 엄청 보다가 돌아오겠지. 나는 멀리 점이 되어버린 대열을 다 지켜보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마을에 사람이라고는 전부 남자들 뿐이라서 여자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더 한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편하게 말 터놓을 친구나 누이조차 없다는 게 나름 내 고민이었다. 옆에는 대장이나 종인이가 있지만 그 둘에게도 하지 못할 말이 있지 않은가. 나는 방 안에 들어가 침낭에 몸을 뉘였다. 아직 푸른 빛이 가시지 않은 새벽이다. 조금은 잠을 자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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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 어제 뭔 말을 했던 겁니까."
"별 말 안했어."
"뭐 안 들어도 뻔합니다. 쟤가 제일 싫어하는 여자 취급이나 했겠죠."
"잘 아네."
"어렸을 때는 그런 거 안 따지시지 않았잖아요. 어찌보면 쟤가 저보다 활 솜씨도 좋고 사냥도 더 잘하는데."
"이제 성인이다. 더 이상 어린 애가 아니야. 결혼도 하고, 애도 가질 아이가 도적질이나 하는 게 꼴사나워서 그런다."
포(浦)산으로 가는 길, 대열 중간에서 대화를 나누던 종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 진다. 몇 년전부터 민석이 유난히 여자취급을 하는 것이 신경쓰였던 터라, 민석의 행동이 가끔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몸을 부대끼며 살아왔던 시간이 언 8년이다. 하지만 같은 성 별을 가진 것이 아니다. 여자, 도적질을 하기엔 너무도 나약하다. 종인은 옆에서 계속 지켜봐왔다.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잊게 하려 온갖 수단이란 수단은 다 써왔던 날들을. 늘 붕대로 가슴을 감싸고, 남들보다 음식도 배로 먹어대며 살을 찌웠다. 월경을 하는 날엔 절대 티를 내지 않고 조용히 피해다니며 여자로써의 제약을 이겨내갔다. 민석도 그런 노력을 계속 보았을 터, 그런데 왜. 종인은 의문만 들 뿐이다.
"그럼 애초에 도적질을 시키지 말았어야죠."
"그러게. 나도 후회하는 중이야."
"대장."
"우리와 어울리지 않는 아이라는 걸, 왜 이제야 깨달았는지."
민석은 어제 일을 떠올렸다. 큰 눈망울에 맺혀있던 눈물을. 자신이 차마 보듬어 줄 수 없던 그 눈을 보고 있자니, 일부러 험한 말을 하지 못할 것 같단 생각에 일찍이 방을 나와버렸다. 왜 너는 여자아이일까, 민석은 몇 년간 계속 생각했다. 네가 여자 아이가 아니였다면, 네가 남자였더라면 너를 향한 마음은 조금이라도 바뀌었을까. 민석은 아직 하늘에 남아있는 작은 달을 보며 아이를 생각했다. 아이야, 꽃밭을 걷게 해주고 싶었는데. 눈물길을 걷게 해주는구나.
"대장, 요즘 이상하신거 알죠."
"어디가 이상한데."
"예전보다 더 추워지신거, 눈치 없은 코아저씨도 아세요."
"내가 추워졌냐."
"예. 너무 추워서 동상 걸릴 지경입니다."
종인은 입을 비죽거리며 다른 이의 옆에 서서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홀로 남은 민석은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추워서 꽃이 안 피는 것인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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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 누군가의 인기척에 눈이 번뜩 떠졌다. 누구지, 이 새벽에 길을 잃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혹시 뭘 두고 간 것이 있어서 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이 곳은 나와 대장이 쓰는 방이라 다른 동료들도 발길을 잘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장이 뭘 두고 갔을 일은 없는데. 나는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고 선반 위에 올려놓았던 작은 단도를 소매 밑으로 집어 넣었다. 다른 이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내 방 가까이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누구지, 누가 들어 온 것일까. 조심스럽게 침낭에서 내려와 문가 옆으로 몸을 숨겼다. 허공에 퍼지는 고요함이 몸을 떨리게 했다.
"어느 도적단이냐."
내 목소리가 고요한 방의 적막을 깨트렸다. 이어지지 않는 소음에 나는 천천히 문을 열어 재꼈다. 천천히, 천천히. 문이 조금씩 열리자 아직 잘 보이지 않는 마당의 형채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당을 둘러보니 누가 온 흔적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냥 들짐승인가, 나는 낮췄던 몸을 일으키고 다시 방문을 걸어 잠구었다. 그리고 그때.
"도적단은 아니고, 기생집이다."
걸어 잠궜던 문 밖에서 익숙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목소리는, 얼마전 만났던 찬열의 목소리였다.
"열어."
그리고 단숨에 잠궜던 문이 팍 소리와 함께 열려 버리고 말았고 열린 문 사이로 여러 명의 사내가 뛰어 들어와 내 몸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내 입을 틀어막는 사내와 팔과 다리를 묶는 다른 사내. 내 눈앞에는 저번에 보았던 붉은 색의 용포를 걸친 찬열이 있었다.
"어흥, 잡아가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