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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me less+ 2/2

:: 지금보다 덜::


노래 나온 기념

8.

최연준은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했다. 얼굴색 하나 변치 않고. 최연준은 사랑을 주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사람처럼 굴다가도 종종 사랑을 달라고 보챘는데, 그게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9.

최연준이 가방을 뒤적거렸다. 기다란 가방끈이 바닥에 뱀처럼 흐느적거렸다. 한참을 뒤적거리더니 뭐를 짜잔! 하고 꺼냈는데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처음엔 핸드폰 케이스인 줄 알았다. 최연준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옆을 탁탁 두드렸다. '바닥은 딱딱해서 아파' 얌전히 소파에 꿈쩍을 않고 있으면서 말했다. '오케이 알겠어.' 최연준이 방에서 본인의 외투 여러 개를 들고 와서 대충 접고 쌓아올렸다. '아이 푹신푹신하다~ 내려오세요~' 최연준이 내 손을 잡고 살짝 잡아당겼다. 힘에 이끌려 방석 아닌 방석에 앉았다. 울퉁불퉁해서 엉덩이가 살짝 배기는 감이 있었지만 그리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최연준이 접어두었던 책상을 피고 옆에 앉았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무릎 위에 내 손을 올렸다. '뭐해?' 가방에서 꺼낸 이름 모를 그걸 들고 열었다. 안을 보니까 손톱깎이 세트였다. '손톱 깎기 귀찮다면서. 움직이면 다치니까 가만히.' 그리고 엄지손가락부터 차례차례 손톱깎이로 잘라냈다. '동그랗게 잘라주라.' 최연준은 이미 집중을 하기 시작했는지 숨만 삼키곤 대답이 없었다. 최연준은 한참 동안 엄지손톱만 잘랐다. 무릎 위에 올려둔 손 때문에 팔이 얼얼해졌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오른손 다섯 손가락의 손톱을 잘랐다. 오른손을 끝내고 목덜미가 당기고 눈이 침침한 모양인지 목덜미를 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각진 곳 하나 없이 둥글게 잘린 오른손이 보였다. 조금 각지게 잘라도 되는데. 어차피 다 갈아버리면 그만이었다. 꽤 오랫동안 손톱을 자르지 않은 탓에 마녀 같은 왼손과는 다르게 짧아진 오른손의 느낌이 이상했다.

"왼손은 내가 자를까? 힘들지."

"아니야. 칼을 뽑았으면 끝을 봐야지."

"그 끝 보다가 너 죽겠어."

최연준은 내 말에 오 영광스러운 죽음이네라면서 시답잖은 말을 던지고 왼손을 들어 무릎 위에 올렸다. 최연준과 같이 손톱에 집중했다. 그냥 대충 잘라.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덕에 손톱은 티끌만큼 잘리고 있었다. 대충 잘라도 돼. 어차피 손톱인데. 최연준은 탁자 위에 올려둔 신문지를 펼치고 그 위로 손톱깎이를 조심조심 털었다. 신문지 위로 손톱이 우수수 떨어졌다. 다시 손톱깎이를 고쳐잡고 다음 다시 아주 조금씩 잘랐다. 안돼. 짐짓 단호한 말투에 살짝 당황했다. 최연준은 대게 단호한 어투를 쓰지 않았다. 둥글게 말하거나 듣기 좋게 돌려 말하는 쪽이었는데 이렇게 부정의 답을 한 번에 딱 잘라 말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물론 나한테는 더 그랬다. 죽어도 싫다, 안된다는 말을 하지 않길래 모호해진 답을 가지고 놀려 먹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옷에 걸려서 손톱 찢어지면 어떡해.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길래 비웃지는 않았다. 단언컨대 옷에 걸려 손톱이 찢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평소에 손톱을 깎는다는 행위에 집중을 하는 경우가 별로 없어서 그냥 손 가는 대로 잘라왔던 나에게 최연준은 할 필요 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한 번 해봤다고 왼손은 20분이나 단축했다. 동글동글하게 잘린 손톱은 모난 데 하나 없이 깔끔했다. 공을 들인 보람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최연준은 마지막 새끼손톱을 다 자르자마자 손톱깎이를 내려놓고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손톱이 사람을 잡았다. 손을 뻗어 최연준의 목을 살살 주물렀다. 빳빳하게 굳은 목 근육이 느껴졌다.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짚을 때마다 곡소리가 나왔다. 앓는 소리는 덤이었다. 한참을 주물러주고 최연준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안아달라는 뜻이었다. 무릎으로 손을 뻗은 방향으로 가다 최연준의 품 안으로 쓰러지듯 안겼다. 최연준의 팔이 단단하게 나를 감았다. 시원한 민트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10.

싸웠다. 그것도 좀 크게. 잘잘못을 따지자면 75퍼센트 정도 나에게 과실이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최연준의 생각이었고, 내가 생각하기에 이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연준이 본인에게 25센트의 과실을 매긴 이유는 약속 때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근래 일주일 동안 최연준의 술 약속이 잦았다. 물론 최연준은 나에게 꼬박꼬박 얘기했고, 나는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개중에는 여자들도 끼어 있을 때가 많았는데 술을 마시고 온다길래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방금 전에도 최연준은 저녁에 약속이 잡혔다고 했다. 오늘 저녁에 같이 영화를 보기로 해놓고서 기억을 못 하는 건가 싶었다. 나도 서운했고, 짜증 났지만 가라고 했다. 티를 내지 않았으니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영화 약속은 그냥 없었던 일로 생각하기로 했다. 최연준은 정말 가도 되겠냐고 재차 물었다. 거기에는 본인과 짧게 만남을 가졌던 애도 있다고 하면서 내 속을 긁었지만 나는 그냥 가라고 했다. 미워서 가라고 했다. 술이나 빨리 마시러 가서 내 눈앞에서 꺼져 버리라고. 어차피 나는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이라 내일이 되면 다 풀려 있을 게 뻔했다. 내가 가라고 세 번째 말했을 때 최연준은 표정이 점점 굳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 이제 안 사랑해?"

처음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술 마시러 간다는 얘기 실컷 하다가 갑자기 사랑하냐고 묻는 대화의 전개가 이상했다. 대답도 못하고 쳐다만 봤다. 최연준은 물 빠진 파란 머리를 쓸어올렸다.

"넌 나한테 늘 거리를 둬."

최연준이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가장 나중에 나왔다. 그러니까 최연준의 말은 이랬다. 나는 최연준을 대할 때 늘 선을 긋는다고. 그런데 그 선이 최연준에게 넘어오지 말라고 긋는 것만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최연준에게 넘어가지 말아야 할 선도 같이 긋다는 것이었다. 그게 최연준은 늘 불안하다고 했다. 본인이 아직 믿을만하지 못한가 늘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다면서 왜 아직도 그렇게 사람을 밀어내냐고 말했다. 그러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갈까 하고 항상 마음 졸이고 본인을 떼어내려는 내 의도가 아닐까 하루 수백 번 생각하게 만든다면서. 이번에 자주 있었던 술 약속은 미안하지만 일부러 만들었던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일부러 내 반응이 어떤지 보려고 그래서 잡았던 약속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아무 말도 없이 허락하는 나를 보고 더 자괴감이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영화 보는 것도 잊었냐고 덧붙였다. 최연준이 단어 하나를 꺼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그런 게 아닌데. 난 거리를 둔 게 아닌데. 목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하는 나를 보고 최연준은 옷가지를 챙겨서 나갔다. 늦게 들어올 거야. 먼저 자. 이 말만 남기고 최연준은 금방 사라졌다. 그리고 최연준이 나가자마자 눈물이 봇물처럼 터졌다. 역시 나는 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깜깜해진 밖을 보면서 할 말을 정리했다. 천천히 곱씹었다. 최연준이 오해하지 않도록 내 진심이 아니었노라고 제발 알아달라고. 시계를 봤다. 시침은 12를 조금 넘겼다. 정말 늦네.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헤어지자고 하면 어쩌지.

최연준은 시침이 2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들어왔다. 깜빡 잠에 들었던 건지 눈을 뜨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연준은 환한 거실 불을 끄면서 말했다. 들어가서 자. 겉옷을 벗어 식탁 의자에 걸어두고 곧바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신 것 같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차마 최연준의 손을 잡을 수가 없어서 옷깃만 살짝 잡았다. 최연준이 멈춰 섰다. 말을 꺼내려고 입을 열 때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최연준이 뒤를 돌았다. 옷깃을 잡던 손이 미끄러졌다. 왜. 할 말 있어? 최연준의 말투가 딱딱했다. 저런 말투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다. 싫었다. 다정하게 말해주면 좋겠다. 그렇게 보지만 말고 늘 그랬듯 안아줬으면 하고 바랬다. 목이 많은 말을 담지 못해 터져나갈 것 같이 아파졌다. 그럼에도 목소리는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눈가가 뜨거워지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할 말 없으면 먼저 들어갈게. 최연준이 등을 보이고 걸어갔다.

"그런 거 아니야!"

드디어 목소리가 나왔다. 거세게 튀어나왔다. 최연준이 걸음을 멈췄다. 말을 하는 건지 울고 있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목을 답답하게 막고 있던 말들이 순서 없이 뛰쳐나갔다. 두서도 없는 말을 이어갔다. 거리 두는 것도 아니고 영화 보는 것도 기억하고 있었고 너를 여전히 사랑하고 술 먹으러 가는 걸 허락한 건 널 믿었기 때문이고 거리를 두는 건 정말 아니었으며 오늘은 그렇게 말을 하는 너가 미워서 홧김에 술 약속에 나가라고 말을 했으며 나도 싫었지만 정말 홧김에 그랬던 것이었다. 머릿속에 최연준이 나를 차갑게 내려보는 장면이 머물렀다. 그러다 다시 겉옷을 챙기고 나갔다. 나가면서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를 하고 나를 여기서 그대로 두고. 생각과 말이 뒤엉켰다. 거기다 울면서 말을 하려니 호흡이 모자랐다. 말을 이상한 구간에서 끊어 먹고 숨을 들이켜야 했으며 숨이 모자라 헐떡이는 것도 잦았다. 그러다 결국 과호흡이 왔다. 숨을 들이마시는 것 같은데 턱턱 막혔다. 최연준은 바닥에 주저앉으려는 걸 잡았다. 최연준 몸에 기대서도 호흡이 돌아오지 않았다. 최연준이 옆에서 말하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가방. 종이. 짧게 말한 걸 알아들은 건지 최연준은 나를 잠깐 놓고 방에서 가방을 들고 왔다. 최연준이 놓자마자 나는 이미 바닥에 주저앉았다. 죽을 것 같았다. 손발이 저릿했고 눈앞이 캄캄했다. 최연준이 종이 백을 손에 쥐여줬다. 급하게 펼치고 숨을 들이마셨다. 손이 잘 움직여지지 않아 펼치는 데 애를 먹자 최연준이 빠르게 종이 백을 펼쳤다. 천천히, 호흡이 돌아왔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종이 백을 얼굴에서 떼고 차분히 숨을 골랐다. 최연준이 옆에 다가왔다. 괜찮아?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최연준이 나를 들어 올렸다. 몸에 푹신하게 닿는 게 침대이구나 싶었다. 최연준은 나를 내려놓고 휴지를 들고 와서 눈물 범벅이 된 얼굴 위로 가볍게 두드렸다. 최연준이 이마부터 머리를 쓸어올렸다. 이제 완전히 괜찮은 거야? 병원 갈까? 평소처럼 부드러운 말투였다. 아니. 목소리가 달달 떨렸다. 이불이 몸 위로 덮였다. 힘들면 말하지 마. 물 마실래? 고개를 저었다. 옆으로 돌아누워 한 쪽 시야가 막혀 있었다. 옷만 갈아입을게. 최연준이 티를 벗었다. 평소 집에서 입던 데로 갈아입고 바로 옆에 누웠다. 최연준도 나를 향해 옆으로 누웠다. 한 쪽 팔을 베개로 내어주고 다른 손은 내 등을 토닥였다. 미안해. 의심해서. 최연준이 낮게 속삭였다. 최연준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허리 부분의 옷을 꽉 잡았다. 사랑해. 나 너 정말 사랑해. 최연준이 앞으로 쏟아진 머리를 뒤로 넘겼다. 나도 사랑해.

11.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최연준에게 고백했다. 나는 사실 과호흡이 17살 때부터 있었다고. 최연준이 과호흡에 대해 잘 모르는 눈치라 설명했다. 스트레스를 과도하게 받으면 호흡이 불안정해지는 병이라고 덧붙였다. 치료할 수는 없냐고 하길래 없다고 했다. 있었으면 좋겠다. 최연준은 나를 다시 안았다. 미안한 건 난데 오히려 본인이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얘기했다. 선을 긋는 게 아닌데, 내가 사랑을 너한테서 받을 때 그리고 줘야 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렇게 느끼는 거 아닐까. 최연준은 더 꽉 안았다. 그럼 어리광 부려. 때도 써. 싫으면 싫다고 찡찡대. 너가 어떤지 숨기지 말고 다 얘기해. 나한테 그렇게 하면 돼. 최연준이 몸을 떼고 눈을 맞추면서 말했다.

"나 너가 딱딱하게 말하는 거 싫어."

"알겠어. 부드럽게 말할게."

"전에 만났던 애랑 술 마시는 것도 싫어."

"그건 이제 다시는 없을 거야."

"다른 애들한테 다정하게 말하지 마."

"그럴게."

"안아줘."

최연준이 나를 안았다.

"사랑한다고 말해줘."

"사랑해."

"나도."

"나도 말고."

"사랑해."

11-1.

최연준은 확실히 내가 어리광을 부릴 때 뭔가 뿌듯해하는 것 같았다. 뿌듯하다 하고는 단어가 조금 안 맞는데. 하여튼 좋아했다. 아, 좋아했다의 맥락도 아니다. 귀여워했다? 약간 애기 보듯 봤다. 귀찮지도 않은지 하나하나 다 받아주는데 싫은 티가 하나도 없었다. 처음엔 어색했는데 이젠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하기 싫다, 저거 하고 싶다 말하는 나를 보면서 나도 가끔 깜짝깜짝 놀랐다. 최연준은 늘 같은 대사를 치면서 내 말대로 해줬다.

"완전 애기네 애기."

이랬던 경험이 없어서 늘 낯설었지만 좋았다. 최연준에게 이따금씩 미안해졌는데 최연준은 그때마다 미안하면 뽀뽀나 한 번 해달라면서 볼을 들이밀었다.

12

코스튬 파티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최연준의 적극적인 지지에 힘입어 치마를 입고 가기로 했다. 최연준은 나의 적극적인 지지에 힘입어 뱀파이어 코스튬을 입었다. 파란 머리 뱀파이어가 어딨냐면서 찡찡댔지만 너라면 그것도 잘 어울릴 거라는 내 말을 듣고 바로 옷을 갈아입었다. 이빨까지 착실하게 끼우고 문을 열었다. 튀는 건 최연준인데 오히려 그 옆에 얌전한 옷을 입은 나도 튀었다. 얌전해도 너무 얌전한 탓이었다. 롱 스커트라 걱정은 안 하지만 혹시라도 치마가 뒤집어지지 않을까 자꾸만 치마를 죽죽 폈다. 바람이라도 불면 치마를 꽉 잡았다. 학교 정문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벌써부터 베스트 드레서를 노리고 달려온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세상에 저 아이언맨 슈트만 해도 얼마야. 최연준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학교 교정에 들어가자마자 최연준은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아무래도 파란색 머리를 한 뱀파이어는 기록에 없다 보니 눈에 띄는데 단단히 한몫을 했다. 얼마나 잘 어울리는데. 순간 커다란 대포 카메라가 눈앞에 나타났다. 아, 카메라. 긴장하기 시작했다. 온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최연준의 손안에서 힘이 빠져 금방이라도 손이 빠져나올 것 같았다.

"너희 옷이 너무 멋져서 그런데 사진 찍어도 될까?"

최연준이 고개를 돌려 나에게 물었다. 어디 아파? 괜찮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다시 내쉬었다. 안 아파. 괜찮아. 카메라를 들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들이닥친 외국어에 뻘쭘하게 우리 둘 앞에 있었다.

"찍어도 될까...?"

나는 찍기 싫어. 내 말에 최연준이 말하려는 걸 다급하게 막아섰다. 근데 너는 찍었으면 좋겠어! 최연준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알겠다고 했다. 나는 카메라 보이 옆에 서서 최연준이 찍히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최연준은 꽤 능숙하게 이리저리 포즈도 잘 취했다. 손에 땀이 배기 시작했다. 옆에서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렸다. 옛날 기억이 생각났다. 최연준은 카메라 보이의 악수를 받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최연준의 손 대신 팔을 잡았다. 최연준의 양복이 구겨졌다. 최연준은 묘하게 들뜬 표정이었다. 코스튬 입을 거면 제대로 하자고 산 파란색 컬러렌즈가 불편한지 여러 번 눈을 깜박였다. 그래도 빼자는 소리는 안 했다. 어디로 갈까? 귀에 카메라 셔터 소리만 명확하게 들렸다. 눈에 보이는 아무 표지판을 하나 골라 말했다. 페이스페인팅. 최연준이 사람들을 먼저 가르고 내가 그 뒤에 바싹 붙어 따라갔다. 제발 더 이상 카메라 보이가 없었으면 좋겠다.

뱀파이어 분장을 하고 페이스 페인팅을 받긴 좀 그렇다는 최연준의 말에 내가 의자에 앉았다. 얼굴에 뭘 그려 넣을지는 최연준에게 결정권을 넘겼다. 최연준은 도안을 보더니 나에겐 보여 지주도 않고 바로 페인터에게 알려줬다. 뭐야, 왜 나는 안 보여줘. 내 말에 최연준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나중에 다 그리고 거울로 확인하자. 움직이면 안 된다는 페인터의 말의 나는 강제로 입을 다물었다. 색 조합이라도 보고 싶어서 고개를 살짝 돌리려다 저지당했다. 도대체 뭘 그리는 건지. 뾰로통한 내 표정을 보고 최연준이 그림을 그려 넣는 반대쪽 볼을 검지로 톡톡 쳤다. 정말 금방 마무리된 페이스 페인팅에 엥? 하는 마음에 바로 거울을 들었다. 아. 그림이 아니라 글씨였다. BABE. 한국어로 어감을 살려 말하자면 애기 정도 되는 단어였는데... 최연준은 반대쪽 볼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우리 애기네.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는데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결국 하루 종일 얼굴에 BABE를 쓰고 다녔더니 만나는 사람마다 물었다. 이 해괴한 페이스 페인팅은 뭐냐고 물어봐 주길 바랐지만 내 바람과는 다르게 아무도 내 의견 따윈 묻지 않았다. 열에 열은 다니엘 초이에게 너 완전 로맨틱 하구나? 하는 눈빛을 쏘아댈 뿐이었다. 샐리는 킴 카다시안 분장을 하고 토 하는 시늉을 했고, 올라프 분장을 한 대니는 들고 다니던 당근을 떨어뜨렸다. 알렉스는 평소와 같은 옷차림으로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이야라고 말하면서 이마 위에 손을 얹었다. 그래, 니들도 오마이 갓인데 나는 어떨까. 응? 어떨까? 지우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적발돼서 나는 립스틱을 짙게 바르고 최연준의 볼에 입술 도장을 쾅 찍어줘야 했다. 원래 뱀파이어들은 이렇게 야한 거라면서 우기는 최연준에 그만 속아 넘어간 탓이었다. 가만 보면 오늘이 아주 그냥 생일이었다 생일. 최연준은 한쪽 손목에 내 스크런치를 차고 다녔는데 꽉 조이는 게 불편하지도 않은지 잘 하고 다녔다. 왜냐하면 내가 불편해서 최연준에게 넘겨줬기 때문이다. 파란색 스크런치가 은근 머리랑 매치돼서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한쪽에 스크러치를 달고 최연준은 나에게는 사과주스를 주고 본인은 콘셉트를 유지한다고 토마토주스를 마셨다. 한쪽 손으론 치맛자락을 꽉 잡았다. 치마 끝단이 발목을 스칠 때 어처구니없지만 치마가 뒤집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최연준이 양볼 빵빵하게 주스를 마셨다. 아 뭐야 뱀파이어가~ 내 말에 최연준이 주스를 꿀떡꿀떡 넘겼다. 더 스타일리시하게 먹어봐. 너 지금 뱀파이어잖아. 최연준은 컵부터 다르게 잡았다. 이렇게? 어설픈 게 웃음부터 나왔다. 개츠비 같아 그냥 하지 말자. 내 말이 본인 승부욕을 건든 건지 최연준은 뱀파이어처럼 우아하게 먹어보겠다며 난리를 피웠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러다, 카메라 보이한테 잘못 걸린 것부터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이번 카메라 보이는 일단 무작정 플래시부터 터뜨렸다. 손에 들고 있던 컵을 떨어뜨렸다. 안에 든 게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금방이라도 다 게워낼 것 같았다.

사람들을 온몸으로 쳐내면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변기통을 부여잡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누군가가 머리를 걷어주고 등을 두드렸다. 한참 동안 머리를 처박고 있다 힘이 딸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변기 뚜껑을 내렸다. 물을 내리는 손이 나보다 먼저 튀어나갔다. 검은색 양복인 걸 보아하니 최연준인가 싶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세면대 앞에 가서 입을 헹궜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하고 거울을 봤다. 달려오느라 앞머리가 이마에 달라붙은 최연준이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서 있었다.

"집에 갈까?"

"아니야 더 있을 수 있어."

"집에 가자. 응?"

처음에 물었던 건 긍정의 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었나 보다. 최연준은 휴지를 뜯어 얼굴을 닦는 내 옆에 서서 계속 가자고 말했다. 최연준이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안다. 오늘 파티에서 신나게 놀겠다면서 말했는데 나 때문에 집에 가기가 미안했다. 그리고 이 옷 준비한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내가 다 망칠 수 없었다.

"너 아프면 여기에 있는 게 더 불편해. 가자. 응? 그냥 집에 가자."

"나 괜찮아. 잠깐 속이 안 좋아서 그랬어. 지금은 이제 완전 괜찮아."

괜찮은 척하는 나를 팔짱을 낀 채 보더니 결국 내 손을 잡고 주차장까지 억지로 끌고 왔다. 내가 어디 못 나가게 먼저 차에 태워서 벨트를 채우고 난 다음 운전대를 잡았다. 아 진짜. 마음이 너무 안 좋았다. 지금부터 한창 시작일 텐데. 가시방석에 앉은 나를 보고 최연준은 핸들을 돌리면서 말했다. 나 사실 렌즈가 너무 불편해서 빼고 싶었어. 우린 집에 가서 우리끼리 놀자. 저거 하나도 재미없어. 나를 위해주려고 한 말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미안한 마음에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요즘 최연준이 잘 받아줘서 그런가. 눈물도 늘었다. 결국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미안하다면서 엉엉 우는 날 보고 최연준은 운전도 하면서 나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 손으로 휴지를 뽑아서 일단 갖다 주더니 차를 갓길에 세우고 나를 달랬다. 왜 울어. 응? 울지 마. 뚝해 뚝. 왜 울어 나 속상하게. 응?

13.

집에 도착하고 나는 다 씻었지만 머리만 감고 화장 지우는 법을 몰라 그대로 놔둔 최연준에 나는 최연준의 볼에 잔뜩 바른 하얀 파운데이션을 클렌징 티슈로 살살 닦았다. 어떻게 지워야 하는지 모르고 무작정 벅벅 닦아내는 걸 보고 내가 뺏어들었다. 칫솔을 입에 물고 최연준 턱을 잡았다. 최연준을 밑으로 내려다볼 일이 흔치 않아서 이 구도가 은근 낯설었다.최연준은 내 허리를 잡고 눈을 감았다. 하얀 볼부터 얼굴 전체에 치덕치덕 바른 파운데이션이 지워졌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미안해서 수발을 드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 앞머리가 자꾸 내려오는 게 불편해서 헤어밴드로 싹 밀어 넘겼다. 최연준의 이마가 예쁘게 드러났다. 클렌징 티슈를 한 장 더 꺼내서 이마를 닦았다. 파란 머리카락이 강아지풀처럼 흔들거렸다. 은근 이런 애 같은 구석도 있구나 싶어서 웃었다. 얌전히 눈을 감고 앉아있던 최연준이 입만 움직여 물었다. 내가 아는 애도 카메라만 보면 울렁거린다고 하는 애도 있고 또 걔 말고도 카메라 렌즈만 보면 어지럽다고 하는 애들도 많아. 그러니까 카메라 무서워하고 그런 거 그렇게 큰일 아니야. 눈썹 위를 닦다 손이 멈췄다. 있잖아, 나 원래 카메라 안 무서워했어. 최연준이 듣기 좋은 목소리로 답을 했다. 응, 그랬구나. 최연준을 일으켜서 화장실로 데리고 갔다. 최연준의 목에 수건을 두르고 뒤를 묶었다. 애기 턱받이 같았다. 최연준의 허리를 조금 숙이게 한 다음 손에 물을 묻혀서 최연준 얼굴을 닦았다. 보들보들했다. 어느 정도 씻었다 싶을 때 수도꼭지를 잠그고 최연준을 다시 일으켰다. 손. 내 말에 최연준이 강아지처럼 두 손을 얌전히 포개서 내 손 위에 올렸다. 아니 그렇게 말구. 뭐가 잘못된지 모르는 최연준이 웃겨서 비실비실 웃음이 나왔다. 손바닥을 펼쳐줘야지. 손바닥 위로 폼클렌징을 죽 짰다. 거품 많이 생기게 하고 얼굴에 발라. 최연준이 손을 열심히 비볐다. 원래 카메라 안 무서워했는데, 갑자기 무서워졌어. 최연준이 볼에 거품을 문댔다. 왜? 까치발을 들고 최연준이 잘 바르지 못한 부분에 폼클렌징을 끌어왔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누가 나를 찍었어. 최연준은 아예 눈을 감고 얼굴을 나에게 맡겼다. 누가? 최연준이 입술을 다물고 말을 하느라 발음이 다 뭉개졌다. 같은 학교 남자애가. 하루 종일 내 뒤를 따라다니면서 커다란 대포 카메라를 들고 나를 찍었어. 최연준의 얼굴을 무작정 끌어다 세면대 가까이에 댔다. 물을 틀고 살살 헹궈냈다. 그래서 아직도 생각나는 게 학원 끝나고 집 가는 길이었는데 그때 카메라 셔터 소리 있지, 그게 막 들리는 거야. 내가 집에 들어갈 때까지. 그때 내가 주택에 살았었거든. 대문 들어가기 전까지 계속 그 소리가 날 따라왔어. 거울을 보면서 최연준의 얼굴에 남은 거품을 확인했다. 그리고 한 장 한 장씩 나한테 보내더라. 학교에서 찍은 사진, 학원 끝나고 집에 가는 사진, 버스 기다리고 있는 사진. 그냥 찍은 게 아니라 치마 안이 보이는 것도 있고, 그때 내 방에 커다란 창문이 있었는데 내가 옷 갈아입는 것도 찍은 것도 있었어. 최연준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굳은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최연준의 목에 감은 수건을 풀었다. 어떻게 했긴. 부모님한테 안 들키려고 매일 우편함만 들여다보고 살았지. 경찰엔 이 사진을 들고 가서 어떻게 해달라고 할 용기도 없었고 협박 편지까지 보내서 진짜 무서웠거든. 최연준이 수건을 목에 둘렀다. 그리고 나를 잡고 보는데 얼굴에 묻고 싶은 것도 많았고 이런저런 생각이 다 드는 것 같아 보였다. 방에 들어가서 얘기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최연준이 거실 불을 끄고 나는 먼저 방에 들어가 이불을 덮고 누웠다. 최연준이 방문을 닫고 들어왔다. 수건을 썼다지만 그래도 입고 있던 티가 축축하게 젖어서 티만 갈아입고 옆에 누웠다. 그래서? 계속 얘기해 줄 수 있어? 최연준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아마 치마 안 입었을 거야. 맨날 체육복 바지만 입고 다니니까 왜 바지만 입냐고 또 편지 보내고. 걔랑 좀 피해보려고 다른 길로 다니면 왜 다른 길로 다니냐고 편지 보내고. 진짜 스토킹 한 번 끈질기게 당했다. 근데 걔가 이제는 자기랑 안 만나주면 이 사진을 전교에 뿌리겠다고 하는 거 있지. 그때 진짜 안되겠다고 느껴서 엄마랑 아빠랑 할머니한테 말씀드렸는데, 솔직히 어른들이 좀 꽉 막히신 분들이라도 이런 상황에는 나서주시겠지 했는데, 진짜 웃긴 게 뭔 줄 알아? 얼굴을 떼고 최연준을 올려봤다. 뭔데? 최연준이 내 등을 쓸어내렸다. 나 그때 진짜 혼났어. 뭐? 진짜로? 완전 웃기지. 왜 여자애가 정숙하게 다니지 않아서 이상한 남자애를 불러들이냐고 나만 엄청 혼나고 그냥 그렇게 끝났어. 그날 내가 경찰서 가려고 하니까 걔가 사진 뿌렸더라고. 결국 선생님들이 대신 신고해 주시고 부모님 불러왔는데, 우리 부모님은 이런 수치스러운 일 크게 만들고 싶지 않다고 그냥 합의했어. 최연준은 어이가 없는지 웃기만 했다. 맞아, 이때 과호흡이 처음 왔다. 그래서 나는 그날 이후로 한국에 절대 안 있을 거라고 이 집에 저 사람들이랑 절대로 같이 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미국 왔어. 여기 대학 올 때도 할머니가 무슨 여자가 대학이냐고 안 보내주려고 했는데 그땐 엄마가 도와줘서 겨우 왔어. 최연준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냥 내 머리만 쓰다듬다 겨우 한 마디 말했다. 힘들었어? 응. 난 거기에 있는 게 지옥 같았어.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컸거든. 엄마는 아들을 못 낳았다고 할머니한테 구박받고, 나는 내가 태어나서 삼대독자 다 끝났다고 맨날 구박받고. 나랑은 말도 안 하시고 말만 하면 여자가 그러면 안 된다고 들었어. 진짜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커서 난 고등학교 때 절대 남자 따윈 만나지도 않을 거라고 맨날 다짐했는데. 만약에 17살 때 내가 이 모습 봤으면 쓰러졌을 거다 백 퍼센트. 최연준이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게. 어떻게 또 나랑 만났네. 그러다가 엄마가 내가 고 1 때 동생을 낳았는데 근데 완전 드라만게 걔가 할머니가 그렇게 좋아하던 아들인 거 있지. 나 그 뒤로 완전 없는 사람 됐잖아. 제일 중요한 고3 때 동생이 떼쓰는 소리 때문에 난 맨날 집 대문 앞에서 공부하고 그랬는데... 걔는 어렸을 때부터 고기 먹고 커서 그런가 그 나이로 안 보여. 암튼 그래서, 난 딱히 사랑받고 그랬던 건 없었던 것 같아. 드라마 같은 데 나온 것처럼 우리 딸~ 공주님~ 이런 건 꿈도 못 꿨고. 최연준이 내 등을 당겨 안았다. 내가 더 많이 사랑해 줄게. 민트향이 시원하게 나를 감싸다. 난 지금도 좋아. 너무 무리하지 마. 지치면 안 돼. 최연준이 웃느라 나온 콧김이 목에 닿아 간지러웠다. 지칠 일 없네요.

14.

헤이 레타 문자 왔어. 샐리는 아메리카노를 쭉쭉 빨면서 말했다. 방학 과제를 하느라 정신없었다. 누군데?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마우스를 미친 듯이 클릭했다. 표가 망가지면 난 여기서 뛰어내릴 거야. 샐리가 핸드폰을 키고 알림 창을 내렸다. 몰라. 한국언데? 너 혹시 여기로 다니엘 불렀니? 안경을 올리면서 핸드폰을 가져왔다. 설마, 내가? 너랑 있는데? 핸드폰을 켰다. 방학 중에 온다는 얘기가 없길래 할머니 모시고 왔다. 여기가 너 집이니? 첨부되어 있는 사진은 내 집이 맞았다. 지금 최연준 있을 텐데. 아니 진짜 오신 건가? 샐리 나, 나 집에 가봐야 해. 짐은 내가 나중에, 나중에 찾아갈게. 부탁해. 스타벅스를 나와서 미친 듯이 달렸다. 이건 정말, 정말, 말도 안 된다. 열쇠를 찾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겨우겨우 열쇠를 집어넣고 돌려서 문을 열었다. 눈앞에 보이는 상황이 제발 꿈이길 바랐다. 어색하게 웃으며 앉아있는 최연준과 그 앞에 앉아있는 할머니와 아빠. 소파에 앉아 있는 엄마와 남자애까지. 순간 주저앉을 뻔한 걸 현관 문고리를 잡고 겨우 버텼다. 이게, 이게 대체 뭐야.

"여기 와서 앉아. 할 얘기가 많은 것 같구나."

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최연준이 옆자리 의자를 빼줬다. 호흡부터 잡았다. 여기서 엄한 꼴 보일 수 없었다. 박자를 세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안돼, 이 사람들 앞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안돼. 엄마까지 간이 의자를 붙여 아빠 옆에 앉았다.

"애인이니?"

"네."

할머니는 혀를 찼다. 어린 것들이 벌써부터 붙어먹어서야. 부끄러운 줄 모르고. 아빠가 할머니를 진정시켰다. 진정하세요 어머니. 남동생처럼 보이는 남자애는 엄마의 다리를 붙잡고 칭얼거렸다. 엄마는 그 애를 달래면서도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벌써부터 남자에 홀려서. 어머님, 용현이 들어요. 최연준이 내 손을 꽉 잡았다. 돈이 아깝다, 돈이 아까워. 이래서 여자가 공부한다는 말을 믿으면 안 돼. 그래서 이름이 뭐라고? 최연준 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할머니와 아빠는 나조차도 묻기 힘든 걸 꼬치꼬치 캐물었다. 최연준은 어느 하나 내빼지 않고 하나하나 성실하게 대답했다. 굳이 이렇게 안 해도 되는데. 모든 포커스가 최연준에게 맞춰졌다. 미치겠다 진짜. 최연준은 그래도 내 가족들이라고 물까지 드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최연준의 옆에는 하얀 봉투가 있었다. 설마 돈 봉투야? 할머니와 아빠는 최연준이 꽤 있는 집 아들이라는 얘기를 듣고 꽤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셨다. 특히 최연준이 외동아들이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아빠가 반색을 했다. 도대체 최연준이 외동아들인 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할 얘기가 다 떨어지자 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집 안을 돌아다니면서 꼬투리를 잡았다. 듣지 않았다. 아빠와 엄마가 할머니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미안해. 최연준한테 작게 얘기했다. 최연준은 고개를 내저었다. 난 괜찮아.

"어! 아이언맨이다!"

최연준이 움찔했다. 아. 최연준이 큰맘 먹고 산 피규언데. 자리에서 튀어 나갔다. 남자애는 이미 아이언맨을 손에 넣었다. 손이 닿지 않을 테니 분명 냉큼 건네줬겠지. 내 화장대에 있었으니까.

"그거 망가지면 안 돼. 돌려줘."

"아 싫어! 니가 뭔데!"

얼탱이가 없었다. 도대체 애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야. 센과 치히로에 나오는 거대한 아기같이 살집이 있는 대로 오른 걸 보아하니 먹을 것도 말리지 않고 먹고 싶은 대로 막 준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얘가 이 모양이지. 최연준이 얼이 빠진 내 옆에 와서 살살 달랬다.

"그거 형이 되게 아끼는 건데 돌려주면 안 될까? 형이 어어엄청 좋아하는 거거든."

"싫어요..."

"그럼 형이 잠깐 빌려줄 테니까 조심조심 가지고 놀아야 해. 이거 엄청 비싼 거거든."

"형이 뭔데요...!"

"이거 형 거거든. 용현이도 아이언맨 엄청 좋아하니까 형이 잠깐 빌려줄게. 어때?"

답이 없는 대화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최연준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평소에 애들을 좋아하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걷는 길에 아기 지나가는 것만 봐도 눈을 못 떼는데. 근데 이런 애는 처음이겠지. 이렇게 답 없는 애는 처음일 것이다. 최연준이 최대한 화를 참으면서 말하는 게 느껴졌다. 본인도 불안불안하겠지. 만약 쟤가 피규어를 망가뜨린 다면 난 바로 무조건 새 피규어를 사줄 것이다. 그리고 쟤한테 엄청 화를 내겠지.

"용현, 남의 거는 함부로 막 건드는 거 아니야. 원래 자리에 가져다 놔."

할머니의 엄한 목소리가 들리자 투털거리면서 다시 화장대에 올렸다. 형한테 주면 된다는 최연준의 말에도 굳이 굳이 본인이 화장대에 올렸다. 올려뒀다는 말은 행동을 많이 순화시킨 표현이었다. 정확히는 아무렇게나 던졌다. 화장품 병들에 부딪히는 소리가 참, 경쾌했다. 최연준이 주먹을 꽉 쥐는 걸 봤지만 모른 척했다. 이 정도 참는 게 용했다. 생각해보니까 할머니 말도 웃겼다. 그럼 내 거는 마음대로 만져도 되는 거야? 최연준은 남자애가 뭘 또 건들지 불안한지 그 애 뒤를 따라다녔다. 쪽팔렸다. 땅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었다. 아니면 저 사람들을 다 밖으로 던져버리던가. 최연준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방을 나왔다. 식탁에 올려진 물컵을 치우다 아까 봤던 그 봉투를 열었다.

이게, 대체, 뭐야. 봉투 안에는 고등학교 때 스토킹 당하면서 찍혔던 사진이 들어있었다. 단 한 장도 빠짐없이. 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다 말끔히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이걸 왜 줘? 버릴 수가 없었다고 쳐도 이걸 왜 최연준한테 줘? 왜? 대체 왜? 설마 최연준도 봤나? 이 사진을 다 본 건 아니겠지? 눈물이 사진에 떨어지고 사진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마침, 다들 방에서 나왔다. 사진을 들고 있는 나를 보고 최연준이 다급하게 불렀다.

"봤어? 봤냐고 최연준. 묻잖아 봤냐고!!"

"시끄럽게 뭐 하는 짓이야! 그깟 사진이 뭐 어때서."

"그깟 사진? 할머니는 이게 뭐 좋은 사진이라고 보여줘요? 아니 이걸 애초에 왜 갖고 있는데?"

"내가 가지고 있었다."

"왜? 다 버렸는데 그때... 내가 다 버렸는데. 아빠가 어떻게 갖고 있어요?"

"사진 몇 장 가지고 유난 떨지 말고 앉아! 지금 그게 그렇게 중요하니?"

"네. 중요해요. 빨리 말해요. 이걸 왜 갖고 있었어요."

"내가 가지고 있으라고 했다! 나중에 니 남편 될 사람도 니가 어떤 앤지 알아야 하지 않겠어!"

"그걸 왜 할머니가 알려주냐고!! 나한텐 관심도 없었으면서! 이 사진은 범죄라고요, 범죄! 몰라요?! 그 새끼가 불법으로 찍은 사진이라고!"

"그게 지금 무슨 말버릇이야!"

"그럼 이걸 보여주고 뭐라 그러게. 내 손녀는 이렇게 남한테 사진이 찍힐 정도로 문란하던 애니까 이상하게 엮이지 말고 빨리 헤어져라? 아니면 이런 범죄에 휘말린 순결하지 못한 애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데!"

"니 남편도 니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아야지!"

"그니까 그걸 왜 할머니가 알려주냐고!!! 내가 진짜 손녀가 맞아? 그쪽들 딸이 맞아요? 어떻게 할머니랑 부모라는 사람이 이래? 자식이 이때 일어난 일 때문에 평생을 힘들어하는데 어떻게 이 사진을 보여줄 수가 있어?"

머리가 어지러웠다. 세상이 팽글팽글 돌아갔다. 호흡이 가빠 왔다. 최연준이 다시 쓰러지는 나를 받아들었다. 숨이 막혔다. 숨이 들이마셔지지 않았다. 최연준이 나를 불렀다. 대답할 수 없었다. 숨이 모자라 컥컥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최연준이 나를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때 그랬던 것처럼 종이 백을 찾아 펼쳐줬다. 최연준의 말을 따라 숨을 들이 마시고 내쉬었다. 다행히 호흡이 금방 돌아왔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점점 흑백으로 덮였다.

15.

눈을 뜨고 일어났다. 퉁퉁 부은 게 느껴지는 눈을 비볐다. 옆에서 자는 줄 알았던 최연준이 내 손을 잡고 내렸다. 비비지 마. 아퍼. 다시 누워 최연준에게 안겼다. 시원한 향이 이상하게 편안했다. 어떻게 됐어?최연준을 눈을 감은 채로 얘기했다. 내가 다 돌려보내드렸어. 택시 잡아서. 자세를 고쳤다. 그리고 너가 못 일어나길래 병원도 한 번 갔다 오고, 다시 집에 왔어. 최연준의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병원을 언제 갔다 왔어? 너 차에 태우고 응급실 한 번 갔다 왔어. 의사 선생님이 그냥 잠깐 기절한 거라 그래서 바로 집에 왔어. 최연준 어깨너머로 보이는 창은 어두컴컴했다. 미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아픈 데 없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됐어. 난 괜찮아. 최연준의 말에 손톱을 손가락 끝을 꾹꾹 누르다 결국 말했다.

"그 사진... 봤어?"

"아니. 주시자마자 그냥 식탁 위에 올려두고 안 봤어. 사진은 화장대에 올려뒀어. 나중에 태우자."

"그래..."

어쩌면 최연준이 이번 일로 나를 덜 사랑하게 되었다면 난 최연준을 놓아줘야 했다. 나 같은 사람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최연준은.

"이런데도, 날 사랑해?"

"응. 사랑해. 변함없어."

"혹시라도 조금이라도 덜 사랑하게 되면 바로 말해. 내가,"

"그럴 일 없어. 그런 얘기 하지 마. 싫어."

최연준이 이불을 더 끌어올렸다.

여전히 너를 내가 사랑해. 이만큼 사랑할 수 없겠다 싶을 정도로.

너무 늦었죠...?

ㄴ세상에 늦은 걸 알고 있었잖아?

요즘 약간 글 쓰는데 여러 가지 애를 많이 먹고 있습니다...

ㄴ핑계 대지 마세용

이런 상황 대입이 힘들었었고 일단 스토리 자체가 그려지지 않아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ㅠ

ㄴ어디 계속해봐요

하지만 20cm 라이브 연준 군을 천 번씩 돌려보며 마음을 다 잡았습니다...

드디어 럽미레가 완전 끝을 맞았네요

최 군의 머리가 더 이상 파란색이 아니라는 사실에 바닥을 광광 내리쳤지만 여전히 갈색 머리도 빛이 나네요...

지금까지 Love Me Less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궁금한 점은 댓글로 물어봐 주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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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진짜 제 최애 작품입니다.... 작가님 진짜 글 너무 잘 쓰시는 거 같아요... 문체며 작가님 특유의 분위기까지 징짜 너무 멋있어요..!!!
4년 전
42
세상에 이런 극찬을 해주시다니 정말 부끄러워서 숨어야 할 것 같아요ㅎㅎ 좋아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용
4년 전
독자3
아니에용 진짜 제가 이런 글을 읽을 수 있게 해줘서 고맙습니다ㅠㅠ 앞으로도 자주 봐요 우리ㅠㅠ 저 작가님 글만 기다린다구요... 알림도 신청해 놨어요ㅎㅎ
4년 전
독자2
러브레스 마지막인건가요..!?!? 다정한 성격이 너무 치명적입니다 저 진짜 과몰입됐나봐요 너무 사랑하는글입니당..ㅠㅠ
4년 전
42
네 아쉽지만 이 글로 럽미레는 막을 내렸습니다ㅠㅠ 좋아해주셔서 감사해요 하트 뿅뿅
4년 전
비회원21.238
악 럽미레 완결이라구요?? 너무 아쉬워요ㅠㅠㅠㅠㅠㅠㅠㅠ 지금까지 잠이 안 왔던 건 다 작가님 글 보라고 꾸민 제 몸뚱아리의 빅피쳐겠죠? 껄껄 오랜만에 다정한 연준이 봐서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작가님,,,, 진짜진짜 럽미레 보는 내내 하이틴 물 보는 느낌이었어요 짱짱!
4년 전
독자4
ㅠㅠㅠㅠ진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 읽어가는게 아까워서 한문장 한문장 천천~히 읽었네용 ㅠㅠㅠㅠ너무 좋은 작품 써주셔서 감사해요❤️
4년 전
독자5
이번에도 잘 읽고 가요!! 늘 기다리고 있답니다
4년 전
비회원160.132
아ㅜㅜㅜㅜ 진짜 항상 잘 보고 있어요 글이 진짜 너~~무 좋아요ㅜㅜㅜㅜㅜ 처음 럽미레 읽었을때 그 충격 잊지 못해요 진짜ㅜㅜ 최고예요ㅠㅠ 마지막이라니 아쉽지만 잘 읽고 갑니다♡
4년 전
독자6
아 이제 진짜 끝이라니 저 울었어요....작가님 럽미레스 최고인거 알고 계시죠???ㅠㅠㅠㅠㅠ
4년 전
독자7
진짜 짱이에요ㅠㅠㅜㅠㅠ과거 얘기도 나오면서 완전 짱짱이에요ㅠㅠㅠㅜㅠ도라와,,,
4년 전
비회원14.71
여자라 저런대우를 받았다는게 슬프네요. 아직도 여주네 가족들처럼 고지식한 집안들이 많은데 제발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이 미친나라에서 여자로 살아가기 정말 어려운거 같아요. 저도 여자라 부당한일을 겪은적이 많아서 더욱 마음이 아프네요......ㅜㅜ
3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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