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놀란 내 눈이 동그래졌다.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상황에 눈만 깜빡, 깜빡 감았다 뜨니 내 옆에 서 있던 박차장님이 내 팔을 아프지 않게 툭 쳤다.
"뭘 그렇게 멍하니 보고 서 있어요. 본부장님 당황하시게…."
"에? 아, 네. 저, 그러니까…."
여전히 멍한 정신의 나는 옆에 선 박차장님을 한 번 바라보았다가 얼른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는 내 앞에 날 마주보고 선 남자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별다른 표정이 없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저 남자를 잘 모르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저 남자가 무표정하다고 생각할 지도 몰랐지만 내 눈에는 달랐다. 저 표정은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 건지 흥미를 가득 담은 남자의 눈이 내게서 고정되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뭐라고 말을 해야하나 망설이는 나를 향해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
"이번에 새로 본부장 자리에 오게 된 김태형 입니다."
조금은 낮은 목소리와 딱딱한 말투로 내게 인사를 끝낸 김태형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자는 의미인 듯 했다. 잠깐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그 손을 잡자 김태형이 피실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 빠진 웃음 소리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째서!
어째서 저 병아리가 여기에 이러고 있는 거냐구!
Oh my boss 1
부제 : 그 작던 병아리가 언제 이렇게?
김태형은 전정국의 친구였다. 하는 짓은 뭐든 하나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내 동생 전정국이 한 일들 중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일이 바로 김태형을 친구로 삼은 일이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정국이의 친구였던 김태형은 우리 집에 종종 찾아오곤 했다. 나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바가지 머리와 다를 바 없는 검은색 생머리에 쌍커풀이 없으면서도 짙은 눈매. 웃으며 내게 인사를 건네던 고등학생 김태형은 말 그대로 소년이었다. 꽃소년.
나는 그런 김태형을 병아리라고 불렀다. 김태형이 병아리가 된 이유는 간단했다. 나와 친해진 이후로 졸졸, 나만 따라다닌 것이 이유라면 이유였다. 혹시나 나를 좋아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김태형은 꾸준히 여자친구를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누나, 누나, 하며 내 연애사며 모든 것들에 사사건건 신경을 쓰고 태클을 걸었다.
그 남자는 별로에요.
누나는 남자 보는 눈이 너무 없어요.
누나, 엠티 가요?
누나는 이런 옷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저 같은 남자는 어때요?
그런 김태형의 말에 늘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너는 신경 끄세요.
김태형은 제가 외동 아들이라고 했다. "저도 누나 같은 누나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하고 내게 살랑살랑 눈웃음을 짓던 꽃소년이었는데…. 불과 몇 일 전만 해도 우리 집에 와선 백수처럼 놀고, 먹고, 자고 함께 놀다 갔었는데!
조금 전에 봤던 김태형의 모습이 진짜인 건지 아닌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멍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던 내 귀에 옆자리에 앉은 차대리님과 소은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부장님 대박. 전 저렇게 젊은 사람이 본부장님으로 올 줄 몰랐다니까요."
"나도 놀랐어. 어린 것도 어린 거지만, 어떻게 저렇게 생긴 사람이 다 있어?"
"그러게요. 완전 꽃부장이에요, 꽃부장. 안 그래요, 탄소 언니?"
나를 향해 묻는 소은이의 말에 멍하던 시선을 깨서 소은이를 바라보았다. 어, 어? 하고 소은이를 바라보니 소은이가 웃으며 말했다.
"언니, 아까 전부터 왜 그렇게 멍해요. 못 볼 사람 본 것 처럼…. 설마, 본부장님이 너무 잘생겨서 한 눈에 반하고 뭐 그런 거에요?"
소은이의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전혀 아니야. 난 본부장님 같은 스타일 안 좋아해."
"그래요? 전 딱 제 스타일이던데."
웃으며 말하는 소은이를 향해 작게 웃곤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하아…. 새어나오는 한숨을 막지 못하고 푹 내쉬는데 옆에 놓아둔 휴대폰에서 띠링, 하는 알람이 들려왔다. 휴대폰을 잡아 반짝이는 화면을 확인하자 조금 전 보낸 카톡에 전정국이 보낸 답장이 도착해 있었다.
야 김태형이 여기 있어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뭔 소리야
병아리가 여기 ㅂ본ㅂ즈장이알닉까
-??
-알아듣게 얘기 좀
김태형이 우리 회사 본부장으로 왔다고!! 본부장!!
답답함을 꾹꾹 담아 휴대폰을 누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전정국의 답이 도착했다.
-그래서 그게 뭐?
그래서 그게 뭐…? 태연한 전정국의 대답에 답장을 치다 말고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익숙한 컬러링이 얼마 흐르지 않아 전화를 받은 전정국을 향해 "여보세요." 대신 다른 말을 먼저 꺼냈다.
"너는 알고 있었어?"
[어.]
"야아, 알고 있었음 말을 했어야 할 거 아냐. 나 오늘 회사 와서, 본부장님을 딱 봤는데, 그게 딱, 김태형이!"
[아, 좀 정리해서 말해. 뭐라는 거야.]
"김태형이…!"
뭐라고 크게 말을 하려던 나는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혹시나 주위에 다른 사람이 들을까 작게 몸을 숙인 나는 목소리의 볼륨을 조금 줄이고 말을 이었다.
"김태형이 본부장이라구…. 쟤가 몇 일 전에도 우리 집에 왔던 걔가 맞아? 맞는 거야?"
[맞아.]
"그 백수가?"
[전에 말했잖아. 걔는 그냥 백수가 아니라 선택형 백수라고. 잠깐 사정이 있어서 일 안 하고 쉬다가 돌아간 것 뿐이야. 걔네 아버지 돈 많이 번다고도 말했었잖아.]
전정국의 말에 전에 나누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우리집 소파에 누워 아롱이(강아지)를 품에 안고 함께 놀던 김태형과 소파 앞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던 전정국. 그리고 그 둘에게 사과를 깎아서 가져다 주던 나.
"병아리, 넌 일 할 생각 없어?" 하고 묻는 내 물음에 김태형은 아롱이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생각 중이에요."
그런 김태형을 향해 사과 하나를 우물거리다 꿀꺽 삼키곤 말했다. "언제까지 생각만 할 거야. 정 일할 곳 없으면 우리 회사 오라니까? 요새 신입사원 뽑는다고 시끌시끌해."
내 말에 김태형이 힐끔, 날 바라보곤 답했다. "정말요?"
"응. 너도 여행 좋아하니까 우리 회사에서 일하면 잘할 것 같은데."
"얘 딱히 일 안 해도 돼. 얘네 아버지 돈 잘 버시니까."
무심한 전정국의 말에 놀란 내가 김태형을 향해 "진짜?" 하고 되묻자 김태형이 대답 대신 피실 피실 웃었다.
"얜 선택형 백수야."
"선택형 백수?"
"일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고 있는 거."
전정국의 말에 "그래?" 하고 되묻자 전정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빈 포크로 사과 하나를 다시 푹 찍은 나는 옆에 누워있는 김태형을 바라보았다. 하긴, 그렇게 놀면서 입고 다니는 옷도 꽤 괜찮고, 저 나이에 차도 있는 걸 보면…. 하고 그냥 흘려 들었던 나였다.
…세상에나. 세상에. 세상에!
그제야 떠오른 대화 내용에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게 대체 무슨…. 아무런 대답도 없는 내게 전정국이 [누나.] 하고 불러왔다. 겨우 정신을 잡은 내가 "어, 어?" 하고 대답하자 전정국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바빠. 끊는다.]
"어, 어어…."
이미 끊겨버린 전화에 대고 웅얼대며 대답을 한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조금 전 봤던 김태형이 진짜일까 혹은 가짜일까에 대해 고민을 하던 것에 대한 답이 나왔다. 그 김태형은 진짜였다. 병아리 김태형. 그리고 지금은… 김태형 본부장님. 말도 안 되는 둘 사이의 갭에 나는 나도 모르게 다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흐아아."
정리가 되지 않아서 머리를 도리도리 젓곤 손으로 이마 위를 덮는데, 맞은 편에서 누군가 내 모니터 위를 가볍게 톡톡 두드려왔다. 고개를 들어 맞은편 자리를 바라보자 차대리님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대리님."
"무슨 일 있어? 아까부터 멍하게."
"아뇨. 아무 일도 없어요. 그냥, 잠깐 머리가 좀 복잡해서…."
"얼른 정신 차리고 본부장실로 가봐."
"…에? 본부장실이요?"
놀란 내가 본부장실이요? 하고 되묻자 차대리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탄소 씨만 본부장실로 부르셨어. 조금 전 올렸던 기획안 때문에 그러시는 거 같던데."
"그래요?"
웅얼거리며 되물은 내가 "네, 알았어요." 하고 답하자 차대리님이 다시 한 번 모니터 위를 툭툭 두드리곤 자리로 돌아갔다. 왠지 모르게 무거워진 엉덩이를 겨우 의자에서 떼낸 내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평소에도 본부장실로 불려가는 건 별로 달갑지 않았지만 오늘은 유독 더 달갑지 않았다.
아마도, 그 의자에 김태형이 앉아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겠지.
살짝 주름이 진 치마를 살살 털어낸 내가 본부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 안에 몸을 싣고 9층을 꾹 누르자 엘리베이터의 문이 금방 닫혔다.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가만히 엘리베이터의 층수가 바뀌는 것을 올려다보던 나는 힐끔, 옆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모처럼 화장을 하고 온 것이 다행이었다. 앞머리를 살살 정리하던 나는 순간적으로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화장을 해서 다행이야…? 뭐가 다행이란 거지?
참 나. 집에 있을 땐 쌩얼도 다 봤었는데, 이제와서 화장은 무슨….
9층입니다, 하는 알림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던 내가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세요." 하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내게는 시선을 주지도 않은 채로 책상에 앉아 서류를 넘겨보는 김태형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을 보자마자 "너 뭐야!" 하고 소리라도 칠 생각이었던 나는 그런 김태형의 모습에 입을 꾹 다물었다. 저렇게 있으니까, 정말, 김태형은 본부장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나를 불러놓고도 김태형은 묵묵히 서류만 읽을 뿐이었다. 덕분에 병풍처럼 가만히 서있던 내가 한참의 정적을 깨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
"…부르셨다고 들었는데요, 본부장님."
너 뭐야! 하고 소리치긴 무슨. 김태형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겁을 먹은 나는 작아진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런 내 목소리에 그제야 서류에서 눈을 돌린 김태형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거기."
"…네?"
"거기 앉아서 잠시만 기다려요."
딱딱한 목소리로 내게 말해오는 김태형의 말에 잠깐 망설이다 "네…." 하고 답한 뒤 바로 앞 검은 소파의 끝에 조심스레 걸터 앉았다. 정말이지 이상한 느낌이었다. 김태형 앞에서 내가 이렇게 불편한 자세로 있을 줄이야…. 하지만 김태형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계속해서 서류를 넘길 뿐이었다.
방 안에는 시계소리와 서류를 넘기는 소리밖에 들려오지 않았다. 한참을 서류만 보던 김태형을 힐끔, 힐끔, 바라보던 나는 별안간 김태형과 눈이 딱 마주쳤다. 놀란 내가 흠칫 몸을 떨자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태형이 보던 서류를 탁 소리가 나게 덮었다.
어… 나… 뭐 잘못한 건가…?
왠지 탁 소리가 나게 덮은 건, 일부러 그런 것 같은데….
닿아오는 시선이 낯설어서 시선을 피한 내 귀에 정적을 깨고 '피식' 웃는,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레 들려온 웃음소리에 내가 다시 김태형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한 쪽 팔로 턱을 괸 채로 웃으며 날 바라보고 있는 김태형이 눈에 들어왔다.
"누나."
"…에?"
"왜 그렇게 겁먹고 그래요. 제가 누나 잡아먹기라도 해요?"
평소의 병아리로 돌아온 김태형의 모습에 멍하니 김태형을 바라보기만 하자 피식 웃음을 흘린 김태형이 몸을 일으켜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앉은 쇼파 앞 탁자에 털썩 앉은 김태형이 웃으며 내 얼굴 앞으로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가 이렇게 멍해요."
"……."
"누나."
"……."
"탄소 씨?"
"…네?"
"뭐야, 본부장으로 말 걸어야 대답하는 거에요?"
여전히 멍하게 김태형을 바라만 보던 내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아닌데…." 대체 어디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단 말야. 본부장님 김태형을 대할 때와 병아리 김태형을 대하는 건 너무나도 다른 걸! 말을 높여야 하나, 낮춰도 되는 걸까 고민을 하던 내가 말끝을 흐리자 김태형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 건지 피실 피실 웃으며 내게 말해왔다.
"탄소 씨."
"…네."
내 대답에 뭐가 그렇게 웃긴 건지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김태형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제야 제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병아리 김태형이 맞구나. 그 병아리 김태형이, 내 상사, 새로운 본부장님이 맞구나.
그렇게 현실을 하나씩 직시해가던 내게 김태형이 웃으며 말했다.
"저랑 같이 저녁 먹으러 갈래요, 누나?"
그리고 김태형이 말을 끝낸 그 때 한 가지 걱정만이 내 머리속을 삼켰다.
왠지 오늘부터 회사 생활이 순탄치 않을 것만 같다는 그런 걱정이.
*
제가 좋아서 쓴글이에용.......♡ 태형이는 the love.....♡